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50)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50화(50/200)
7장 소환 : 후계자 망나니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도착한 내성에는 로이드 후작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오거라.”
그간 내가 벌인 온갖 망나니짓을 지근거리에서 봤던 내성 식구의 표정도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진심으로 환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북부에서 제대했을 때만 하더라도 황혼의 대간부를 처리했다는 말을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명백히 달라졌군.’
하인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알버스 성 함락에 대해서는 모두가 생생히 전달받은 상태.
이번 일을 기점으로 헤논이 진짜 실세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평상시에 나를 소 닭 보듯 하던 자들까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고생 많았다. 밥부터 먹자꾸나.”
다만 후작의 태도는 예전과 비슷했다.
내가 거둔 성과에 대해 기뻐하긴 했으나 그 이상으로 과하게 반응하진 않았다.
옆에 죽상을 한 필립과 로잘린이 있기에 중립을 지키려는 거겠지.
저녁 만찬장.
여전히 고급스러운 실내다.
기다란 직사각형 식탁 위에 도깨비 바다에서 공수해온 각종 해산물 요리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자유도시 리앙에서 어렵게 구한 20년 산 와인도 오늘 첫선을 보였다.
참고로 20년 산은 대마왕 바알의 출현 시기라 그해 와인 농사는 거의 망하다시피 했다.
그런 와중에 마왕이 물러나고 살아남은 와인은 비록 개수는 적지만 역경을 극복해서인지 어느 해보다 진하다고 알려졌다.
와인 애호가라 불리는 로이드 후작이 최고급의 술을 꺼냈다는 건 그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는 간접접인 수단이었다.
뽕!
코르크 마개를 뽑으니 과연 아찔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식사에 초대받은 시온과 캠벨 또한 눈을 반짝이며 유리잔을 채운 붉은빛의 레드와인을 응시했다.
“이야기는 대강 전해 들었다. 너희의 고생 덕분에 로이드는 힐튼의 콧대를 누르고 상수리나무의 건재함을 온 대륙에 과시했다.”
후작의 말.
“알버스 성이 얼마나 견고한지는 예전에 방문해봤던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성을 함락했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미덕에서 벗어나는 법이다. 무엇보다 헤논 네가 말 한마디로 성을 무너트렸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보고 싶구나.”
내가 아는 후작이라면 이미 세바스찬을 통해 자초지종을 들었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 진행된 일인지는 작전에 뛰었던 당사자인 시온과 캠벨보다도 더 빠삭하게 파악했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물어보는 건 후작 본인이 다시 듣고 싶어서도 있고, 내가 분위기를 주도하라는 배려다.
굳이 주는 기회를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기에 나는 알버스 요새 사건의 전모를 침착하게 보고했다.
당연히 전부 말하진 않았다.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고.
절벽에 어떻게 올랐는지에 대해서와 푸른매 용병단과의 어떤 합의를 했는지에 대해서, 또 피터의 배반 이야기는 생략했다.
그래도 이야기는 꽤 길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게 영지전을 끝냈습니다.”
후작은 흐뭇한 얼굴이었다.
반면에 식사 내내 불쾌한 티를 팍팍 내던 필립은 이때다 싶었는지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삿대짓을 한다.
“아버지! 헤논은 중대한 과실을 저질렀습니다. 알버스 영주는 봉신 계약을 파기한 중대한 범죄자입니다. 이번 일의 원흉을 관리소홀로 놓쳤으니 벌을 내려야 합니다.”
역시나 필립은 이를 걸고 넘어졌다.
사실 흠 잡을 게 이것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나 로이드가 힐튼을 누르고 불리했던 영지전에 승리한 시점에서 알버스 영주는 놓치든 잡든 의미가 없었다.
나도 아는 이 사실을 후작이 모를 리가 없지.
예상대로 후작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괜찮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 기존의 반하던 영주가 행방불명 되었으니 우리 입맛에 맞는 영주를 세우기 수월해졌다.”
“하지만 반란의 주동자입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벌백계하여 로이드 가문에 배반하는 자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똑똑히 보여줬어야 했는데, 헤논의 멍청함이 기회를 날렸습니다.”
로이드 후작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열변을 토하는 필립을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필립, 너는 신상필벌에 대한 개념이 확고하게 잡혀있구나.”
“맞습니다! 잘한 자에게는 상을! 못 한 자에게는 벌을! 앞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자에게 꼭 필요한 소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묻겠다. 가문의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고작 셋이서 알버스 영주를 붙잡고 성문을 열어서 역사에 기록될만한 승리를 거둔 자에겐 무슨 상을 내려야 하느냐?”
“그건···”
후작의 말에 필립이 땀을 뻘뻘 흘리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네 말도 틀리진 않다. 반역의 주동자를 놓친 건 분명 실수지. 그러나 공이 과를 한참 덮고도 남는데 허물만 언급하는 것도 과히 좋은 태도는 아니다.”
“제,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헤논에게 무슨 상을 내릴 건데요?”
시종일관 불편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로잘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식사장의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하인들도, 시온과 캠벨도, 로잘린과 필립도, 세바스찬까지 후작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기다렸다.
“설마···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에요.”
불안했는지 로잘린이 먼저 설레발을 친다.
반면에 후작의 표정은 단호했다.
“헤논, 너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솔직히 나도 네가 이렇게 잘해낼 줄 몰랐다. 그리고 영지전을 시작하기 전에 너희에게 한 약속이 있었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비록 서면으로 남기진 않았으나 분명히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한 말을 주워담을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오늘부로 헤논은 로이드 후작령의 ‘임시’ 후계자다.”
드디어 선고가 내렸다.
필립과의 대련 자리에서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겠다 말한 이후 몇 년 만에 결국 목표를 이루어냈다.
이로써 나는 비록 임시지만 드넓은 로이드 후작령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불안하다.
갈 길은 멀다.
당장 들고 일어난 이복형제와 계모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한다.
“당신! 미쳤군요!”
로잘린이 분개했다.
필립도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이러실 순 없습니다. 헤논이 최근 몇 번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해도 이건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주변에서도 인정하지 않을 테고요.”
“인정? 나 고든 로이드가 영지의 정당한 지배자인데 누구의 인정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더냐.”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 또한 영지전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실질적으로 성을 공격한 건 저였고요. 헌데 헤논의 공만 치켜세우시다니요. 이건 명백한 편애입니다!”
열변을 토한다.
듣기에는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저건 최악의 수다.
필립은 로이드 후작을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번 영지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손바닥 뒤집듯 모조리 파악한 후작에게 저걸 성과랍시고 내세우면···
“뭐라? 공을 세워?”
역시나.
후작의 목소리가 중저음으로 내려간다.
무거운 기세가 만찬장을 내리누른다.
그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한 필립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진다.
“정말 공을 세운 게 맞느냐?”
“병사를 이끌고···성을 공격해서···”
“그래. 공격을 했다 이거지.”
후작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닫혀있는 커튼을 착 연다.
“직접 보아라. 네가 알버스 성에서 행한 일이 무엇인지.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말이다.”
모두가 일어나서 창문을 향했다.
참고로 만찬장은 내성에서도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창문에 서 있으면 내성 정문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유리창 바깥으로 비친 내성 정문에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후줄근한 복장에 초췌한 안색을 띤 여인들이 내성 정문에 일렬로 서 있었고, 경비병들은 그런 이들에게 차례로 빵을 건네주었다.
“저게 무엇이죠? 가문에서 뒷골목 거지들에게 새로운 배급제라도 실시했습니까?”
필립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필립을 차분한 눈빛으로 보던 후작이 말했다.
“거지? 틀린 말은 아니지. 저들은 자신의 전재산보다도 귀중한 것을 잃은 사람들이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런 더러운 년들이랑 알버스 성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네가 더러운 년이라 칭하는 여인들. 그녀들의 남편, 형제, 아들이 알버스 성에서 너의 명령을 따르다 희생되었다.”
“!!!”
필립이 두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저 여인 중 몇몇은 빵을 받고도 땅에 패대기쳤다.
대성통곡을 하는 여자도 있었는데, 그런 여자들은 경비병이 양팔을 잡고 끌어냈다.
나가면서도 여인은 눈물을 흩뿌리며 악을 쓴다.
“이딴 빵 쪼가리 얻으려고 여기 온 줄 아십니까! 내 아들 좀 돌려주이소! 평생 못난 어미 봉양한답시고 장가도 못 간 아입니다! 그런 놈이 원치도 않은 전쟁에 끌려가 죽었습니다! 난 빵 다 필요 없습니다! 아들만 제발 돌려주이소! 으흐흐흑···”
제법 먼 거리였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무슨 말인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에 녹아든 비애가 심장을 절절히 울린다. 당황한 필립이 빠르게 둘러댔다.
“저, 전쟁을 하다 보면 불가피한 손실이 발생하는 법입니다. 저들에게는 마땅한 보상을 내리겠습니다.”
“방금 한 발언. 저 노파의 앞에서 똑같이 말해보거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테고.
“알버스 공성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보고받았다. 준비가 만반인 요새에 대책 없이 들이박았다지.”
“그건!”
“네 지시에 허무하게 가족을 잃은 저들을 보아라. 눈에 새기고 머릿속에 각인해라. 저게 네가 내린 명령의 결과이니.”
필립이 이를 꽉 깨문다.
불리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렇다 할지라도 헤논에게 후계자 자리는 너무 과분합니다. 근본도 없는 사생아 아닙니까!”
결국 인신공격인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추하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특히나 저놈의 어미는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천한 년 아닙니까! 막말로 몸 파는 여자였어도 모를 일···”
사실 나는 모두가 지켜보던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필립을 베어버리려 했다.
비록 내 어머니는 아니라지만 내게 몸을 빌려준 헤논의 어머니를 모욕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하려 했다.
하지만 나보다 로이드 후작의 행동이 더 빨랐다.
짜아악!!
필립의 고개가 돌아갔다.
볼에는 로이드 후작이 새긴 새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에 필립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다시는 내 앞에서 헤나를 욕보이지 말아라.”
한동안 호흡이 곤란할 수준의 압박감을 뿜어내던 로이드 후작은 이내 십 년은 늙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식사는 이것으로 끝이다. 모두 물러가도록. 그리고 헤논, 내일부터 너는 집무실로 와라. 업무에 관해 교육하겠다.”
저녁 만찬은 불안한 시작을 대변하듯 개판으로 끝나버렸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주먹을 꽉 쥐던 필립이 후작이 보고 있음에도 의자를 쾅 걷어차며 나갔다.
“오늘의 결정을 후회할 겁니다.”
로잘린도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쌩하니 퇴장했다. 후작도 혼자 있고 싶었는지 세바스찬과 함께 퇴장.
결국 데자뷰처럼 나와 시온, 캠벨만이 덜렁 남아버렸다.
또다시 우적대는 소리만 들린다.
이제는 시온도 감탄 어린 표정으로 신경줄 굵은 캠벨을 바라본다.
“부단장.”
“왜?”
“어째서 남부 음식은 먹어도 먹어도 안 질릴까?”
“많이 먹어라.”
“나 이제 다시는 북부에 못 갈 것 같아. 거기 빵은 너무 딱딱해.”
어쨌든 일은 잘 풀렸다.
오늘부로 나는 로이드 후작령의 ‘임시’ 후계자였다.
* * *
“으아아아아!!!”
침실로 돌아온 로잘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가장 먼저 리앙에서 힘들게 구입한 귀한 화분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녀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침대보를 손으로 갈기갈기 찢고 탁자 위의 집기를 모조리 손으로 쓸어 바닥으로 쏟아냈다.
바닥이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완전히 어질러져서야 그녀는 간신히 진정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어릴 때부터 싹을 잘랐어야 했는데.
헤논이 망나니의 탈을 쓰고 그렇게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아이 때부터 보여준 한심한 모습은 도저히 연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놈이 달라졌다.
갑자기 수련을 해서 몸을 키우고 대련에서 필립을 깨부수더니 북부에 가서 황혼의 간부를 처치하고 알버스 성을 겨우 세 명이서 함락시켰단다.
아무리 들어도 믿어지지 않는 기사였다.
처음만 하더라도 그러려니 했다.
원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씩 변화를 꾀하기도 하니까.
그렇다 해도 결국 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고 사생아 출신에 지지자 하나 없던 헤논은 분명 고꾸라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헤논의 행동 하나하나는 다 규격을 벗어났다.
무엇하나 평균과 일치하는 게 없었다.
그 녀석은 움직일 때마다 남들이 예상했던 결과의 열 배 이상을 해냈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헤논은 난 놈이다.
대륙에 한둘씩 나타난다는 돌연변이.
하필이면 왜 그런 놈이 내 앞길을 막은 걸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늘을 탓하고 있을 때,
“화가 많이 나셨군요.”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로잘린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여태껏 잠겨있었던 창문이 활짝 열려있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휑하니 어질러진 방 안을 훑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죠.”
모두의 이목을 속이고 온 자는 로잘린과 초면은 아니었다.
시커먼 후드와 깊게 눌러쓴 중절모.
젠틀하게 갖춰 입은 신사복과 이와 묘하게 어울리는 기이한 가면까지.
저번에 필립과 함께 봤던 힐튼 가의 비밀전령이었다.
“너···너!”
중절모 신사를 보자마자 로잘린이 단숨에 달려들어서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알버스 성 수비를 어떻게 한 거야! 어? 분명 대비하겠다고 했잖아. 힐튼 가의 병력이 얼마나 약했으면 고작 세 명한테 성이 떨어져!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아?”
속에 쌓인 분통을 찾아온 밤손님에게 모조리 쏟아부었다.
가면을 쓴 사내는 한동안 로잘린의 화풀이를 당하고만 있다가 이내 살포시 그녀를 밀었다.
겉보기엔 살짝 민 것 같았는데 그녀는 꽈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악!”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는 로잘린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착각하지 마시죠. 당신만 곤란해진 게 아닙니다. 이게 다 사생아 하나 관리 못한 당신 탓 아닙니까?”
“뭐!?”
“제 말이 틀렸습니까? 당신에겐 시간도 있었고 세력도 있었고 정통성도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질 수가 없었는데 그 모든 걸 가지고도 망나니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겼으니 멍청한 건 누구지요?”
사내는 로잘린을 잡고 들어 올렸다.
제법 뚱뚱한 체형이었음에도 로잘린은 너무나 가볍게 공중에 떴다.
이런 류의 폭력을 처음 경험해 본 그녀의 눈에 금세 두려움이 서렸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가면 사내는 그 이상으로 손찌검하진 않았다.
그저 바닥에 세워놓고 멱살을 풀었다.
그리고는 로잘린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적의 적은 곧 동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확실히 처리할 공동의 적이 누군지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쪽까지 손 쓸 필요 없어. 그래 봐야 철부지 사생아야. 귀족 사회에서도 헤논을 인정하지 않을 테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네요.”
사내가 로잘린에게 바짝 얼굴을 갖다 댄다. 가면 속 숨겨진 끈적한 눈빛에 그녀는 팔뚝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도저히 학습이라는 게 안 되시는군요. 그딴 식으로 방심하다가 도대체 몇 번을 당하셨나요?”
“이번엔 제대로 할 거야.”
“아뇨. 이번에도 실패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헤논은 임시가 아닌 정식 후계자가 되어 화려하게 날아오르겠죠.”
“닥쳐!”
“헤논이 익스퍼트 전사를 쓰러트렸습니다.”
이어지는 가면 사내의 말에 로잘린의 입이 닫혔다.
“저도 놀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백작님에게 부탁해서 힐튼 가에서도 무력으로 수위에 꼽히는 호르만 경을 알버스 성에 배치해놨었죠. 참고로 호르만 경은 익스퍼트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잔뼈 굵은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가···헤논한테 쓰러졌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헤논이 익스퍼트 중급에 달하는 자를 손쉽게 쓰러트렸다고요. 이게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로잘린은 바보가 아니다.
단숨에 사내가 하려는 말의 요지를 깨달았다.
“소드마스터···”
“그렇습니다. 세븐스타인 로이드 후작의 검술 실력을 헤논이 제대로 이어버린 겁니다.”
그녀의 눈앞이 깜깜해진다.
적장자? 세력? 정통성?
소드마스터란 단어 앞에서는 전부 무의미하다.
오히려 검술 실력을 물려받은 것이 그 무엇보다 확실한 정통성을 입증한다.
“아직도 귀족 사회는 헤논의 진가에 대해서 모릅니다. 허풍을 떤다고 치부하는 사람도 꽤 많죠. 하지만 그의 실력이 점점 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볼 것도 없지.
헤논은 점점 인지도를 넓혀갈 테고.
이와 반비례하여 필립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지리라.
“자, 다시 돌아와서. 아직도 헤논이 만만하십니까?”
로잘린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젊고도 어린 나이에 소드익스퍼트 중급을 이겨 먹다니.
한마디로 자신의 친정아버지인 몰티 자작이 평생 쌓아온 검술 실력과 맞먹을 수준이거나 그 위라는 얘기 아닌가.
그녀는 규칙을 벗어난 성장 속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혔다.
“어떻게···어떻게 해야···”
“너무 낙심하진 마시지요.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찾아보면 다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중절모 신사는 주저앉은 로잘린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고개를 든 로잘린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중절모 사내의 눈매는 반달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촛불을 통해 벽에 비친 그의 음영이 사이하게 흔들렸다.
“마침 저에게 부인께서만 해내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이라면 확실하게 헤논을 죽일 수 있지요.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