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79)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79화(79/200)
11장 엘프 : 설레는 망나니
출신을 묻는 내 질문에 기사는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흐흐흐, 그걸 말해줄 것 같나.”
뻗대는 녀석을 보니 반갑다. 내심 공손하게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해체용 단검을 꺼내서 혀로 검날을 할짝였다.
“생각나면 천천히 말해.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가죽수집가 게빈 때부터 사람을 족치는 데는 도가 텄다.
산적 두목 놈의 손발톱을 뽑고 아픈 곳 위주로 때려주니 너무 좋은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중에는 오른손을 잘라서 다시는 칼을 못 쥐는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결국 백기를 내건다.
“실토하겠습니다.”
“아냐. 너는 더 버틸 수 있어.”
“네?”
“이것도 견디다니. 인내심 좋은걸?”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로 자백하겠다는 놈의 입을 틀어막고 기분이 풀릴 때까지 추가 교육했다.
놈은 내가 상상 이상의 또라이라는 걸 느끼자 목숨을 건지려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 꺼내놓았다.
그리고 산적 두목의 정체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정말 기사 출신이었다.
“몰티 자작령의 기사라고?”
“그렇습니다.”
참고로 몰티 자작령은 로이드 가문을 지지하는 산하 가문 중 하나로 게임 속 세계에 빙의했을 때부터 나를 쭉 괴롭혀왔던 이복형 필립의 외가였다.
알버스 성을 두고 진행된 영지성에서 로잘린과 필립은 몰티 자작령에서 상당한 병력을 지원받았었다.
로잘린이 중급 악마 단탈레온을 소환하고 죽은 후 힘을 잃은 필립은 로이드 후작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몰티 자작령으로 쫓겨났다.
나로서는 당연히 필립을 확실히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로이드 후작의 체면을 봐서 거기까지는 내버려뒀다.
게다가 녀석보다 황혼교를 추적하는 일이 급해서 그쪽에 투자할 시간도 부족했고 말이다.
그런 몰티 자작령에서 온 기사가 어째서 영지와는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산적질을 하고 있을까.
“기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굳이 이런 짓을 해? 가만히만 있으면 네 주인이 봉급 따박따박 줄 텐데 말이야.”
산적 두목이 의아하다는 눈초리를 보낸다.
“혹시 외지인이십니까? 내지인이면 요즘 이 근방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실 수가 없을 텐데요.”
이어서 그가 전한 소식은 충격이었다.
“동부 대산림에서 나온 엘프들이 인근 영지인 몰티 자작령을 점령하고 그곳을 실효 지배 중이다?”
“그렇습니다.”
“몰티 자작은?”
“타계하셨습니다. 지금도 몰티 성 정문에는 자작님의 목이 걸려있습니다. 크흑···”
주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산적 두목은 어두운 낯빛을 보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래서 직장을 잃고 산적이 되었나? 자네가 몰티 자작 쪽 기사라면 후작령에서의 산적질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잘 알 텐데?”
“저라고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몰티령을 점령한 엘프들이 가족을 인질로 잡고 후작령의 혼란을 야기하라면서 억지로 산적질을 시켰습니다.”
아르니아 대륙에서 엘프는 극히 수동적인 종족이라 평가받는다.
다른 종족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이며 평소에는 대산림에서 두문불출하기에 자기들끼리 잘 지낸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랬던 이종족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인근 영지를 공격하고 심지어 로이드 가문까지 위협하려 할까.
‘그러고 보니 보름달 시장에서도 사샤가 노예로 나왔었지.’
내가 알기로 사샤도 동부 대산림에서 온 엘프족이다.
하이엘프인 그녀가 노예로 팔린 것이 이번 소동과 연관 있을지도 모른단 예감이 들었다.
우두커니 서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일단은 복귀해서 로이드 후작을 만나봐야겠다.
* * *
로이드 후작성에 도착했다.
성문에 도착하자 나를 알아본 경비병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했다.
“어서오십시오! 자작님!”
“수고하게.”
북부에서 성공적인 군복무를 마치고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중급악마 단탈레온을 처리한 일로 후작성에서의 내 인기는 유명 연예인에 버금갔다.
그래서인지 헤논 공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구경했다.
“자작님! 안녕하십니까!”
“요새 통 안 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건강 조심하십시오.”
“제철 과일을 땄는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한 번 드셔 보시지요.”
영지민들의 따뜻한 환대.
아이들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별명을 부른다.
“우리 영주님은 악마살해자야.”
“아니야! 영웅이야!”
“둘 다 맞으니까 조용히 하렴.”
영지민 중 몇 명은 내 뒤를 따라오는 일백 명의 산적을 보며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어쨌든 긴 여정을 끝냈다.
내성에 입장하자 미리 좌우로 도열한 하인과 하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날 맞이한다.
“자작님! 오셨습니까!”
로이드 후작령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리를 굳힌 마당이니 사용인들도 더는 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중에는 단탈레온 소환 당시 내게 목숨을 빚진 사람도 많아서인지 예전과는 완전 딴판으로 극진히 대우했다.
정면에선 집사장 세바스찬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마중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피곤하시겠지만 후작님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곧바로 찾아뵈려 했다.”
세바스찬의 시선이 포박된 산적들에게 향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오다 주웠다. 내성 지하감옥에 가둬둬.”
“알겠습니다.”
산적들 뒤처리를 세바스찬에게 맡기고 즉시 로이드 후작을 만났다.
집무실 분위기는 차분했다.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깃펜을 빠르게 놀려 서류에 잉크를 묻히던 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래 걸렸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제가 부재중인 동안 여기도 복잡한 일이 발생한 듯하더군요.”
“이곳 일은 나중에 논의하고 우선은 리앙 건부터 얘기하자꾸나. 탐욕에 관한 단서는 좀 잡았느냐?”
이야기 보따리가 가득 차 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 전에 결론부터 간단히 전하기로 했다.
“황혼의 대간부 탐욕을 잡았습니다.”
“농담이 심하구나.”
“저는 지금 진심입니다.”
“제법 재밌는 장난이다.”
전혀 안 믿는 눈치길래 처음부터 쭉 설명했다.
리앙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상인 조합과 충돌했던 때부터 시작해서 조합장 하만을 잡고 갇혀있던 유론 시장을 발견한 일.
보름달 시장에서 황혼교 잔당을 제압하고 또 다른 세븐스타 톰과 함께 시청사로 쳐들어갔던 일.
탐욕과 처절한 사투에서 승리하고 그가 비장의 무기로 준비하던 재앙과도 같은 저주 괴물을 사냥한 일까지.
이런 이야기는 지어내라고 해도 못한다.
반신반의하던 후작의 눈빛에 경악이 깃들고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녕 탐욕을 잡았다고?”
“물론 톰의 도움이 컸고 그 밖에도 여러 사람의 조력을 받아 이루어낸 일입니다.”
“허허···”
로이드 후작은 천장을 보며 혀를 찼다.
그로서는 기가 막힐 것이다.
나한테 일을 맡길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져서 돌아오니 말이다.
“탐욕은 황혼교 간부 중에서도 그 성정이 간교하고 교활하기로 이름난 자다. 조심성이 하늘을 찌르던 놈을 수면 위에 꺼내고 토벌하기까지 한 건 오로지 네 공이라 봐야겠지. 정말 대단한 업적을 세웠구나.”
“과찬이십니다. 그보다도 전 현재 로이드 후작령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세하게 듣고 싶군요.”
오면서 몰티령 출신 산적 무리를 조우한 일과 그 두목이 자백한 내용을 로이드 후작에게 보고했다.
몰티 자작령을 점거한 엘프족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오르자 후작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헤논 네가 들은 바 그대로다. 별안간 엘프들이 숲에서 나와 오랫동안 우리를 섬겨오던 봉신을 죽였고 현재 나를 포함한 다른 영주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지.”
“당장 군사를 일으켜서 반격하시지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애매하다. 최근 힐튼 백작령에서 갑작스레 대군이 움직였어. 그래서 가용할 수 있는 병사는 모두 그쪽으로 돌려 대치하고 있다.”
힐튼 백작가라니.
알버스 영지전에서 패배하고 앙심이라도 품은 걸까.
그렇다고 해도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다.
이건 마치 엘프족과 동맹이라도 맺고 양동작전을 벌였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여러모로 귀찮군요.”
“결과적으로 우리 가문은 군사를 차출할 여력이 없다. 없는 병력을 쥐어짜낸다 해도 오백 정도만 운용 가능하지.”
오백 명이면 대세에 영향을 미치기엔 미비하다.
무엇보다 엘프족은 무력 수준이 뛰어났다.
황금가지의 시험을 치르면서 느꼈던 그들은 몸도 날래고 활도 잘 썼으며 조직적으로 움직일 줄 알았다.
“그래도 몰티 자작령을 외면할 순 없을 텐데요.”
“휘하 봉신에게 소집 명령을 내려놓았다. 며칠 후면 군사들이 모일 것이다.”
“누가 그들을 이끌지는 정하셨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구나.”
세븐 스타란 위명을 가진 로이드 후작이 이들을 맡아주면 연합군 사기가 오르겠지만 지금 로이드 후작은 힐튼 백작가를 경계하기도 벅차 보였다.
“후작님, 저에게 로이드 연합군을 이끌 기회를 주신다면 지금껏 해왔던 대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겠습니다.”
아버지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성장에 집중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종말을 막아야 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소 촉박하다.
앞으로 메인 스트림이 진행될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지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고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뻗어 나가야 했다.
‘게다가 사샤부터 시작해서 엘프족에게서는 뭔가 꾸리꾸리한 냄새가 가득하단 말이지.’
총사령관을 맡겠다는 말에 로이드 후작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괜찮겠느냐? 탐욕을 잡느라 몸도 성하지 않을 텐데 좀 쉬어야지.”
“아닙니다. 집안에 불이 났는데 어찌 발 뻗고 자겠습니까? 쉴 때 쉬더라도 모든 일을 해결하고 마음 편히 쉬겠습니다.”
“으음···장하구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알겠습니다.”
후작의 승낙이 떨어졌다.
바빠보이는 그에게 인사를 남기고 오랜만에 내 방에 돌아왔다.
마침 시온과 캠벨이 대기 중이었다.
시온은 코코와 사샤를 놀아주고 있었고 캠벨은 구석에 앉아 간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저씨!”
“뀨!”
“오셨습니까.”
“왔나.”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경멸의 시선으로 날 쳐다보던 시온 한 명 뿐이었는데, 어느새 도떼기시장처럼 북적대는 광경을 보니 묘한 심정이다.
“부단장, 기분 좋은 일 있었어? 갑자기 웃네.”
“별일 아니다. 그보다도 너희에게 전파하고 싶은 말이 있다.”
로이드 후작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전달했다.
휘하 봉신들을 진두지휘하는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엘프족을 토벌하겠다는 말을 들은 캠벨은 흥분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크하하핫! 살아생전 귀쟁이랑 싸워보는군. 역시 부단장이랑 같이 다니면 재밌는 일이 알아서 찾아온다니까?”
호탕하게 웃는 캠벨의 옆구리를 시온이 강하게 찔렀다.
“윽! 이 하녀가 또 왜 이래?”
“엘프라는 단어가 있는데 굳이 귀쟁이라는 멸칭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부르든 뭐 어때? 여기 엘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투덜대던 캠벨이 긴 귀를 축 늘어트린 사샤를 인식하고 절로 말꼬리를 흐렸다.
“아, 맞네. 우리 중에 엘프가 있구나.”
모두의 시선이 사샤에게 몰린다.
나도 사샤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사샤, 너에게 질문이 있다.”
“뭔데요?”
“긴 세월 동안 얌전히 있던 엘프족이 어째서 인간을 공격했는지 짚이는 점이 있을까?”
사샤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무래도 내 촉이 맞은 모양이다.
그녀가 노예로 팔린 이유와 이번 전쟁은 틀림없이 연관 있다.
“대답하기 힘들면 시간을 좀 주마.”
사샤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이 말을 듣고 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녀 쪽에서 먼저 말하겠지.
“연합군이 조직될 때까지는 각자 자유시간이다. 수련을 하든 여독을 풀든 알아서 하도록.”
동료들을 해산시키고 책상에 앉았다.
탐욕과의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되새기며 수련하기 전에 미리 서신 한통을 작성했다.
푸른매 용병단장 라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종족과의 전투인데 오합지졸 연합군으로만 상대할 순 없지.’
비록 로이드 후작이 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어도 봉신들이 끌고 온 군대는 기본적으로 해당 영주에게만 충성을 바친다.
어찌 보면 나는 바지사장이나 마찬가지란 의미다.
그나마 로이드 후작은 대륙을 구한 영웅이고 그동안 봉신들과 지내온 세월이라도 있지.
나는 그런 것조차 없는데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출신조차 비천한 사생아에 망나니였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각자 따로 노는 휘하 영주들을 하나로 통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첫 번째는 바로 명성.
최근 나에게도 악마살해자라는 위명이 붙었으니 유명세만큼은 충분하다.
두 번째는 개인 능력인데 익스퍼트 검사에 드루이드인 나에게는 논외인 사항이고.
마지막으로 나만 따르는 충성 세력이 있어야 맨땅에 헤딩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로이드 후작령에서 뽑은 오백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여기에 푸른매 용병단을 더해서 위세를 과시하기로 했다.
“얼마나 강해졌을래나?”
라칸과 헤어진 지는 얼마 안 됐어도 지원은 넘치도록 해줬다.
리앙에서 구출한 노예 상당수가 푸른매 용병단이 되려 했고 상인조합에서 보내준 거금 또한 도착했을 터.
돈맛을 본 라칸은 아슬란 병법서를 바탕으로 병사들을 맹훈련시켰겠지.
새롭게 변화된 용병단을 다시 볼 생각에 가슴 한켠이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