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38)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38화(38/200)
5장 달성 : 제대한 망나니
니플헤임이 죽었다.
겨우 익스퍼트가 된 새내기의 손에.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찾아보기 힘든 기사였다.
바로 옆에서 이 장면을 생생히 목격한 카리나는 전율했다.
‘무슨 이런 놈이 다 있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했던 고든 로이드와 닮은 점이 보일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
그래도 그녀는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었고, 준수한 실력 하나만 보고 북부에 근무하게 해주었다.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헤논을 북부에 붙잡았던 건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서 제일 잘한 짓 중 하나였다.
만약 처음 만난 날 온실 속 화초라고 매도하며 후작령을 돌려보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블랙캐슬은 함락되었겠지.
성은 불타고 소중한 부하들은 아울베어의 먹잇감이 되었을 거다.
자신은 끝까지 빅터의 배반을 눈치채지 못하다 등 뒤에 칼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러갔다면 지금 눈앞에 목 없이 굴러다니는 시체는 니플헤임이 아니라 자신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저 소년 하나가 모든 미래를 바꾸었다.’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니플헤임의 거대 얼음손을 커다란 돌방패로 맞받아치는 모습이.
자신이 가르쳐준 비장의 필살기 순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하늘을 활공하는 모습이.
솔직히 드루이드가 무엇인지 몰랐고 이 정도로 사기급인지도 몰랐다.
세븐 스타 중에서도 드루이드는 없었고 로이드 후작 또한 드루이드는 아니었으니까.
헤논이 하프엘프라 하였으니 아마도 어머니 엘프 쪽 피가 그가 자연과 교감할 능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런저런 사항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헤논이 비범한 건 사실이다.
아니.
비범한 걸 넘어서 천재.
대륙을 구할 영웅의 면모가 얼핏 드러난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다.
젊은 고든 로이드를 처음 만난 날의 그 풋풋한 느낌이 헤논에게서 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물결이 오는구나.’
피식.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한때 젊은 혈기 하나로 대륙을 구하겠답시고 용사 카일과 6명의 동료와 함께 온 대륙을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미 20년 전 이야기.
세상은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
황혼교?
여전히 위협적이다.
하지만···대륙은 넓고 어느샌가 거대악에 맞서기 위한 새싹들은 훌륭히 성장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였다.
“수고했다.”
헤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돌아가자꾸나. 집으로.”
* * *
한바탕 풍파가 지나갔다.
뒤처리하느라 블랙캐슬은 한동안 부산스러웠다.
일단은 해명부터 해야 했다.
“부단장! 어떻게 된 거야? 그때 고블린의 다리를 묶었던 나무줄기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잖아?”
여기는 블랙허니.
사방에 오크통이 굴러다녔다.
모두가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마셨다.
개판오분전인 술잔치가 벌어져도 사령관 카리나는 간섭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 블랙캐슬의 사령관으로서 누구보다 뒤처리에 바빴기 때문이다.
다만 황혼의 대간부를 척결하고 근처의 아울베어 서식지를 소탕했으니 한동안 블랙캐슬을 위협할 적은 없다 산정하고 캐슬 인원 전체에게 일주일 동안 완전 휴가를 주었다.
유흥 시설 하나 없는 척박한 시설에서 일주일 동안 북부 군인들이 뭘 하겠나.
그것이 블랙허니가 미어터지게 된 이유였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모두의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이유였다.
“운이 좋았다.”
“에이이이!!!”
“우우우우!!”
“비겁하다!”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다.
캠벨과 고블린 사냥 때처럼 슬쩍 보여주고 말았다면 모를까,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드루이드 스킬로 웨어울프를 전부 싹쓸이했으니 말이다.
“좋아. 부단장이 밝히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단장 엉덩이가 짝궁뎅인 것처럼?”
“어떤 놈이야! 나와!”
“푸하하하하!!!”
한바탕 소란이 가시고.
캠벨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술자리의 참석한 전사들 전부가 모두 여태까지 헤헤거리던 표정을 싹 접고 정색했다.
갑작스럽게 고요해진 분위기.
임시 레인저단 단장인 캠벨이 고개를 숙였다.
“헤논, 정식으로 말하겠다. 고맙다.”
“당연한 일 가지고. 같은 동료끼리 낯간지럽다. 그만해라.”
“지나치게 겸손하군. 어떤 북부의 전사도 황혼의 대간부를 직접 참살한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처음에 너를 하녀나 대동하고 온 철부지 귀족으로 치부하고 대련한 나 자신이 창피할 정도다.”
그리고는 캠벨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한쪽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캠벨뿐만이 아니었다.
이어서 블랙허니의 모두가 캠벨을 따라서 나를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충성 맹세는 아니다. 우리는 각자 사정이 다 다르다. 복무기간을 채우고 제대하는 사람도 있고 평생 사령관님과 함께 북부에서 종신하는 사람도 있지.”
“그러면?”
“하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생겼다. 바로 헤논 너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이다. 원래라면 우리는 그 빌어먹을 구덩이에서 인생을 마감했어야 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잠시 뜸을 들이던 캠벨이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너는 우리에게 은인이다. 그리고 북부인은 은원이 확실하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말하겠다.”
“말하겠다!!”
“우리 모두는 네가 원할 때 힘이 되어주겠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든 간에 필요하다면 무조건 달려가겠다.”
“달려가겠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들은 내가 없을 때 자기들끼리 모종의 논의를 했나 보다.
오늘의 술자리도 이 순간을 위해서 계속 마시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었겠지.
동료들의 배려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물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가 블랙캐슬에 근무한 지 제법 시간이 되다 보니 레인저를 포함한 다른 단원들도 내 사정을 다들 알고 있었다.
후작령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감히 싸움을 건 건방지고 주제도 모르는 사생아.
이곳 북부 근무도 후계자 자리에 도전하기 위해서 자원한 거라고도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다 퍼졌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한 의미는 명확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등 뒤에 서주겠다는 의미였다. 비록 그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고맙군.”
“으핫하하하!!! 아무튼 우리 말은 전했으니 그렇게만 알아두라고!”
캠벨이 호탕하게 웃으며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등을 팡팡 쳤다. 솔직히 엄청 아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면서 그가 맥주잔을 높이 든다.
“북부를 위하여!”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영웅. 불살자를 위하여!”
“위하여!!”
울려퍼지는 기합과 함께 술자리는 다시금 왁자지껄해졌다.
* * *
겨우 풀렸났다.
진짜로 죽을 뻔했다.
만약에 내게 상태이상 면역이라는 스킬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황혼교가 아니라 북부 동료들이 준 술 때문에 급성 간경화로 요단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술을 먹었다.
[스킬 자정작용이 발동합니다.] [모든 상태이상에 면역입니다.]다행히도 드루이드인 내 몸은 모든 알코올 기운을 정화했고 멀쩡한 몸으로 블랙허니를 나설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두 여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시온.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에리카.
에리카는 눈 밑이 퀭했다.
그럴 만도 했다.
2년간 사귄 남자친구가 사람을 해체하길 좋아하고 마왕 바알의 부활을 인생 목표로 삼던 황혼교도였으니.
오늘 술 파티에서도 에리카는 나오지 않았고 시온과 함께 내 숙소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 에리카가 일어나서 예를 취하려 했고 내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쉬어라.”
잠시 간의 침묵.
에리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큰일을 치룰 뻔했어요.”
“마음에 없는 말할 것 없다.”
“정말입니다.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에리카는 그 짧은 새에 다크서클이 내려가고 눈밑이 퀭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형형했다.
저런 눈빛을 한 사람들을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인생의 큰 굴곡을 넘기고 큰 경험과 교훈을 얻은 사람들이 꼭 저런 눈빛을 했었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라도 뭘 해도 무언가를 이루어내더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계속 블랙허니에 있을 건가?”
“아니요. 떠날 거예요.”
역시 예상대로 안 좋은 기억은 이곳에 묻으려는 모양이다.
“어디로?”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가 칼론 제국으로 가려고요.”
“거기는 왜?”
“고향에는 친구 리온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주머니께 전해야 해서요.”
에리카의 눈빛에 우수가 깃들었다.
“애초에 저희 고향은 할 일이 농사밖에 없어요. 답답해서 리온과 도망쳐 나왔던 거고요. 아주머니께 소식만 전하고 전 제국 수도로 갈 거예요.”
이미 결심이 선듯한 눈빛이다.
“너의 앞날을 응원하지.”
“감사해요. 헤논님도 응원해요. 나중에 로이드 후작님이 되시면 영지에 제가 술집을 차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다. 영지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술집을 차리는 걸 허락해주마.”
“고맙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미한 웃음.
지금은 이거면 되었다.
한때의 아픔은 미래로 향해가는 훌륭한 거름이 될 테니.
* * *
마음의 정리를 마친 에리카가 블랙허니로 돌아가고.
시온과 나는 단둘이 밤 산책을 했다.
그녀와도 할말이 많았다.
어쨌든 그녀는 <시온라이크>의 주인공이고 앞으로 나와 함께 걸어갈 사람이며 운명의 메인스트림에 같이 휩쓸렸다.
빅터를 쫓은 날 어떻게 되었는지 세세하게 모두 말해주었다.
크레바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드래곤 레어와 드루이드 능력을 각성시켜준 기연. 깨달음을 통해 얻은 익스퍼트의 경지까지.
내가 게임 속 빙의자라는 것과 천마검에 관한 일만 빼고는 시온에게 모든 사실을 오픈했다.
“많은 일이 있었군요.”
“그렇지. 많은 일을 숨긴 건 미안하게 되었다.”
“아닙니다. 도련님이 절 믿고 계신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도련님답지 않으십니다. 솔직히 소름 돋아요.”
시온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생 대부분을 무표정을 살던 어쌔씬 소녀가 짓는 미소는 신록의 새싹마냥 싱그러웠다.
나도 마주 웃어 보였다.
굳이 말로 표현은 안하지만 그녀와 나는 이미 한배를 탔고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후작성에서 만난 첫 순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곧 후작령으로 돌아갈 거다.”
아울베어 서식지가 블랙캐슬 주변으로 옮겨지면서 이 근처 몬스터가 아울베어 말고는 씨가 말랐다.
그런 아울베어가 소탕되었으니 당분간은 레인저들이 순찰을 돌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할 일은 없을 거다.
게다가 황혼교 7대 간부가 죽었으니 그쪽도 일단은 몸을 사리겠고.
지금이 딱 제대할 타이밍이었다.
“네, 도련님. 준비하겠습니다.”
“돌아가면 진짜 전쟁이 시작될 테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언제나 도련님을 따를 뿐입니다.”
말만으로도 든든하다.
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녀와의 일도 일단락했다.
마지막으로 블랙캐슬에서 만날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 * *
똑똑똑.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벽에 걸린 화려한 검자루들.
피곤함이 묻어나는 사령관.
“바쁘시면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야.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낫지. 와서 앉아.”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으니 탁탁대는 모닥불 소리가 창밖의 눈보라 소리와 대조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늘 이곳에 오면 뭔가 모르게 마음의 안정이 온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도 북부가 꽤 마음에 든 것 같다. 비록 전역 요청을 하러 왔지만 말이다.
“갈 거니?”
카리나도 내가 온 목적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렇습니다.”
“가시밭길이겠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령관님은 당신께서 직접 차를 따라주셨다. 따뜻한 남부에서 직접 공수한 차인 듯 맛이 제법 좋았다.
“북부에서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이곳에서 평생 계시는 사령관님을 두고 먼저 떠나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흐흐흐, 그런 대답은 어디서 배우는 거야? 알면 알수록 재밌는 녀석이라니까?”
옅게 웃음 짓던 카리나.
그녀 또한 차를 한모금했다.
“네 사정은 대충 알아.”
“그렇습니까.”
“응, 사생아인데 아저씨 자리를 노린다며? 심지어 경쟁자는 거기 산하 세력 중에서도 가장 입김이 센 가문의 적장자고.”
“맞습니다.”
“미친놈. 계속 망나니인 척하며 살지 그랬어. 어째서 두각을 드러낸 거야?”
뭐라 대답할까.
대륙을 구하기 위해서?
게임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
그도 아니면···
“단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망나니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세상에 마음만 먹는다면 안 될 일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 길이 모두가 실패할 거라 손가락질하고 업신여기는 길이여도요.”
좋은 대답이 되었을까.
다리를 꼰 카리나의 표정을 오묘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쨌든 용건은 다 전했다.
“제대를 허락해주신 걸로 알고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내려주신 사람이다.
나에게는 은인 중의 은인.
캠벨이 나를 은인으로 여긴다면 난 카리나를 은인으로 여긴다.
그리고···왠지 모르게 카리나가 날 바라보는 시선에선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시온의 눈빛에는 존경과 열정이 느껴진다면 그녀는 뭐랄까···총애? 더 나아가서 모성애? 표현하긴 애매하지만 그런 종류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그럼 이만.”
고개를 숙이고 나서는 길.
카리나가 뒤를 붙잡았다.
“잠시만.”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응.”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발끝을 까딱대던 붉은 머리 사령관은 한동안 나를 직시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기색이다.
굳이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길래 나도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잠깐의 눈맞춤.
그녀가 난데없는 제안을 했다.
“헤논, 내가 후견인이 되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