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43)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43화(43/200)
6장 탈환: 계획한 망나니
푸른매 용병단장은 겉보기에도 상당한 무력을 지니고 있어 보였다.
눈대중으로는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가늠이 애매했고 드루이드의 직감만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제법이로구나. 이쪽 대륙식으로 치면 익스퍼트의 중급은 넘은 놈이다.
스캔을 끝낸 천마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바로 일러주었다. 나보다는 두 수 정도 앞서는 수준이다.
똑같이 익스퍼트에 오른 전사라도 초급과 중급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하나 나는 이미 규격에서 벗어났다.
천마검과 드루이드 능력을 최대로 쓰면 몇 수 위의 상대도 충분히 상대할만했다. 게다가 비상수단으로 도토리까지 있잖는가.
해볼만하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푸른매 용병단은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합니까?”
악수를 거부하고 일부러 차갑게 나갔다. 그러자 용병대장 라칸의 얼굴에서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미미한 분노가 서린다.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인지는 그쪽이 더 잘 알 테지요.”
푸른매 용병단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방금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 부하들의 실수였다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직의 우두머리와 약속이 되어있는 사람을 고작 문지기들이 뭘 믿고 문전박대하고 장난을 치나.
당연히 라칸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겠지. 나는 그 점을 꼬집었고 용병단장은 불쾌감을 표시했다.
“손님 대접이 미흡했던 건 사과하겠네. 그러나 공자 쪽도 조금은 감정적인 게 아닌가 싶군. 아직 젊은 나이라 그런 건 이해하네만···”
“캠벨, 시온, 이만 돌아가자. 여기서 더 건질 건 없군.”
몸을 돌려 뒤로 향하자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고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보니 캠벨과 비슷한 신장의 떡대 하나가 길을 가로막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귀족 나으리, 올 땐 마음대로라도 나갈 땐 마음대로가 아니지. 이 난리를 쳐놨는데 변상이라도···컥!”
주먹으로 아래턱을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반응도 못한 떡대가 그대로 흰자위를 보이며 쓰러진다.
쿠웅!!
무게가 많이 나가서인지 요란한 소리를 났다.
“어엇! 돌격조장님을!”
“이게 미쳤나!”
“곱게 돌려보내지 마라!”
딱봐도 유저급도 안 되는 쩌리들이 분개하며 무기를 꺼내 든다.
그러나 싸움을 볼 줄 아는 숙련자들은 얼굴을 굳혔다. 이 녀석들은 방금 내가 손을 휘두른 걸 보지 못한 점에 주목했다.
“돌격조장님을 저렇게 쉽게?”
“아무리 기습이라 해도 저게 가능해?”
“공격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라칸에게 등을 보인 채로 입을 뗐다.
“이것도 장부에 달아두지. 푸른매 용병단. 기억하겠다.”
그리고는 걸음을 뗐다.
좌로는 캠벨. 우로는 시온.
고작 세 발자국도 안 걸었을 때,
“잠시만.”
라칸이 나를 불러세운다.
“아직 볼일이 남았습니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이제와서 볼 장 다 보고 시간을 내달라니. 아무리 용병사회가 힘을 증명해야 대우를 받는 곳이라지만 정말이지 지독한 수준의 철면피다.
“제 시간은 아주 비쌉니다. 정확히는 방금 전에 비싸졌다고 말하는 게 맞겠군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좋습니다.”
라칸의 막사로 들어갔다.
안에는 석 잔의 차가 놓여있었다.
미리 준비한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만나지도 않고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군.’
아마 문지기가 소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다가 상황이 심각해지면 중간에 나서서 수습할 계획이었겠지.
그러고는 기싸움에서부터 승리했으니 주도권을 휘어잡고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을 터.
물론 내가 예상보다 더 고개를 빳빳이 드는 바람에 상황은 반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한 잔 들게. 참고로 독은 안 탔네.”
어차피 상태이상 면역인 나는 편하게 차를 한모금 했다. 시온과 캠벨 또한 나를 따라서 차를 마셨다.
“헤논이라 했던가? 북부에서 황혼의 대간부를 잡았다는 사실이 아예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이걸 알아내기 위해서 여태껏 그 소란을 피웠나 싶어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혹시 익스퍼트에 오른 겐가? 돌격조장은 기습으로라도 쉽게 잡을 만한 녀석은 아닌데 말이야. 느낌으로는···”
“제 얘기는 그만하죠.”
라칸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어차피 오늘 이 만남이 성사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잘린과 필립. 그쪽에 승산이 있다고 봅니까?”
묵직한 돌직구에 라칸이 잠시 동안 할 말을 잊고 어깨를 으쓱한다.
“글쎄, 알버스 영지를 놓고 후작가 내부에서도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소문은 들었네만. 우리는 그저 돈을 받은 대로 일할 뿐이야.”
그의 대답이 우스웠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말.
용병들이 돈에 따라 움직이는 건 맞다. 그러나 푸른매 용병단쯤 되는 규모면 아무 의뢰나 수락하진 않는다. 받아도 뒤탈이 없는 의뢰 위주로 진행한다.
그러한 푸른매 용병단이 로잘린과 필립에게 고용되었다. 이 말인즉슨, 차후 로이드 후작가의 후계자 싸움이 필립 쪽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내가 전혀 믿지 않는 기색임을 눈치챈 라칸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도 이만 솔직해지지. 우리는 후작 부인으로부터 공자가 북부에서 십 년 일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을 받았다네.”
“상당한 거금이겠군요.”
“그뿐이겠는가? 1천 명의 군사를 거느린 필립 공자일세. 그쪽이 더 유리하다 생각하는 게 나로서는 당연하지 않겠나?”
라칸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무일푼에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소문에 휩싸인 헤논 공자보다야 훨씬 안전하고 확실하지.”
“그렇다면 어째서 저와 만나려고 했습니까? 오늘 만남을 파투내고 로잘린과 필립 쪽에 붙어버리면 끝일 텐데요.”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황혼의 대간부를 잡았다는 내 명성 때문이겠지.
헤논이라는 망나니가 혹시 모를 한 수를 숨기고 있을까 봐, 품속에 간직한 발톱이 무엇인지 확인해보고자 오늘 만남을 승낙했으리라.
엘든 왕국에서 장기적으로 활동하는 푸른매 용병단에게는 앞으로 후작가를 책임질 사람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두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헤논 공자의 자질을 확인해보고 싶었네. 처음에는 북부에서 쓸만한 용병 하나 데려온 수준인 줄 알았는데 일신의 무력까지 이리 뛰어난 줄은 몰랐어.”
“하지만 거기까지란 말이군요.”
“맞네. 유감스럽지만 푸른매 용병단은 필립 공자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네. 사적인 감정은 없어. 오히려 잠재력 있는 젊은이를 만나서 반가웠다고나 할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네.”
라칸은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대로 나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나 또한 귀한 시간을 내서 용병단장을 만나러 온 이유가 있었기에 찻잔을 비우고 용건을 꺼냈다.
“단장께서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군요.”
“여태껏 뭘 들은 겐가? 난 돕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입장이야.”
“지금으로부터 사흘. 사흘 후에 알버스 성을 함락시키겠습니다.”
내 폭탄선언을 들은 라칸이 순간이지만 돌처럼 굳었다. 대답을 못하고 어버버하던 그가 이내 간신히 입을 떼었다.
“웃기는 소리! 알버스 요새가 장난으로 보이나? 마스터급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며칠 내로 함락하고 자시고 호언장담할 곳이 아니야.”
“만약에라도 바늘구멍의 가능성을 뚫고 성문이 열리면 어쩌실 겁니까?”
“절대 그럴 리도 없겠지만 혹여라도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책임지고 그쪽을 도와주지.”
“협상 성립이군요.”
쿵!
식탁이 울렸다.
내가 꺼낸 가죽 주머니 때문이다.
그 안에는 옅은 금빛이 새어나왔다.
“이게 무엇인가?”
“확인해 보시지요.”
가죽주머니의 매듭을 풀고 내용물을 확인한 라칸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으헉! 이게 대체···”
주머니 안쪽에는 고대 금화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솔직히 어느 시대 금화인지는 나도 모른다. 드래곤 레어에서 싹쓸이해온 보물 중에 금화만 몇 개 골라서 넣었다.
그럼에도 화려하게 세공된 문양과 번쩍이는 광택이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도 100%의 금임은 누가 봐도 확실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망설여집니까?”
“······”
합죽이가 된 라칸.
5분 동안 멍하니 금화를 요모조모 살피던 그는 이내 금화를 가죽주머니에 넣고 내쪽으로 밀었다.
고대 금화를 보고도 거절한다고?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당황했다.
“유감이군요. 그러면 일어나보지요.”
“아니, 승낙일세. 제안을 받아들이지.”
“허면 어째서 보상을 받지 않으십니까?”
내 질문에 라칸이 눈을 빛냈다.
“자네 쪽에도 승률이 있을 거라 느껴져서일세. 오늘 범한 무례가 상당했네. 만약 공자가 말한 대로 알버스 성이 무너진다면 우리 푸른매 용병단은 자네 쪽으로 돌아서겠네.”
단기적인 보상 대신 장기적인 신뢰를 얻고자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하겠다는 건가. 과연 오랫동안 이 바닥에 굴러먹은 용병답게 제법 장사를 잘한다.
“정확히 사흘 후일세. 기간이 지나면 오늘 우리의 만남과 했던 약속은 전부 없던 일이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뵙지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 내 등에 라칸의 심유한 눈빛이 계속해서 꽂혔다.
* * *
새벽 1시의 심야.
로이드 후작성.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흔들리는 창틀이 불길한 음영을 낳고 있을 때, 똑똑하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고 세찬 바람과 어울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못 알아챌 법도 했으나, 실내에 모인 인원들은 전원 침묵하고 있었기에 바로 알아차렸다.
“들어오렴.”
안쪽에 있는 사람은 총 셋이었다.
뚱뚱한 중년 여인 로잘린.
창백한 안색의 필립.
마지막으로 후드를 쓴 정체불명의 사내.
끼이익
문을 연 손님은 몸을 덜덜 떨었다.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로잘린이 이름을 불러준다.
“피터. 반갑구나.”
놀랍게도 밤손님의 정체는 전 알버스 남작가의 장남 피터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 비워둔 자리에 앉았다. 그런 피터를 로잘린과 필립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야기는 들었단다. 헤논의 계획을 모두 말해주겠다고? 정말 큰 결단을 했구나. 넌 옳은 선택을 한 거야.”
로잘린이 일부러 몸을 피터에게 밀착한 채 말문을 열었다. 두꺼운 화장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만큼 분내가 느껴졌지만 피터는 티 내지 않았다.
“확실한가요?”
“무엇이 말이니?”
“헤논의 계획을 말해주면 알버스 영지를 되찾아주고 이후에 필립 공자님이 후작이 되시면 저를 확실한 알버스 성의 성주로 인정해주신다고요.”
“여부가 있겠니? 오히려 나는 네가 왜 이제야 찾아왔나 궁금하구나.”
로잘린이 피터의 귀에 더욱 가까이 입을 갖다 대며 속삭인다.
“헤논 쪽에 가만히 붙어있었으면 넌 어떻게 되었을까? 설령 일이 잘 풀려서 당장은 알버스의 주인이 된다 해도 필립이 후작이 된 다음에는 교수대에 걸렸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을 테니까.”
말투는 살가웠으나 그속에 담겨있는 독한 가시에 피터가 두려움을 느꼈다.
힐튼 가의 기사로부터 목숨을 구해준 헤논을 배반해서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이 길이 제대로 된 선택지라 여겨졌다.
아무리 뜯어봐도 헤논의 작전은 현실성이 전혀 없었다.
“헤논은···알버스 성의 절벽을 올라갈 거예요.”
결국 피터는 헤논과 했던 모든 계획을 발설해버렸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필립의 멱살잡이었다.
“우리가 바보로 보여? 뭐? 알버스 성의 절벽을 올라간다고? 익스퍼트가 아니라 익스퍼트 할애비가 와도 그런 짓은 못해. 도대체 무슨 수로 올라간다는 거냐?”
“저도 잘은 모릅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밖에···커헉!”
필립이 피터를 내동댕이쳤다.
가슴을 발로 짓밟고 꾹 눌렀다.
“똑바로 진실을 말해라. 안 그러면 이대로 네 심장을 부서트리겠어.”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연기라기엔 지나치게 간절하다.
피터의 가슴이 간신히 자유를 되찾았다.
“꺼져라. 버러지 새끼.”
“그러면 제 영주 자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알았으니까 꺼지라고. 여기서 널 죽이고 다른 놈을 영주로 세우기 전에.”
“히익!”
피터가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갔다.
다시금 셋만 남았다.
필립이 복잡한 얼굴로 로잘린을 보았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요.”
“망나니 녀석이 무엇하나 평범하게 하는 법이 없구나.”
“어차피 잘 됐습니다. 녀석이 북부에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의외긴 하지만, 그 절벽은 날개라도 달리지 않는 한 절대 못 올라갑니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해요?”
로잘린과 필립의 시선이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향했다.
주목을 집중되자 사내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모습을 보인 남자는 중절모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힐튼 가의 전령으로 온 제가 판단하자면···헤논이라는 망나니가 세운 계획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해요. 북부에서 공 좀 세웠다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고 자신만만한 상태겠지요.”
가면남이 말을 이었다.
“제 예상대로라면 이번 영지전은 밀고 당기는 지루한 줄다리기가 겨울 내내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어째서죠? 우리에겐 3천 병력이 있어요. 몰아쳐서 끝내면 되지 않을까요?”
“공성전을 해보지 않으셔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비록 오백의 병력이라도 요새에서 버티면 능히 열 배의 병력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필립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우리 쪽에는 고수들이 많습니다. 푸른매 용병단장도 익스퍼트의 고수고요.”
“용병들의 심리를 잘 모르시는군요. 그들은 돈만 받고 영지전에 참가했다는 경력만 얻으면 끝인 작자들입니다. 머릿수가 생명인 그들이 앞장서서 고기 방패가 돼주겠습니까? 시늉만 할 게 분명하지요.”
가면남의 가정은 그럴듯했다.
이를 들은 로잘린이 격분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러면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이유가 없잖아요!”
“왜 그렇게만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알버스 성과 ‘교전 행위’를 할 수 있잖습니까?”
로잘린은 가면 사내의 말에 함축된 뜻을 파악했다.
그랬다.
자신과 필립은 비록 형식적이긴 했으나 알버스 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했다고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병력조차 없는 헤논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겨울이 지나고 농한기가 끝나면 어차피 병사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과에 대해 논의가 있겠지요.”
“거기서 필립이 헤논을 앞설 거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힐튼은 알버스 영지를 먹어서 좋고. 그쪽은 후작가의 임시 후계자가 되어서 좋고.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입니다.”
“뭐, 그 전에 헤논이 절벽을 오르다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고요.”
필립이 빈정대며 말을 덧붙였다.
“어찌 되었든 두 분에게는 좋은 소식만 가득하겠군요. 저는 이만 물러나 보지요.”
중절모를 벗어 멋들어지게 인사한 그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깜짝 놀란 필립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으나 어느새 가면남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힐튼 백작가에도 인재가 많구나.”
“과연 저희의 라이벌로 불릴만합니다.”
두 모자의 대화를 뒤로하고.
중절모를 쓴 가면남은 이미 빠른 속도로 후작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먹이 좀 주니까 좋다고 덥석 무는군.”
사내의 정체는 바로 탐욕.
황혼의 대간부였다.
역할극을 즐기는 그는 현재 힐튼 가의 책사로 위장한 상태였다.
“기왕이면 힐튼의 승리가 좋겠으나 솔직히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두 세력이 계속 싸워야 해. 그렇게 엘든 왕국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게 핵심이다.”
한편, 머릿속으로는 피터가 발설한 헤논의 미친 계획이 떠다녔다. 괜히 마음에 걸렸다.
“혹시 모르니 조치는 취해놔야겠군. 힐튼에서 쓸만한 기사 하나 정도 알버스에 파견하면 되겠지.”
이 정도 대비면 충분하리라.
다가올 어두운 미래를 기다리는 탐욕의 얼굴에는 스산한 미소가 스쳤다.
* * *
피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들어가서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뒤집어썼다.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어쩔 수 없어. 난들 그러고 싶겠어?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그렇잖아. 헤논은 날 지켜줄 힘이 없어. 설령 영지전에서 이기더라도 헤논 라인을 탔다간 난 끝장이야.”
스스로를 세뇌한다.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양심의 가책을 애써 덜어내는 피터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목 마르네.”
아까부터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보다.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서 찻잔을 흔들어봤지만 이미 빈잔이었다.
새벽이라 하녀를 부를 수도 없다.
날이 밝을 때까지 갈증을 참는 수밖에.
그렇게 참으려고 마음 먹은 피터의 귓가에 낯선 소음이 들렸다.
쪼르르륵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깜짝 놀란 그가 이불을 홱 들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녀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주전자를 들고 빈잔에 물을 채우고 있지 않은가!
보랏빛 머리카락의 하녀는 바로 시온이었다.
“네가 어떻게···”
“목이 많이 마르시다 하셔서요.”
꿀꺽.
마른침을 삼킨 피터가 묻는다.
“언제부터 왔어? 문소리를 못 들었는데.”
“방금 왔습니다. 새벽에 잠이 안 와서 복도를 돌다가 방 안에서 목 마르단 소리를 듣고 주전자를 가져다드린 참이죠.”
“아···”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니야. 고맙다.”
피터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시온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잔을 가득 채워주고 나서 문가를 나섰다.
나가기 전에 뒤돌아 선 그녀가 피터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짓는다.
“좋은 밤 되시길.”
“으응.”
끼이익 쿵.
문이 닫히고.
또각거리는 시온의 하이힐 소리만 내성의 복도를 울렸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차갑도록 시렸다.
‘안타깝지만 당신은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아쉽게 됐네요. 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