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68)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68화(68/200)
9장 유물 : 냄새난 망나니
“갇힌 건 내가 아니라 너희야.”
밀폐된 공간에서 내 편은 오로지 시온뿐.
2 vs 50인 상황에서 큰소리를 떵떵거리자 알프레도를 위시한 황혼교도들이 서로 쳐다보더니 이내 킥킥댔다.
“정신이 나간 게 확실하군.”
“저런 놈들 가끔 봤다. 죽음을 앞둔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거지. 보통 칼침 몇 방 들어가면 제정신 차리던데.”
숫자만 믿고 의기양양한다.
그런 놈들에게 진짜 현실이 뭔지 알려주기로 했다.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게.”
부우우웅!!
천마검에서 은녹빛의 빛이 힘차게 솟는다.
최근 익스퍼트 중급에 오른 데다가 용혈이 섞인 마나 소드는 그 자체로 진한 농도를 뿜어냈다.
“!!!”
“설마···아니지?”
현실을 부정하는 건 오히려 놈들이다.
분위기가 술렁댔다.
소드 유저라면 모를까, 익스퍼트부터는 숫자를 의미 없게 만드는 고수였으니까.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 익스퍼트라면 이쪽도 있다.”
알프레도의 검에서 마나소드가 치솟았다.
물론 내 마나소드보다는 그 빛이 훨씬 옅고 마나 자체도 검에 또렷하게 맺히지 못하고 불안하게 일렁댔다.
딱 봐도 유저 최상급이 익스퍼트인 척하려고 억지로 마나소드를 쥐어짜내는 모습이었다.
“봐라! 마나소드 아니냐! 검 좀 다룬다 싶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겁낼 것 없다.”
“그래? 그러면 저건 어때?”
파아아앗!!!
시퍼런 보랏빛이 뒤편에서 치솟는다.
이번엔 내가 아니라 시온 차례였다.
그녀가 역수로 쥔 두 개의 단도에서 굵고 선명한 검기가 뱀의 혀처럼 날름댔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익스퍼트라니.
이제 황혼교도들도 슬슬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일단 작전상 후퇴를.”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던 황혼교도의 눈길이 유일한 도주로였던 철문을 향했다.
문고리를 틀어막은 채 예쁘게 휘어져 버린 쇠막대를 본 그들의 눈빛에 그제야 절망감이 스며든다.
“망할.”
“이렇게 된 이상 다 조져!”
“으아아아!!!”
환한 불길에 몸을 내던지는 불나방.
눈을 회까닥 뒤집는 황혼교도.
회색이었던 철문이 새빨간 혈흔으로 뒤덮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시온이 유려한 발걸음으로 무기를 든 사내들 사이를 휘저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싸움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예술을 보는 듯했다.
S자를 그리며 이동하는 그녀의 경로에 걸리는 적들은 심장 아니면 목구멍에 바람구멍이 생겼다.
반면에 나는 정석적으로 움직였다.
드루이드 능력까지 쓸 필요도 없다.
천마가 알려준 검술로 차근차근 다가오는 놈들을 정리하고 이후에는 도망치는 녀석들의 등에 칼을 박아주었다.
상하좌우 팔방을 빈틈없이 채우는 칼날의 곡선이 상대의 호흡을 끊어버렸다.
2대 50이 2대 1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알프레도가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호흡을 헐떡대며 나와 시온을 두려운 눈빛으로 보았다.
투지가 꺾인 사내는 이내 칼을 내렸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아까와는 달리 공손한 말투.
역시 강한 무력은 그 자체로 확실한 예절주입기다.
“곧 물고기밥이 될 놈이 내 정체를 알아서 뭐하게?”
아까 알프레도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줬다. 그러자 알프레도가 검을 떨구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네가 나라면 살려주겠어?”
“해저동굴은 상당히 넓은데다가 길도 복잡합니다. 절 살려주신다면 길 안내는 물론이고 경매장에 저장된 보물창고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구미가 당길만한 제안이다.
시온이 검 끝이 살짝 흔들렸다.
“도련님, 어떻게 하십니까?”
“저 말이 사실이라면 살려줄 가치가 있겠지.”
살려주겠다는 말에 알프레도의 눈동자가 희열에 젖는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고마워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왜냐하면 살려줄 사람이 꼭 너일 필요는 없거든.”
“···예?”
알프레도가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경매장에서 날 안내해줬던 토끼가면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엎드려 죽은 척을 하고 있었는데, 예리한 내 눈썰미를 피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쪽 생각은 어때? 둘 중 한 명만 살아야 한다면 알프레도에게 목숨을 양보할 거야?”
“아니요! 저를 살려주십시오!”
들켰다는 걸 깨달은 토끼가면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목숨을 구걸했다.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 노예창고부터 시작해서 저 늙다리가 빼돌린 경매장 보물 위치까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 사람 대신 절 살려주세요!”
토끼가면 여자의 말을 들은 알프레도가 대로하여 그녀를 매도한다.
“더러운 년이! 감히 배신을 해!”
“닥쳐!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상관이야!”
“버릇없는 년. 진작에 죽였어야 하는데.”
“당신 요란한 성깔 맞춰주기도 질렸는데 차라리 잘 됐어. 제발 저 사람 좀 죽여주세요!”
둘이서 요지경 개싸움을 벌인다.
시온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에게 결정을 맡기겠다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둘이 같은 양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도주 위험이 있는 고수보다는 그보다 무력이 현저히 낮은 토끼 가면 여자를 붙잡고 있는 게 편하다.
촤아악!!
알프레도의 목이 떨어졌다.
살았다는 걸 인지한 토끼가면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기가 아는 걸 모조리 떠벌리기 시작했다.
“길 안내부터 해라. 노예들을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노예저장고로 인도했다.
막상 가보니 그곳은 축사인지 감옥인지 헷갈릴 정도로 참혹한 환경이었다.
“지독하군요.”
오죽하면 별의별 꼴 다 본 시온도 입을 가리고 얼굴을 찌푸렸을까.
좁은 쇠창살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그 안에는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린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웅크려서 옴짝달싹 못했다.
몇몇 쇠창살에는 노예들이 싼 대소변이 그대로 흘러서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 노예들은 뭐지?”
“경매에서 팔리지 않거나 스파이를 통해 확보한 노예들을 임시로 보관하는 곳입니다.”
“이 노예들을 탐욕에게 보내는 건가?”
“그걸 어떻게···”
“대답만 해라.”
“그렇습니다.”
모든 걸 잃은 눈빛을 보이는 노예들을 주시하던 내가 나직히 읊조렸다.
“철문을 열어라.”
“···네?”
“귀 먹었어? 철문 열라고.”
“아무리 폐품이라고는 해도 팔면 본전은 건질만한 애들인데···”
“여기서 죽고 싶나?”
시온이 짤막하게 한마디 하자 토끼가면 여자가 부리나케 쇠창살의 입구를 하나하나 열었다.
그렇게 모인 노예만 백 명이었다.
깡마른 노예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얌전히 있었다.
도망칠 만도 한데 그동안 저항하면 맞는다는 게 학습된 듯해서 씁쓸한 심정이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하겠지.”
그런 노예들을 위해서 앞으로 나섰다.
“이곳을 책임지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한마디로 너희는 자유라는 말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몇 번씩 설득하고 자세한 상황설명까지 곁들이자 비로소 자유가 찾아왔음을 깨닫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흐흐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 신이시여!”
각자 표현하는 방법은 달랐으나 모두가 기뻐한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그들에게 저번에 구출해줬던 노예 유칼처럼 두 가지 선택지를 줬다.
첫 번째는 해저동굴을 빠져나간 다음 챙겨주는 약간의 여비를 가지고 고향이나 지인을 찾아가기.
두 번째는 북쪽 도깨비 바다를 건너 알버스 영지를 찾아가서 푸른매 용병단원 되기.
약 쉰 명 정도가 전자를 선택했고 스무 명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남은 서른 명은 내가 제시한 선택지 대신 새로운 제삼의 대안을 제시했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이미 노예가 되는 과정에서 삶을 지탱할 원동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남은 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향한 무한한 적개심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악과 깡뿐.
눈가에 핏발이 선 서른 명의 노예들을 보니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떠올랐다.
“사실 나는 너희를 이렇게 만든 원흉을 알고 있다. 황혼의 대간부 탐욕이라는 놈이지. 바로 내일 그 교활한 족제비를 잡으러 갈 계획인데 너희만 원한다면 그 작전에 끼워주겠다.”
거절할 리가 없다.
복수가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된 이들은 나를 따르기로 했다.
마침 탐욕을 속이기 위해 끌고 가야할 위장 노예가 필요했던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 * *
노예 뒤처리를 일단락하고.
토끼가면 여자는 이어서 알프레도가 몰래 빼돌렸던 경매품 창고를 나에게 보여줬다.
알고 보니 이 여자는 알프레도의 첩실 비슷한 존재여서 이런 창고를 알았다나 뭐라나.
그다지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금빛의 향연이 내 이목을 모조리 끌었으니 말이다.
“세상에, 이 많은 경매품을 어떻게 처분하려고 이렇게 많이 숨겼는지 모르겠군요.”
시온도 혀를 내둘렀다.
내가 생각해도 심하긴 했다.
저 정도 재산이면 중년이었던 알프레도는 죽기 전까지 펑펑 써도 다 못 썼을 거다.
“우선 챙기자.”
유명한 화가의 초상화.
초일류 도공의 도자기.
수백년 전 왕가의 깃발.
초고가 마법 아티팩트.
거진 백만 골드 상당의 애장품들이 모조리 아공간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다. 보니까 황금산의 높이가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높아졌다. 돈을 쓰러 경매장에 들어왔는데 어째 재산이 더 늘어난 셈이다.
토끼가면 여자는 눈앞에 쌓여있던 보물이 허공에서 사라지자 깜짝 놀랐는지 허우적댔다.
“다 어디 갔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출구부터 안내해라.”
차가운 어조로 말하자 토끼 가면 여자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길 안내를 시작했다.
우리 뒤로는 구출한 노예들이 기차놀이를 하듯이 줄줄이 이열종대로 따라왔다.
마침내 바다내음이 느껴졌다.
리앙의 남쪽 만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신 노예들이 감격에 젖어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토끼가면 여자가 과도하게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는 콧소리 가득한 목소리로 애교를 떨어댄다.
“저는 그쪽이 하라는 대로 약속을 다 지켰어요. 호호. 그러니 이제 가도 되죠?”
확실히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길 안내도 해주고 노예도 풀어주고 알프레도의 비밀창고도 보여줬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도 응당 이에 대한 보답을 해주기로 했다.
“그래 가도 된다. 저세상으로 가도록.”
푹!!
토끼가면 여자가 내게 몸을 비빌 때부터 살기를 줄기줄기 흘려대던 시온이 이때다 싶었는지 검을 뽑아 전광석화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욕설을 퍼붓는다.
“망할 놈···생긴 건 번듯한 놈이 하는 짓은 망나니가 따로 없네···커헉···”
“하도 망나니 소리를 많이 들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군. 죽어서 네 죄를 참회하거라.”
“제기랄···”
애초에 노예를 취급한 황혼교도 따위 살려줄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게 해저동굴을 지키던 마지막 황혼교도를 끝으로 리앙의 노예시장은 마무리되었다.
* * *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 노예들을 이끌고 톰이 기다리고 있던 조합 건물로 향했다.
건물에 도착하자 심심해서 몸을 배배 꼬고 있던 캠벨이 단숨에 달려와서 나를 껴안는다.
저만한 덩치가 온 힘을 다해서 안아대니 잠깐이지만 숨이 막혔다.
“이것 좀 놔라.”
“부단장!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나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나갔다 온지 하루도 안 됐다만.”
“다음에는 나도 데려가. 여기서 가만히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안 되겠다.”
“그러지.”
이어서 톰과 만났다.
톰에게는 시장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그러자 톰은 가장 먼저 그 사샤라는 하이엘프를 만나고 싶어했다.
노예 저장고에서 꺼내준 사샤는 부족에게 버림받은 데다가 인간 사이에 있기엔 너무 특출난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 일단 복수를 원하는 노예들과 함께 데려온 참이었다.
은발 머리를 찰랑거리는 그녀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짜 하이엘프로군. 그것도 순혈이야.”
톰이 감탄했다.
“어떻게 사샤 같은 엘프가 부족에게 버려졌지? 내가 알기로 엘프란 종족은 그들의 지도층인 하이엘프를 맹목적으로 보호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도 짚이는 바는 없다.
그러나 황금가지의 시험을 치르면서 한가지 안 사실이 있다면 엘프라고 해서 인간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점이다.
그들도 자기들끼리 의견이 안 맞으면 알력다툼을 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욕심도 부리며 자신과 다른 점을 가진 약자를 차별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겠지요. 그나저나 사샤를 어떻게 할지 걱정입니다.”
탐욕이 따로 언급까지 했으니 그를 속이기 위해서 사샤는 무조건 필요했다.
하지마 이제 막 노예신분에서 벗어난 가련한 소녀를 생사가 오가는 작전에 데려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사샤가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
여태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기에 모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사샤가 걸어온 곳은 놀랍게도 내 앞이었다.
고개를 올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
난데없이 폴짝 뛰어서 내 허리를 꼭 껴안는 게 아닌가!
돌발 행동을 예상치 못한 톰과 캠벨이 입을 딱 벌렸고 시온도 황당했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역시 반응조차 못하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런 내 가슴팍에 사샤가 머리를 부비부비하며 말했다.
“아저씨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