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48)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48화(48/200)
6장 탈환 : 입성한 망나니
알버스 영주는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다.
통치하는 영지가 힐튼과 리앙 사이를 중개무역하며 덩치를 불리다가 종국에는 대영지가 되는 달콤한 꿈을.
그곳에서 자신은 쇠퇴하는 로이드 가문을 삼켜버리고 알버스 후작이 되어있었다.
꽃잎이 흩날리는 왕궁에서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고 국왕이 어깨에 검을 두드리며 후작으로 임명했다.
모두가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엘든 왕국의 새로운 권력자를 반기는 그 순간은 너무나도 짜릿했다.
그래야 했는데···
“부단장, 이 새끼 웃는데요?”
“냅 둬.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모든 게 다 꿈이었다니.
현재 그는 납치당한 상태다.
그것도 자신의 안마당에서.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절벽을 오른 게지? 거기는 실력자조차 등반이 불가능한 곳이었을 텐데.”
영주의 앞에는 수려한 외모의 미남자가 의자 등받이를 팔걸이 삼아 삐딱하게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이 사내가 누군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후작가의 망나니로 유명한 헤논이다.
“가문의 배반자인 너에게 질문할 권리는 없다. 오로지 우리의 질문과 요구에 대답할 의무만 존재하지.”
헛웃음이 나온다.
고작 세 명이서 철옹성의 뒷문으로 들어가 우두머리만 쏙 빼먹다니.
어렸을 적부터 귀족적인 소양을 기르기 위해 아르니아 대륙의 역사서를 탐구한 그로서도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너무나 황당해서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닐까 의심될 지경.
“호르만 경은? 내가 이렇게 납치됐는데 가만히 있었나? 아니면 혹시 헤논 공자는 힐튼 가와 연결이 되어있던 겐가?”
상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무거운 침묵이 깔리자 영주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에 그가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자네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걸 알았으니 나와 손을 잡으세. 헤논 자네가 기반 세력이 없다는 사실은 귀족 사회에서도 널리 퍼져있지. 이제는 내가 뒷배 중 하나가 되어주겠네. 이래 봬도 우리 영지가···.”
“그만.”
헤논이 손바닥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무엇인가? 말만 하게나.”
“내일 아침에 모두의 앞에서 로이드 가문을 배반한 죄를 참회하고 내 이름을 언급해라. 그리고 성 안의 군사들에게 성문을 열라고 해.”
“그런 짓을 누가 하겠는가!”
알버스 영주가 펄쩍 뛰었다.
아직까지 그가 뻗대는 이유는 저 멀리서 버티고 있는 수백의 군사와 영지민 덕분이다.
저 성이 함락되는 순간 영주는 아무 힘도 가지지 못한 허수아비가 된다.
“무리한 조건일세.”
“조건? 네가 지금 우리와 타협을 할 위치라 보는가? 당장 네놈을 후작 앞에 끌고 갈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될까?”
볼 것도 없이 바로 교수형이다.
배신한 봉신을 용서할 만큼 로이드 후작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만···그건 너무···”
짜악!
손찌검에 고개가 돌아갔다.
볼에서 화끈한 통증이 올라온다.
알버스 영주가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헤논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현실 파악이 되나?”
“귀족을 때리다니! 인도적인 대우를 약속하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헤논이 알버스 영주의 한쪽 손가락을 잡고 손톱 밑을 슬쩍 들어 올린다.
“끄아아아!!!”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희귀한 고통.
그제야 영주는 깨달았다.
눈앞의 헤논이란 작자는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이레귤러임을.
요요한 눈빛에는 광기가 느껴졌다.
타협이 통할 상대가 아님을 제대로 파악한 건 오른손의 손톱이 모두 없어졌을 때였다.
통증 때문에 침을 줄줄 흘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영주가 결국 백기를 내걸었다.
“훅! 후욱!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왼손만은!”
“예상보다 일찍 끝났네요. 서로 이렇게 좋게좋게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싱긋 웃는 미소가 서늘하다.
알버스 영주는 크게 오판했다.
후작가는 쇠퇴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수면 아래 웅크린 잠룡이 세븐 스타인 로이드 후작의 눈부신 후광 아래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이빨이 날카로운 어린 용은 모든 걸 집어삼키고 하늘로 비상할 게 분명했다.
‘판돈을 잘못 걸었구나.’
허무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헤논이 어깨동무를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꾀낸다.
“솔직히 말하지요. 당신도 잘 알다시피, 영주께선 이미 죽은 목숨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배반한 봉신에게 자비를 베풀진 않으실 테니까요.”
“아아···”
“그렇다고 낙담하진 마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습니까? 이번에 제 일에 협력하신다면 최소한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이후에 헤논은 목숨 부지를 대가로 다른 나라로의 망명을 요구했다.
“여기서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느냐.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약간의 재산과 하인을 데리고 평생 조용히 사느냐.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도망칠 구멍을 떡하니 보여주고 쥐몰이 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알버스 영주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갈 수밖에 없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다른 영지 같으면 영지전에 패배한 순간 사지가 찢겨진 후 까마귀 밥으로 던져주는데 그래도 여기는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잖은가.
“그렇게···하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깨를 툭툭 쳐주고 방을 나가려는 헤논. 그의 등 뒤에 대고 알버스 영주가 근본적인 의문에 관해 물었다.
“헤논 공자.”
“말씀하시죠.”
“본래 사생아라고 들었네만. 어째서 이런 불리한 싸움을 하는 건가? 왜 이렇게까지 후작위에 집착하는 겐가?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세.”
헤논이 가만히 영주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뗀다.
“후작위···물론 좋지요. 하지만 그게 끝일까요?”
“!!!”
“사람은 복잡한 동물이나 때로는 참 단순합니다. 사생아니까 허락되지 않은 후작위에 집착하는 거다. 그 이상은 바랄 리가 없다. 이런 비좁은 고정관념에 갇혀서 헤어나오질 못하지요.”
쿠구구구구
주변에 무거운 공기가 휩쓴다.
헤논의 머리카락이 한올한올 올라온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기세.
저 어리고도 젊은 나이에 대관절 어디까지 성취를 이뤘단 말인가.
알버스 영주는 감히 짐작조차 못했다.
숨이 막히고 눈에 눈물이 고일 때쯤, 사방을 옥죄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다시 곱상한 귀족가 도련님으로 돌아온 헤논이 알버스 영주를 보고 싱긋 웃는다.
“어차피 가실 분이니 말해 드리는 겁니다. 어디선가 조용히 지켜보세요. 아르니아 대륙 어디로 가든 제 이름은 그곳까지 퍼질 테니까요.”
망나니 중에 상망나니의 광오한 발언이었음에도 알버스 영주는 더는 저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모든 일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이제부터는 눈앞의 젊은 야심가가 로이드 후작가와 힐튼 백작가, 이를 넘어 엘든 왕국에 불러올 커다란 지각변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푸른매 용병단장 라칸은 해가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운동으로 가볍게 검을 휘둘러 몸을 풀던 그는 오늘도 굳건히 서 있는 알버스 성채를 응시했다.
‘벌써 약속한 사흘이 다 되었군.’
얼마 전 만났던 후작가 사생아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의 젊은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저 철옹성 같은 요새를 사흘 만에 함락시키겠다 호언장담했었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왜일까.
특유의 아우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칸은 그에게 보험을 들어두었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무슨 수로 알버스 성을 함락시긴단 말인가.
심지어 힐튼 가의 지원군까지 왔는데.
그의 계산으로는 소드마스터인 로이드 후작이 직접 오든가, 잘 훈련된 정예병 5천은 있어야 저 성을 함락시킬 만했다.
어쨌든 지금처럼 지휘권이 중구난방이고 훈련상태 또한 뒤죽박죽인 3천 병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좋은 아침이오.”
뒷짐을 지고 거만하게 걸어오는 필립 공자를 본 라칸이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하고 이기적인 놈.’
영지전 첫날 정면돌파로 한 번 패배한 이후에도 필립은 정신을 못 차리고 몇 차례 더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가 무모한 명령을 내린 이유는 순전히 어디선가 놀고 있는 헤논과는 다르게 알버스 성과 격렬히 교전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서였다.
처음 회의 때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릇이 옹졸하고 편협한 바닥이 다 드러나 보이는 인간이었다.
결국 몰티 가문에서 끌려온 농노병들은 푸른매 용병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살과 돌팔매를 맞고 죽어나갔다.
과욕에 사로잡혀서 아랫사람을 장기말으로만 생각하는 지휘관 밑에 있던 병사들의 안타까운 최후였다.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소. 필립 공자.”
물론 티를 내진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이 마음에 안 드는 것과 사업은 별개니 말이다.
속으로는 라칸 또한 피가 흐르는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기왕이면 능력있고 뛰어난 자와 일하고 싶었다.
“원래라면 깊게 잤을 텐데, 어젯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버스 성이 유독 시끄러워서 잠을 설쳤습니다.”
그의 말대로 해가 뜨고 나서도 알버스 성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정말 내부적으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런 라칸의 의식 속에 헤논의 말이 스쳤다.
‘사흘, 그 안에 알버스 성을 함락시키겠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아마 자기들끼리 밥이라도 지어먹느라 저리 분주한 거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을 접은 라칸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고 넘겼을 때,
“저놈이 어디라고 여기를 와!”
필립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삿대질한다.
화가 잔뜩 난 목소리.
무슨 일인가 싶어 공자가 가리키는 곳에 자연스레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 있었기에.
“···헤논 공자.”
말을 탄 헤논 공자가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으며 언덕 위에 꼿꼿이 서 있었다.
옆으로는 늘 같이 붙어 다니던 덩치 큰 용병과 보랏빛 머리 하녀, 나머지 한 명은 후드를 써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수려한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타이밍이 좋았던 걸까.
바람을 맞으며 알버스 성을 응시하는 헤논의 위풍당당한 모습에서 영웅의 분위기가 풍겼다.
다른 이들도 은연중에 이를 느꼈는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 한 명.
필립만 제외하고 말이다.
관심을 빼앗긴 그는 분개하며 헤논 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거느린 군사도 없는 놈이 여기는 왜 나타난 거냐? 어설프게 공격하는 시늉이나 할 속셈이라면 당장 꺼져라!”
필립의 목소리를 들은 헤논은 슬쩍 그를 내려다보았다.
도발적인 언사였음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온한 눈빛은 마치 이미 필립 따위는 위협조차 안 된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게!”
헤논의 시선은 필립을 지나쳐 라칸으로 이어졌다.
라칸은 분명히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헤논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을.
마치 약속을 기억하느냐는 무언의 제스처였고, 라칸 또한 기억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랴!”
그게 신호였다.
헤논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말을 달려 알버스 성으로 향했다.
도대체 네 명으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얌전히 지켜보고 있으니 어느새 이들은 알버스 성문 앞까지 도착했다.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거리였기에 모두가 땀을 쥐며 이들을 지켜봤다.
헤논이 먼저 칼을 뽑고 마나가 가득 실린 웅혼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알버스의 주민이여! 로이드의 깃발 아래 보호받던 인간들이여!”
쩌렁쩌렁!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멀리서도 기백이 느껴졌다.
“너희도 알다시피 모든 상황은 끝났다. 순순히 성문을 열어라!”
라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 끝났다는 건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성벽 위의 반응이었다.
당장에라도 화살을 쏘아서 쫓아내도 모자랄 판에 병사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우왕좌왕하는 게 아닌가.
“아직도 고민하는가? 그렇다면 쉽게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헤논이 한 발짝 물러났다.
대신에 나온 사람은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사내였다.
라칸은 호기심 있게 쳐다보았다.
결국 후드 사내가 후드를 벗고 정체를 드러냈다.
“알버스 영주다. 성문을 열어라.”
경악. 그리고 또 경악.
필립이고 라칸이고 가문의 병사들이든 푸른매 용병단원들이든.
어째서 가장 안쪽에 있어야 할 적의 우두머리가 헤논의 옆에서 성문을 열길 종용하는지 보고도 파악이 안 됐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이어지는 영주의 말은 더 충격이었다.
“나 에브라 알버스는 목숨보다 중요한 봉신 관계를 위반하고 그동안 은혜 입은 로이드 가문을 배반했으므로 이에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오늘부로 알버스 영지의 모든 통치권을 포기하고 이를 로이드 가문의 차남 헤논 로이드에게 양도하겠다!!”
라칸은 꿈을 꾸는 듯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말이 맞나.
알버스 영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를 헤논에게 넘겼다.
그것도 영지전이 시작된 지 고작 사흘만에 말이다.
잠시 후.
영지전 내내 무슨 짓을 해도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이 요란한 도르래 소리를 내며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열렸다.
그 광경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라서 라칸은 연신 볼을 꼬집었다.
드르르르륵 쿵!!
끼이이익
제삼자가 보기엔 전투 하나 없이 고작 말 한마디로 철옹성을 함락시킨 셈이다.
이 장면을 목도한 모든 이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라고.
‘과연 헤논의 말대로 되었구나.’
라칸은 감탄했다.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젊은이의 멋모르는 망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헤논이라는 사내는 자신의 말의 무게를 정확히 인지하고 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였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라칸의 차례였다.
계약을 맺었으니까.
“다들 뭘 그리 멍청히 있나! 성문이 열렸다! 절호의 기회야! 가서 우리가 알버스 성을 점령하고 영주를 포획한다!”
필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이 와중에 철면피 놈은 헤논이 다 해놓은 밥상에 자기가 숟가락을 얹고자 한다.
실질적으로 성을 함락시킨 건 헤논인데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서 자신이 성을 점령한 양 뽐내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필립이 욕심을 부릴 것조차 예상하고 자신을 대비책으로 세워둔 헤논의 안배에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절대 적으로 둬선 안 되는 자다.’
이 순간 라칸은 결정했다.
앞으로 푸른매 용병단의 장기 우수 고객은 헤논 로이드다.
노선을 정했으니 이제는 움직일 때.
라칸은 방방 뛰며 군사를 진격시키려는 필립의 앞을 막아 세웠다.
“여기까지일세.”
“무슨 소리요? 그쪽도 바로 준비하시오. 지금 빨리 몰아쳐서 성에 들어가야 하니까.”
“유감스럽게도 필립 공자께서는 알버스 성에 들어가지 못하오. 들어가는 건 우리 푸른매 용병단까지가 될 것 같소.”’
“무슨 개소리···!!”
필립도 아주 바보는 아니기에 라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푸른매 용병단이 등 돌렸단 사실을 깨달은 그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다.
“감히 나를 배신해? 장사 아주 뭣같이 하는군.”
“위약금은 모두 물겠소. 정식으로 사과문도 보내지.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어디 근본도 없는 개잡놈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너희 따윈 필요 없어! 내 병사들만으로 가주마.”
“안타깝지만 그럴 순 없소이다.”
라칸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단장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푸른매 용병단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필립이 데려온 군대를 막아세웠다.
알버스 성으로 진격하려면 푸른매 용병단을 뚫고 가야하는 형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필립이 대로하여 펄쩍 뛰었다.
“안 비켜? 안 비키면 너희도 적으로 간주하겠다.”
“해보시오.”
“뭐라고?”
“자신 있으면 해보라고 말했소.”
스스스스
서늘한 바람이 평원을 스친다.
필립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이에 반해 라칸은 담담한 눈빛.
푸른매 용병단 2천과 가문병 1천이 손에 땀을 쥐고 서로 대치했다.
용병단의 수가 1천이 더 많았고 농노병이 대다수인 가문병에 비해 이쪽은 영지전 특화 병력이라 훈련 상태와 장비부터가 다르다.
이건 누가 봐도 승패가 정해진 뻔한 승부였다.
뿌드드득
이빨이 부서져라 갈던 필립이 결국 몸을 돌린다.
“두고 보시오. 이 대가는 반드시 치를 테니.”
“마음대로.”
결국 필립의 군대는 오자마자 무의미한 희생만 거듭하다가 아무런 수확 없이 물러가게 되었다.
필립을 막아준 푸른매 용병단장이 이제는 고개를 돌려서 알버스 성을 주시했다.
어느새 성에 들어갔는지 성벽 위에 오른 헤논이 고고한 눈빛으로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칸은 홀로 중얼거렸다.
“판이 뒤집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