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198)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98화(198/200)
23장 외전 : 코꿰인 망나니
#5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동안 외면했던 골칫거리가 코앞까지 당도해버렸다.
“새빨간 손수건이라니···”
서류상 내 와이프이자 전 왕국민이 내 아내로 생각해주는 여인.
레베카 드 아리안느 엘든 42세.
그녀의 호출이었다.
레베카와 내 관계는 복잡미묘하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나와 결혼했고, 소기의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했다.
지금도 그녀는 나라를 통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남자는 꿈도 못 꾸는 실정이다.
애초에 애정 없이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였기에 그녀도 나도 피만 제공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고 여러 일에 얽히다 보니 예전처럼 공과 사가 분명해지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분명한데 그녀 쪽에서 자꾸 신호를 보내왔다.
낯 뜨거운 편지가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답장도 늦게 했고 연락도 최소화했다.
그랬더니 결국 이 여자가 거나하게 사고를 쳤다!
때는 일주일 전.
그녀가 선물을 보내왔다.
이미 여기서부터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하사품은 고급스러운 나무함에 담겨 있었는데 드루이드의 직감은 열어보는 걸 강력히 거부했다.
그러나 직감이 거부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다.
눈물을 머금고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은 나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레베카가 보낸 물건은 새빨간 손수건.
여기에는 꽤나 외설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엘든 왕국의 역사를 살펴보자.
수백 년 전 엘든 왕국이 한참 전쟁 중일 때, 마을의 남자란 남자는 죄다 죽어나가서 집집마다 여인들의 통곡이 매일 이어졌다.
정화수를 떠놓고 신께 남편 혹은 연인의 무사귀환을 빌던 여인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괴소문이 돌았다.
그건 출정을 나가는 남편에게 자신의 생리혈이 묻은 손수건을 주면 살아서 돌아온다는 어처구니 없는 미신이었다.
근거라고는 전혀 없지만, 절박하면 굴러다니는 낙엽에도 기도를 올리는 게 사람이다.
여인들은 너도나도 생리혈을 묻혀서 남편이나 연인의 주머니에 넣어줬다.
그 이후로 남자들의 생존률이 대폭 늘었다는데 거기까지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라서 믿거나 말거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손수건 문화는 여러모로 변화했다.
우선 번거롭게 피를 직접 묻히기보다 새빨간 손수건을 만들어서 넣어주는 식이 되었다.
평화로운 시절이 계속되다 보니 의미 또한 달라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무사귀환보다는 여인 쪽에서 남자를 강력히 원할 때 쓰는 일종의 고백 수단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 집에 라면 먹으러 올래?’ 라고 보면 되겠다.
진짜 문제는 여인의 정조가 강조되는 지금 시대에 손수건은 그야말로 비상수단이라는 점이다.
보통은 매춘부나 농노 여인이 자주 쓰지, 귀족 영애가 손수건을 쓰다가 소문이 잘못 나면 신세 망치는 지름길이었다.
예전에 자작가 유부녀가 몸 좋고 잘생긴 나무꾼에게 남편 몰래 새빨간 손수건을 보냈다가 걸려서 이혼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나마 손수건을 보낸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남편인 나라서 다행이랄까.
정조 면에서는 문제될 게 없지만 머릿속이 괜히 복잡해졌다.
“가야 되겠지.”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 끝에 왕궁에 도착했다.
이동은 금방이었다.
왕궁과 로이드 후작성을 연결한 웜홀 생성기로 단숨에 텔레포트했다.
도착하자마자 레베카를 보려고 했건만, 의외의 얼굴들이 나를 반겼다.
“라칸? 에이든?”
라칸과 에이든도 여기서 내가 등장할지는 몰랐는지 놀란 기색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는 국왕 전하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만, 주군께서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영문을 모르던 차에 문이 열리며 이 상황을 만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모두 불렀습니다. 들어오세요.”
레베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녹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서 보드라운 뒷목을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밀가루를 빚은 것마냥 하얬고 촉촉한 눈동자와 입술은 사내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진짜 정체는 뱀파이어.
뱀파이어 종족 특유의 매력 때문에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예전에 수줍고 뻣뻣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안경 쓴 범생이었던 그녀는 왕국 최고 인싸녀로 탈바꿈했다.
따뜻한 차가 놓여진 테이블.
라칸과 에이든, 내가 차례로 앉았다.
자리를 만든 레베카가 라칸을 보며 운을 뗐다.
“몰티 자작님, 서임식 때 이후로 처음 뵙는 거죠?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깜빡하고 이야기를 안 했는데.
푸른매 용병단장이었던 라칸은 작위를 받고 몰티 자작이 되었다.
알다시피 몰티령은 현재 엘프와 인간이 뒤섞여서 상당히 불안한 상태.
나로서는 믿을만한 가신을 영주로 앉혀야 했고, 그런 면에서 라칸은 가장 적합한 인재였다.
용병으로 시작해서 전 대륙을 떠돌았던 라칸은 영주 자리를 주겠다는 내 제안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작위를 받고 몰티 자작이 된 라칸은 나를 섬긴 지 십 년도 안 되어서 꿈에 그리던 안정적인 생활을 손에 넣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국왕 전하.”
“헌데 궁금한 점이 있네요.”
“하문하시지요.”
“자작께서 몰티령을 다스리시면 푸른매 용병단과 알버스 영지는 누가 다스리는 거죠?”
“아, 그곳은 제 양아들인 유칼이 다스립니다.”
“유칼이라면···그 천재 검사 말씀하시는 거 맞죠?”
“예.”
유칼은 자유도시 리앙에서 노예로 끌려가던 놈을 내가 구해준 후 라칸에게 보냈다.
예전에는 푸른매 용병단의 부단장이었는데 이제는 단장으로 승격하고 라칸의 양아들로 입적했다.
또한 힐튼과 리앙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알버스 영지의 영주이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영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녀석의 무지막지한 실력 때문.
벌써 소드마스터를 눈앞에 둔 소드익스퍼트 상급이다.
스물도 안 된 나이를 생각해보면, 유칼은 나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천재인 셈이다.
아마 내가 은퇴한 다음에는 녀석이 용사가 되거나 세븐 스타를 대표하는 첫번째 별이 되지 않을까.
나중에 시간 나면 경지를 넘는데 도움이 될 만한 화두나 몇 개 던져주고 와야겠다.
“후작령에는 참으로 인재가 많군요. 원래 좁은 지역에 여러 고수가 몰려있으면 분란이 일어날 만도 한데요.”
“용사님이 떡하니 버티고 계시는데 누가 그런 미친 생각을 합니까? 게다가 제 아들 유칼은 용사님을 닮고 싶다면서 매일 검술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어디 떠날 놈이 아니지요.”
고개를 끄덕인 레베카가 이번엔 에이든을 보고 말했다.
“리앙의 시장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제가 잘해서 된 것도 아닌데 송구합니다. 예전 시장님의 절반이라도 하길 바랄 뿐입니다.”
얼마 전에 리앙의 시장이었던 유론이 천수를 다하고 하늘로 갔다.
당연히 장례식에 참석했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에이든도 위로해줬다.
유론은 유능한 인재였으나 황혼교의 음모에 휘말려 말년에 큰 일을 당했던 노인.
내 덕분에 위기에서 빠져나온 그는 그때 일이 두고두고 고마웠는지 유언장에도 내 이름을 언급했다.
유론이 가고 리앙의 시장으로 추대된 건 바로 에이든이었다.
유론과 가장 가까웠던 수족이자 수호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사람이니 자격은 충분했다.
게다가 용사인 내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에이든을 밀어주기도 했다.
어쨌든 대륙 전체 부(富)의 15%를 관장한다는 리앙의 지도자는 나에게 충성을 다하는 에이든으로 결정되었다.
“몰티 자작, 그리고 에이든 시장님, 그리고 로이드 백작. 오늘 여러분을 부른 건 중대 발표를 하기 위함입니다.”
레베카가 무슨 말을 할까.
그녀가 수년 간 행했던 통치는 완벽했다.
마치 교과서에 나올 법한 군주였다.
한 번 권력을 잡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왕좌에 오르고 나를 지지세력으로 업은 그녀는 단숨에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왕국의 지배자로 당당히 섰다.
힐튼 백작가도 몰락하고 가장 강력한 로이드 가문과는 혼인 관계를 맺으며 사실상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켰다.
아직까지 서임제나 조세제 등 여러 제도가 봉건제를 따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절대왕정으로 변모할 것이다.
“오늘부로 엘든 왕국은 엘든 제국이 됩니다. 그리고 저 레베카는 황제로 즉위하겠습니다.”
상당히 파격적인 선언.
레베카의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마음을 먹은 듯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헌데 저희를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왕국이 제국이 되었는데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죠. 엘프족과 리앙이 엘든 제국에 정식으로 편입되었으면 합니다.”
레베카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겠다.
엘프족이 제국민이 되면 단순히 엘프뿐만 아니라 광활한 동부 대산림이 엘든의 영토에 포함된다.
부자 도시로 이름난 리앙은 말할 것도 없다.
자원과 금력을 동시에 쥐고 대륙제일국으로 우뚝 서겠다는 그녀의 야심찬 포부였다.
“그리고 내 꿈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레베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 * *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결국 내 허락이 필요했던 거다.
리앙 시장인 에이든은 내 명령 한마디에 엘든 제국으로의 편입을 선언했다.
몰티 영주인 라칸은 엘프족과 상의해보겠다고 했는데, 내가 사샤에게 말해놓으면 해결될 문제다.
아르니아 대륙 유일 제국이었던 칼론으로서는 새로운 황제의 출현이 불편할 거다.
그러나 칼론의 황태자는 파헬이고 파헬 또한 나에게 빚이 있다.
무엇보다 현재 국력을 따져보면 칼론은 지는 해고 엘든은 뜨는 해.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엘든의 태평성대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시각은 자정.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다.
나는 레베카와 같은 침실에 있다.
원래는 그냥 가려고 했다.
하지만 레베카가 가만두지 않을 거란 느낌을 팍팍 풍겨서 별수 없이 이곳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같은 침대를 써보는 건가.’
당시에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느라 바빴고 나는 황혼교와 마왕을 물리치느라 바빴다.
게다가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성 교제 방면으로는 특히나 말이다.
그랬던 그녀가 최근 나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피는 저장고에 넣어놨어. 원래도 많이 남아있었는데 추가로 넣어놨으니 앞으로 오십 년은 끄떡없을 거야.”
“내가 준 선물은 받았나요?”
시작부터 돌직구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을까.
아니면 국왕이라는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킨 걸까.
그도 아니면 원래 왕족은 다 이런가?
“못 받을 수가 없었던 선물이었지.”
“다행이네요. 오늘도 답장 없이 안 오시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요새 무슨 일 있어? 예전이랑 많이 달라진 듯한데.”
“아뇨. 전 항상 똑같아요. 그저 차이가 있다면···예전에는 숨겼고 지금은 드러냈을 뿐이죠.”
레베카가 처음부터 나를 마음에 두었다는 말에 잠시 동안 머릿속 회전이 멈췄다.
간신히 이성이 돌아오자 지금까지의 연애경험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모쏠이었다!!’
김철수 시절에는 보육원에서 자랐고 먹고 사느라 남들 하는 그 흔한 연애 한 번을 못해봤다.
헤논 시절 때도 망나니로 온갖 행패를 다 부리고 다녔지만 아녀자를 함부로 건드는 짓은 하지 않았다.
결론 = 헤논 모쏠.
아버지가 카리나님한테 쩔쩔 맨다고 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내 코가 석 자였다.
“제가 싫나요?”
“그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창문 너머 달빛을 받으며 레베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에 마왕 바알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떨렸다.
그윽이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깊은 한숨을 쉬고 이내 거리를 벌렸다.
“이대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지만 그건 당신 옆에 있는 그녀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죠.”
내 옆에 있는 그녀라면 설마 시온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괜찮아요. 결국 마지막에 당신 곁에 있는 여자는 내가 될 테니까. 백 년 동안은 그녀에게 당신을 양보할게요.”
앵두를 연상시키는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요사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역시 레베카는 천생 뱀파이어가 맞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허용 범위겠죠. 애정표현이 아니라 뱀파이어로써 피를 수혈하는 과정이니까요.”
[출혈이 일어납니다.] [패시브 스킬] [끈질긴 생명력 발동] [회복량이 증가합니다.]하얀 침대 시트가 붉게 물들어 갔다.
그날 밤 나는 많은 것을 빼앗겼다.
레베카는 무서운 여자였다.
수백 년 수명에 늙지도 않는 그녀.
단단히 코가 꿰여버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기분이 나쁘진 않다.
레베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지혜로운 아내였고, 절대권력을 가진 대륙의 황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