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179)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79화(179/200)
21장 영웅 : 익숙한 망나니
여태껏 긴 여정을 달려왔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부단하게 노력하며 이 자리까지 왔다.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만큼 소득도 있었다.
세븐 스타와의 친분은 그 소득 중 하나였다.
고든 로이드 백작, 화염의 카리나, 순례자 톰, 성기사 요한, 현자 오르네오, 한스 기사단장, 사막왕 가젤.
몇몇 인물과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으나, 전원 나에게 협조를 약속하고 지지해주겠단 약속을 받아냈다.
누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인맥이 있음에도 신분을 숨기고 모험가 칸으로 위장한 이유.
세븐 스타 각자의 영향력이 워낙 높은 탓이다.
이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휘청일까봐 최대한 연락을 자제했다.
황혼의 전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먼저 나섰다간 잡아먹힐 수 있기에, 날카로운 칼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두었다.
하지만 더는 웅크릴 필요가 없어졌다.
해저도시에서 운 좋게 식탐을 해치웠고, 조금 힘겨웠지만 오만도 해치웠다.
나태도 배반하여 우리 쪽으로 붙었고 새로운 탐욕이었던 알렉스 황태자는 오만이 알아서 정리해줬다.
질투와 (구)탐욕, 색욕은 예전에 해치웠으니 이제 남은 황혼의 수뇌부는 황혼교주와 분노 둘 뿐이었다.
이쯤 되면 세븐 스타를 모두 소환해서 황혼 교주를 끝내도 되지 않을까.
마침 나도 소드마스터로 오르고 드래곤 코코도 서서히 제 몫을 하고 있으니.
아르니아 대륙 회의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제안하게 되었다.
황제군과 사막군은 임시 휴전을 맺었다.
우선 제국측은 전쟁의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사막왕도 나와 파헬의 체면을 봐서 일단은 참겠다는 분위기였다.
이십년 만에 대륙에 새로운 용사가 탄생했고 그 용사가 대륙의 별과 군주를 불러모은다는 소문이 방방곡곡 퍼져 나갔다.
당연하게도 모든 군주가 순순히 소집령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들에게 여러 번 사신과 사절을 보내 작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 친분이 있던 세븐 스타들도 하던 일을 정리하고 와야했기에 정식회의 날짜는 소집령을 내린 시점으로부터 무려 두 달 후로 정해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두 달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코코의 성장이었다.
코코 녀석은 오만과의 전투 당시 허무하게 저주에 당해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내게 사과했다.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코코는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 이렇게 고민해놔야 나중에 더 강한 적을 만났을 때 기민하게 움직일 테니까.
리치왕 오만은 황혼교주를 만나기 전 예방주사였던 셈이다.
어쨌든 이번 기회로 코코는 종족에 대한 자부심도 많이 내려놓았다.
개인적인 훈련도 실시하고 캠벨과 시온과의 대련도 꾸준히 병행했다.
덕분에 캠벨이 매일 같이 반송장이 되어서 돌아왔지만 뭐···드래곤과의 훈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캠벨에게도 좋은 경험이 아닐까 싶다.
물론 캠벨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의견이다.
단순히 훈련 뿐만 아니라 코코 자체도 많이 성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장의 촉매가 되어준 것은 오만에게 빼앗은 목걸이였다.
목걸이에 달린 정체불명의 시커먼 어금니는 심연의 아귀를 불러내는 매개체였는데, 내포된 마기가 상당해서 코코가 군침을 흘렸다.
“나 저거 먹을래뀨!!”
처음에는 심연의 아귀가 신경 쓰여서 조금 망설였다.
그러나 목걸이는 심연의 아귀를 불러내는 매개체일 뿐이고, 성체까지 진화한 드래곤인 코코라면 어떻게든 소화시키지 않을까 싶어서 허락해줬다.
“뀨!!”
어금니를 꿀꺽 삼킨 코코는 방대한 마기를 접하고 사흘 내내 꿀잠을 잤다.
며칠 후에 일어난 코코는 덩치가 훨씬 커져있었다.
비늘과 날개는 더욱 단단해졌고 발톱도 예전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무엇보다 눈빛이 깊어졌는데,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강해졌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코코 — 성룡] [진화율 — 50%] [진화율이 100%가 되면 에인션트 드래곤으로 진화합니다.]시스템창도 코코의 성장을 반기듯 무려 50%의 진화 점수를 부여했으니, 다음 전투에서 코코의 활약이 기대된다.
코코의 성장 소식은 호재지만, 거기에 너무 기대서도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성장이다.
결국 내가 황혼교주를 감당해내지 못하면 아무리 주변에서 도와준다 한들 소용없다.
게다가 <시온 라이크>의 최종 보스는 마왕 바알. 지금보다 더 강해질 이유는 넘쳐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만을 상대하기 전에도 꾸준히 단련하고 있었고, 오만을 상대하고 난 이후 약간의 깨달음을 얻고 기운을 다루는데 훨씬 익숙해졌다.
[마나 각성도 현황.] [혼합률 현황] [초록마나 각성도 75%] [↑9.0%] [푸른마나 각성도 75%] [↑5.0%] [용혈 각성도 75%] [↑7.0%] [혼합률 70%] [↑10.0%]삼원마나 전부가 제3고지인 75%를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혼합률도 무려 10% 올라갔다.
아직도 단전에는 저번 해저도시에서 삼킨 인어왕의 보주가 반쯤 남아있다.
심지어 코코가 준 여의주도 녹이는 중이니 각성도는 계속해서 우상향 예정이었다.
*
현재 나는 물어볼 것이 있어서 사막왕의 게르를 방문했다.
술을 마시던 가젤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이게 누구신가! 용사님이시군. 옷도 안 입고 예의없이 맞아서 미안하네. 원래 술 마시면 몸에 열이 올라서 웃통을 벗고 있거든.”
“괜찮습니다. 사실 그것보다는 궁금한 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하하하!! 뭐든지 질문하게. 내가 아는 선에서는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겠네.”
“혹시 신령한 기운을 내뿜는 나뭇가지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황금가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번 황금가지 시험에서 나타난 멀린의 기억을 회상해보자면 그 무대가 사막이었다.
그곳에서 멀린은 거인의 어깨에 타고 저항군을 쓸어버렸다.
비록 일천 년이 지났지만 오랜 시간 사막을 지켜온 가젤이라면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이다.
내 말을 들은 가젤은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신령한 나무? 잘 모르겠는데? 애초에 사막에는 나무 자체가 많이 없어서.”
역시 허탕인가.
실망한 마음을 감췄다.
“괜찮습니다. 괜히 제가 귀찮게 했군요. 그럼 대륙회의 때 뵙겠습니다.”
“이 사람아, 뭐가 그리 급하나. 일단 앉아보게. 비록 나는 모르지만, 알만한 사람을 부르겠네.”
“정말입니까?”
“우리 부족에 주술사 할매가 있어. 적어도 나보다 오십 살은 더 살았으니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분을 만나뵙고 싶군요. 자리를 마련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기대하진 말게나. 건조한 사막과 나무는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니까.”
마침 주술사는 제국에 머물고 있었다.
덕분에 만남은 금세 이루어졌다.
그녀는 멜브스 대평원에서 남쪽으로 약 일주일 거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전쟁이 시작되자 노구를 이끌고 사막에서부터 올라왔단다.
고령의 나이에 후계자 대신 본인이 직접 움직인 것을 보면, 그녀가 베르누스 왕국과 사막왕 가젤에게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사막의 눈이라 불리는 노파입니다. 편하게 할매라고 부르세요.”
직접 본 주술사는 하얗게 센 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전형이었다.
깡마른 몸을 지팡이로 지탱했는데,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두 눈을 가린 검은 안대 쪽으로 시선이 저절로 갔다.
자신을 사막의 눈이라 소개했으니 시각 쪽으로 특별한 이능력을 가진 듯했다.
“미안하지만 나만 할매라고 부를 수 있네. 용사님은 주술사님이라 불러주시게.”
호칭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녀에게 물었다.
“주술사님, 혹시 신령한 기운을 품은 나무나 나뭇가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물어보면서도 내심 모를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네? 정말로? 신령한 나무를요?”
“모를 리가 없지요. 사막의 주술사가 진실의 눈을 개안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신물이니까요.”
사막의 주술사는 대대로 진실을 판별하는 능력을 가졌다.
이 능력 때문에 이들은 사막의 눈이라 불린다.
능력을 각성하기 위해서 주술사 후보들은 스무살 즈음에 신령한 나뭇가지를 눈에 대고 약 일 년간 생활한다.
밥을 먹을 때도, 샤워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지어 배변 활동을 할 때까지 절대 가지를 눈에서 떼지 않는다.
이런 고행 끝에 극히 소수가 신안(神眼)을 각성하게 되는데, 할매라 불리는 노파도 각성자였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황금가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기거하는 임시 사당에 보관 중입니다. 오늘 가져오진 않았습니다.”
“주술사님에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전 대륙을 떠돌며 황금가지를 모으고 다녔고, 현재 다섯 개를 모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여섯 번째 황금가지를 얻고 싶다고도 말했다.
이는 제법 민감한 부탁이었다.
왜냐하면 사막의 주술사에게 있어 황금가지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신물이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상황을 예상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의외로 노파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저희 주술사 사이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언이 있거든요. 『신목의 파편은 사막의 소유물이 아니다. 때가 되면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리라.』제가 들은 내용입니다.”
“그 말인 즉슨···”
“제 앞에서 용사님이 황금가지의 주인임을 증명하십시오. 납득이 된다면 얼마든지 신물을 양도하겠습니다.”
가젤과 주술사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집중되었다. 이걸 어떻게 증명해야 한담.
-애송아, 네가 자주 소환하던 거목을 꺼내라. 본좌가 보기에 드루이드에게 그 나무는 신분증이나 마찬가지다.
마침 천마가 괜찮은 제안을 했다.
“좋습니다.”
[라이프 컨트롤] [세계수 묘목 소환]쿠구구구
지축이 흔들리며 땅에서부터 세계수 묘목이 치솟아 올랐다.
비록 묘목이라지만 그 크기는 수천 년을 살아온 일반목과 다름없는 크기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레 게르를 부수고 나온 나무를 본 호위병력이 깜짝 놀라서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세계수의 웅장함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사아아아
나무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산들바람.
그 바람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힘이 솟고 기분이 고양된다.
그뿐이랴.
사방에서 날아온 새가 나뭇가지를 의자 삼아 노래를 불렀고, 지상 동물이 나무 근처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거기에 육식과 초식의 구분은 없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푸른 영역이 점점 확대되었다.
발목에도 못 미쳤던 풀이 무릎까지 올라왔고, 떡잎만 겨우 자랐던 식물이 어느새 수려한 꽃을 만개했다.
“아름다워···”
사막 전사 한 명이 무심코 내뱉은 말.
그만큼 세계수의 영향력은 장대했고 보여주는 광경 하나하나가 이적 그 자체였다.
가젤 또한 깊게 감명받은 눈치였다.
할매라 불리던 주술사는 눈썹까지 파르르 떨며 세계수 앞에 무릎 꿇고 치성을 올렸다.
“용사님은 신목의 대행자였군요. 자격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십니다.”
그 일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무려 여섯 번째 황금가지.
이것만 흡수하면 남은 가지는 단 한 개 뿐이다.
지금도 최상급 드루이드로 엄청난 위력의 스킬을 쓰는데 여기서 황금가지를 더 삼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더는 못 참겠다.
바로 황금가지에 손을 댔다.
[황금가지를 발견하셨습니다.]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세계수의 시험을 치르시겠습니까?] [Y/N]볼 것도 없이 예스.
[세계수의 시험에 응답하셨습니다.] [시험을 돌입합니다.]스파아앗!!
역시나 이번에도 멀린의 몸에 들어가서 기억을 엿보게 된다.
지지난번엔 바다, 지난번엔 사막, 이번엔 어디지?
주위를 둘러봤더니 온통 폐허였다.
금이 간 성벽과 문 한 짝이 떨어져 덜렁대는 성문.
집집마다 화염이 치솟아 시커먼 연기를 토해냈고, 사지가 온전치 못한 시체가 쓰레기처럼 이곳저곳에 널려있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금세 깨달았다.
이 참상의 주범은 바로 나.
정확히는 내가 빙의해있는 멀린이라는 것을.
외성도 모자라 내성과 왕성까지 초토화였다.
값비싼 옷을 입은 귀족,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영애, 왕관을 쓴 국왕도 예외 없이 평등하게 죽어있었다.
멀린은 무너진 왕성의 잔해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에 멀린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축 늘어진 흰머리와 이마에 깊이 팬 주름살.
숲에서 봤을 때의 소년의 시간도 지났고 바다에서 봤을 때의 중년의 시간도 지났다.
이제 그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완연한 노인이었다.
그런 멀린에게 저번 사막에서 봤었던 거인과 바다에서 봤던 거대문어 크라켄이 다가왔다.
“은인이여, 이곳을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저항 세력이 멸절했다. 이제부터 은인은 명실상부한 아르니아 대륙의 지배자다. 축하한다.”
멀린이 세계를 지배했다라.
속으로 놀랐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기억을 회상했다.
“은인이여, 결정해라. 원래 계획대로 모든 지성체를 말살하여 대륙을 멸망시키겠는가, 아니면 남은 버러지에게 목숨이나마 연명할 기회를 주겠는가.”
“그건 좀 곤란한데? 인간은 맛있단 말이야. 대청소는 절대 안 돼. 적어도 내 간식거리는 남겨달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크라켄이 투덜댔다.
흐린 눈빛으로 폐허를 바라보던 멀린이 입을 열었다.
“어렸을 적부터 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엘프족은 악마 그 자체였지. 하지만 틀렸다. 숲 바깥에는 엘프보다 더한 인간이라는 악마가 살았다.”
멀린의 담담한 어조는 청자를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긴 세월 이곳저곳을 떠돌며 수많은 일을 경험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아르니아 대륙에 지성체를 살려둘 의미가 있느냐였다. 나는 어떻게든 필요성을 찾으려 했다. 내가 못 본 세상의 선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찾았는가? 인간과 엘프는 대륙의 땅을 밟고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가? 은인의 결론을 듣고 싶다.”
잠시 폐허를 둘러보던 멀린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지만 이들은 갱생의 여지가 없다. 이대로 사라져주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행이야.”
“그렇군.”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움직인다. 대륙을 한 바퀴 돌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지성체를 죽이겠다.”
“알았다. 은인이여.”
멀린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다니···
원래도 그가 불우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모난 영혼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는 엘프의 숲에서도 확인한 사안이다.
당시에 리처드 대장로에게 빙의한 멀린의 영혼 조각은 세상을 끝장내겠다 장담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멀린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인생을 체험하고 희로애락에 공감했던 나로서는 팔이 저절로 안으로 굽었다.
같은 드루이드에 하프 엘프로서 동질감도 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처참한 학살의 현장을 마주하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버렸다.
분명 멀린에게 잔혹하고 처참한 만행을 저지른 인간은 수없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벌인 대학살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저기 폐허 속에 죽은 사람들을 보라.
저들은 멀린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저 평범한 상인, 농사꾼, 경비대원,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딸일 뿐인데.
어째서 그들은 눈도 못 감고 원통하게 죽어야만 했을까.
‘아니다. 살인을 멈추고 이대로···’
[기억 회상 중입니다] [개입이 불가합니다]역시 어쩔 수 없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지?
저항 세력도 모두 처리했는데.
일천 년 후에도 인류와 엘프족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응? 저길 봐.”
크라켄이 어딘가를 보며 의문성을 내뱉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문어 다리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웬 노인이 폐허를 비집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복장은 특이했다.
소매가 넓은 검은색 도복은 아르니아 대륙 어디에서도 본 적 없었다.
허리춤에 찬 검이 왠지 모르게 낯익었다.
뒷짐을 진 채 팔자걸음으로 오던 노인네는 부서진 가게 앞에 멈추었다.
한참 동안 건물 잔해를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네만. 혹시 여기서 포목 장사하던 여인네를 보지 못했나? 손이 무척이나 고운 처자였는데.”
노인의 물음에 크라켄이 피식 실소하며 앞으로 나섰다.
“미친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보군. 딱 보면 모르냐? 손이 고운 처자고 나발이고 여기 있는 인간은 다 죽었다. 곧 네놈도 따라가겠지. 늙은 인간은 맛없으니 그냥 짓눌러 죽여주마.”
다리를 들어 올린 크라켄.
그러거나 말거나.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노인은 태평하게 무너진 가게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죽어라!!!”
거대한 문어 다리가 내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서걱!!!
뭘 어떻게 한 거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느새 크라켄의 다리는 16등분이 나 있었다.
노인네는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죽여버리겠···”
“피해라!!!”
거인이 급히 크라켄을 옆으로 밀었다.
동시에 피가 튀며 무언가가 하늘을 날았다.
거인의 새끼손가락이었다.
만약 크라켄이 그곳에 있었다면?
머리부터 몸통까지 좌우로 절반이 나뉘어 단숨에 즉사했을 터.
이제야 저 노인네가 누군지 알았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은 이유도 깨달았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천마 영감님은 일천 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