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22)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22화(22/200)
3장 북부 : 적응한 망나니
눈보라 치는 북부.
사령관 카리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아저씨, 좋아해요!’
‘크핫하하하! 날 좋아하려면 십년은 이르다. 더 커서 찾아오거라.’
부끄러운 예전 기억이다.
인제 보면 십대 소녀가 흔히 품는 연심이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당시만 떠올리면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로이드 후작은 미남자는 아니었다.
그저 덩치 좋고 인상 좋은 아저씨였다.
왜 콩깍지가 쓰였는지 그녀도 몰랐다.
마왕을 처치하고 난 이후라서일까.
아니면 세븐 스타 중에서도 가장 정상인처럼 굴어서일까.
어쨌든 후작은 개성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세븐 스타의 암묵적인 구심점이었다.
실제로 그가 다리를 잃고 은퇴하자 정기 모임도 뚝 끊겼다.
이후에 카리나는 북부로 갔다.
표면적인 이유는 마왕의 봉인지를 지키면서 개인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후작령을 지켜주기 위해 북부로 가는 나에게 아저씨가 고마워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날 돌아봐주지 않을까.
어린 소녀의 유치하지만 순수한 생각이었다.
나중에 그는 안부 편지로 정략결혼 소식을 알렸다.
슬하에 자식이 생겼다고도 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도 언급되었다.
엘프라 했는데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가서 죽었다고.
상심이 크다고 했을 때 입술을 짓씹으며 위로 편지를 보내주었다.
‘정말 바보 같았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기가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였는지 원.
쓸데없이 나이만 먹어가던 차에 북부에 의외의 방문객이 등장했다.
‘헤논 로이드입니다.’
새하얀 피부, 오똑한 코, 훤칠한 키.
아저씨와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분명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그 여인의 아들이겠지.
그래서 마음에 안 들었다.
순간이지만 나쁜 마음도 들었다.
‘최전방에 배치할까?’
심지어 오랜만에 보낸 편지에도 그녀의 안부를 묻는 내용은 없었다.
오로지 헤논을 후방으로 넣어달라는 부모로서의 편지였다.
바로 벽난로에 편지를 던져버렸다.
‘레인저단에 넣어주십시오.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헤논이란 사생아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가벼운 시험을 치렀다.
검에 마나를 담아서 바닥에 박고 살기로 누른 상태에서 검을 뽑으라고 해보았다.
사실 돌려보내려고 만든 시험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 아들이 북부에서 객사해버리면 마음이 불편했다.
익스퍼트에 근접하거나 익스퍼트인 마나 유저가 아니라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난이도로 문제를 냈다.
‘쉬운 시험이군요.’
결과는 카리나의 예상에서 한참 벗어났다.
헤논은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소드마스터에 오른 이후로도 꾸준히 성장해오던 자신의 살기를 쉽게 극복하고 움직였다.
아니지.
극복한 게 아니다.
압박감 자체를 전혀 못 느꼈다고 표현하는 게 맞으리라.
‘대체 뭐였을까? 무슨 능력이지?’
살면서 별의별 상대를 다 만나본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동급의 소드마스터도 자신이 살기를 내뿜으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헤논처럼 아예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녀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 그랜드소드마스터였던 용사 카일 정도는 되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헤논이 용사만큼의 경지는 아닐 터.
흥미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여유로우면서도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거기서 아저씨의 조각을 발견했다.
로이드 후작의 젊었을 적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북부에 받아주었다.
시험을 통과한 마당에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말이다.
다만 걱정이 되긴 했다.
그녀는 북부에서만 20년을 보낸 베테랑이니 누구보다도 이 지역에 대해서 잘 알았다.
북부의 사내들은 거칠었다.
엔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오는 미친 귀족은 없었다.
애초에 돈으로 갈음하고 끝낸다.
범죄를 저지른 평민이나 빚을 갚지 못한 농노들이 블랙캐슬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런 집단에 비록 사생아라 해도 하녀까지 대동한 헤논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똑똑
문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들어온 사람은 북부에서 레인저 단장 빅터 다음으로 신뢰하는 보급단장이었다.
유쾌한 성격이 말 퍼트리기를 좋아해서 북부의 마당발로 불리는 녀석이다.
“사령관님!”
“무슨 일이지?”
“재밌는 일이 벌어져서요.”
“네가 재밌다는 걸 보니 분명 시답잖은 일이겠군.”
“에이, 아닙니다. 새로 온 귀족 신병 있잖습니까?”
방금까지 헤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카리나의 귀가 쫑긋 섰다.
“신병이 캠벨이랑 한 판 붙기 일보 직전입니다. 가서 구경하시죠.”
결국 터진 모양이다.
갈지 말지 살짝 고민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예전에도 북부에서 이런 소동이 일어나면 그녀도 자주 구경을 갔었다.
게다가 캠벨은 무지막지한 거구.
그런 곰탱이와 붙어서 귀족 사생아가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 중간에 끊어주는 게 그녀의 역할이리라.
“같이 나가지.”
“흐흐, 안내하겠습니다.”
보급단장을 따라서 레인저 숙소로 향했다.
이미 사태는 벌어져 있었다.
숙소의 벽은 부서진 상태고 캠벨과 헤논이 대치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캠벨의 덩치는 살벌하다.
이에 반해 헤논은 겉보기만 봐서는 전혀 상대가 안 되어 보였다.
“사령관님 오셨습니까?”
그녀가 등장하자 빅터가 와서 바구니 두 개를 내밀었다.
북부의 전통이다.
싸움만 하면 재미없으니 결과에 대한 내기가 무조건 동반된다.
모두가 캠벨의 우세를 점친 듯 그의 바구니에는 돈이 왕창 쌓여있었다.
반면에 헤논의 바구니에는 고작 1실버 뿐.
“그래도 한 명은 신병의 승리에 걸었군.”
“같이 온 하녀가 넣은 돈입니다. 자기가 모시는 주인이니 돈을 넣었겠죠.”
보라색 머리카락 하녀.
이름이 시온이라 했던가.
살림이나 해주러 온 하녀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작심하고 내뿜는 살기에 저항하고 한 걸음을 떼는 데 성공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각혈하면서도 굽히지 않는 투지가 인상적이었다.
그 정도면 북부에서도 상위에 해당하는 실력인데 그런 그녀가 헤논에게 걸었다면···
“나도 신병에게 걸어보겠다.”
“진심입니까?”
“버리는 돈이라 치지.”
“저희야 좋습니다. 헤헤.”
팔짱을 끼고 결투를 지켜보았다.
헤논은 잘 싸웠다.
놀랍게도 그는 수준급의 검술을 구사했다.
아저씨가 저런 검술을 썼었나?
가문의 검술은 아닌 듯한데 체계가 잘 잡혀있는 검술이었다.
상대에 비해서 자신의 힘이 열세임을 파악하고 유검의 묘리까지 완벽히 살렸다.
마나량은 물론, 마나 조절도 준수했다.
거구의 캠벨이 거듭 몰아붙이는 상황에서도 호흡이 흐트러트리지 않고 시종일관 침착했다.
애초부터 장기전을 예상한 듯했고 페이스 유지하면서 잘 끌고 왔다.
“신병이 제법 잘 싸우잖아?”
“캠벨이 저렇게 애먹는 건 처음 보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헤논을 보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애송이를 취급하는 눈빛이었는데.
그때였다.
“응?”
카리나는 그녀의 눈을 의심했다.
헤논이 하도 안 들어오니까 캠벨이 일부러 빈틈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소드마스터인 그녀는 알아챌 수 있는 미세한 빈틈이었다.
당연히 헤논은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솔직히 여기서 끝난 줄 알았다.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나무줄기가 캠벨이 일부러 보인 빈틈을 진짜 빈틈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뭐였지?’
알면 알수록 새로운 녀석이었다.
캠벨은 특유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타파했고 이후에는 개싸움이 이어졌다.
땅바닥에 구르는 두 사내.
캠벨은 헤논의 목을 조르고 헤논은 캠벨의 그곳을···아무튼 참혹했다.
“저런! 저럴 수가!”
“이런···저건 조금 많이 아프겠군.”
“아, 보기만 해도 내가 아파지는 것 같아.”
카리나는 이 싸움을 보고 인정했다.
헤논은 그녀가 여태껏 봐오던 얌전한 귀족 출신 사생아가 아니었다.
위급할 땐 길거리 용병처럼 모래를 뿌리기를 서슴지 않고 필요하다면 상대의 급소를 움켜쥔다.
헤논은 그냥 들짐승이자 망나니였다.
무엇이 저놈을 악바리처럼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카리나는 그 모습에서 20년 전 마왕을 물리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미쳐있던 젊은 후작이 보였다.
“확실히 아저씨 아들이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저씨 아들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알아서 잘 헤쳐나가겠지.
“살다살다 내 저리 추잡한 싸움은 처음 보네.”
“신병 귀족 출신인거 맞아? 어디 뒷골목 부랑아 출신인데 소문이 잘못 전해진 거 아녀?”
“제대로 또라이야. 왜 북부에 왔는지 알겠어. 이거 신병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으하하하!!!”
“신병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부터 신병의 별명은 불살자다.”
“불살자? 죽지 않아서? 너무 거창한 별명 아닌가?”
“아니. 불알학살자를 줄여서 불살자다.”
“키키키킥!!!”
사내들의 웃음소리.
이미 북부는 헤논을 환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헤논이 데리고 온 하녀를 보았다.
보라빛 머리카락 하녀가 사내 하나를 능숙하게 쥐어패고 있었다.
“다음에 또 제 몸에 손대려 했다가는 그 손이 없어질 겁니다.”
저쪽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몸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빅터가 따라와서 말했다.
“사령관님, 배당 안 받아 가십니까? 자그마치 열 배입니다.”
“됐다. 나 말고 신병에게 건 하녀에게 전부 주도록.”
“이럴 거면 저도 신병에게 걸어볼 걸 그랬습니다.”
그의 말에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는 들어갔다.
헤논이 레인저단에 배치된 이상 뛰어난 모습을 보여줘도 언제 싸늘한 시체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좋은 구경을 보여준 그가 북부에서 오래 살아남았으면 싶었다.
* * *
블랙허니.
북부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유일한 안식처라 불리는 곳이다.
겉모습은 허름한 주점이었는데 내부는 제법 넓었다.
이곳은 대대로 여인이 운영하는데, 점장의 딸이자 종업원 에리카가 미녀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 보니 귀염상인 게 남초 사회인 이곳에서는 아이돌 대접을 받아도 무방할 만큼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다.
그래도 내 타입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온이 내 눈을 높여놓은 게 아닐까 싶다.
확실히 시온이 훨씬 더 예쁘기도 했다.
내 환영식은 여기서 거행됐다.
돈은 100% 내가 냈다.
어디서 그런 돈이 났느냐고?
결투가 끝나고 시온이 무려 10골드나 되는 돈을 건네줬다.
참고로 1골드면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에 맞먹는 금액이니 10골드면 귀족인 내 기준에서도 상당한 거금이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나와 캠벨을 두고 내기판을 벌였단다.
시온과 사령관 카리나만 나한테 돈을 걸어서 둘이 모든 상금을 싹쓸이했다고.
역시 역배가 확률이 낮아서 그렇지, 한 번 따기만 하면 화끈하다.
“크크크! 불살자를 위하여! 건배!”
“진짜 이런 또라이는 처음 본다.”
“북부에 어울리는 놈이야.”
텃세가 심한 북부였지만 일단 한 번 인정한 구성원에게는 이보다 따뜻한 사람들이 없었다.
죽음을 곁에 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서로 조심스러웠다.
심지어 부단장이었던 캠벨조차 털털한 모습을 보이며 날 환영해줬다.
지금도 시온과 내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는 캠벨이 커다란 오크 맥주잔을 꼴깍대고 마시고 있었다.
“캠벨, 거긴 괜찮나?”
“크크크크, 어젯밤에 작동되는지 확인해봤는데 멀쩡하더라고.”
“미안하군. 그럴 생각까진 없었다. 사실 정신이 없어서 내가 잡은 게 뭔지도 몰랐어.”
“괜찮아. 안 망가졌으니 됐지. 망가졌어도 어차피 쓸데도 없었고 말이야.”
캠벨은 원칙대로 나한테 부단장직을 넘겼다.
하지만 내가 아직 뭘 모르니 그동안은 전담으로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가르치기로 했다.
나 또한 북부에 녹아들기 위해서였지, 명예욕 때문에 부단장직을 얻은 게 아니라서 흔쾌히 승낙했다.
“부단장이 한가락 한다는 건 확실히 알았어. 그렇지만 여전히 북쪽은 위험한 곳임을 알아야 해.”
“명심하고 있다.”
“특히 우리 레인저는 가장 전방에 나서는 만큼 사망률도 높지. 부단장도, 그리고 옆에 하녀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시온입니다. 이름으로 불러주시죠.”
“아, 그렇지. 시온. 제법 까칠한 아가씨야.”
맥주잔을 단숨에 비운 캠벨이 말했다.
“일찍 들어가자고. 내일부터 당장 첫 순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