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9)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9화(9/200)
1장 빙의 : 일하는 망나니
“뭐야? 말할 줄 알았네?”
빙고!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 검은 에고소드였다.
-천년 동안 너 같은 미친놈은 처음 본다. 살려줄 테니 좋은 말할 때 검 놓고 꺼져라.
“좋습니다. 검 놓고 가겠습니다.”
-여기 말고! 이 씨빰바야!
변소 구멍에 검을 놓을락 말랑하며 에고소드의 애간장을 태웠다.
몇 번 장난을 쳐보니 이 짓도 나름 재밌다.
가끔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장난을 치면 리액션이 좋아서 계속 놀려주고 싶은 사람.
에고소드에 담긴 영혼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놀릴 맛은 있었다.
-죽일 거다! 죽여버릴 거라고!
“검에 갇힌 상태인데 어떻게 죽이시려고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길거리에서 만나면 눈도 못 마주칠 잡것이 감히!
“눈이 없으셔서 마주치려야 마주칠 수가 없네요.”
-어쩌다 이 몸이 여기까지 떨어졌단 말이냐···
그러게 진작에 좀 대답 좀 해주지.
사정하고 부탁하고 노래하고 칭찬하고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도 무응답이다가 똥통에 빠질 위기에 처하니 말하는 건 조금 괘씸하지 않은가.
결론은 날 깐족거리게 만든 이 에고소드 잘못이다.
“말을 텄으니 자기소개를 다시 하지요. 저는 엘든 왕국 고든 로이드 후작의 아들 헤논 트리스라고 합니다.”
-······
“대답이 없으시면 여기가 좋으신 걸로 알겠습니다.”
-아오! 네놈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그냥 천마님이라고 불러라.
검의 말을 들은 순간 멍해졌다.
천마?
내가 아는 그 천마가 맞는 건가?
흔히 무협지를 보면 천마신교, 즉 마교의 우두머리를 천마라 호칭한다.
엄청 강한 무력을 지니고 중원대륙을 호령하는 그런 존재.
“혹시 천마신교 교주십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맞네. 맞어.
게임 개발진이 언급했던 이스터에그는 시온라이크에 등장하는 에고소드의 정체가 천마검이란 사실이었나 보다.
그런데 보통 천마면 자기 자신을 ‘본좌’라 부른다든지, 뭔가 티를 내지 않나?
일천 년을 검에 갇혀있더니 현지 적응이라도 한 건지 원.
아무튼 천마는 내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하자 많이 놀랐는지 갑자기 말을 쏟아냈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아느냐? 혹시 신교의 교인이더냐?
“그랬으면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요? 당장 엎드려서 신교천하 천마앙복 뭐 이런 구호라도 외쳤겠죠.”
-!!! 확실히 중원대륙 문화를 아는 놈이구나. 생김새는 색목인인 놈이 어찌···
말꼬리를 흐리던 천마는 잠시 후 뭔가를 깨달은 듯 예의 그 목소리를 울렸다.
-네놈···인제 보니 몸뚱이랑 영혼이 따로 놀고 있구나. 크크큭. 재밌는 놈이군.
역시 천마는 천마라는 건가.
단숨에 내 상태를 파악했다.
-좋다! 사내놈은 시시해서 거르려고 했는데 너 같은 별종이라면 다르지. 특별히 말벗으로 삼아주겠다.
잠깐?
사내놈이 시시하다고?
그러면 시온은 검을 잡자마자 도와줬는데 나는 똥통에 빠트리기 전까지 무응답이었던 이유는 설마···
“천마님. 제가 사내여서 그동안 대답을 회피했던 겁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냄새나는 사내 손보다 여인네 손이 훨씬 낫다. 안 그래도 검이 된 후 여인을 품은 지 오래되었다. 그렇게라도 온기를 느껴야 하지 않겠느냐?
여미새였구나.
여자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머릿속 천마 상상도가 근엄하고 무에 전념하는 무인에서 술과 여인을 옆에 두고 헤헤거리는 늙은이로 대체되었다.
-가문의 영광으로 삼거라. 본좌와 이렇게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자는 중원대륙에서도 몇 없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간에 에고소드와 소통한다는 일차목표는 이루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도움을 받기 힘들어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생색을 내서 피곤할 것 같으니 주도권을 잡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필요 없네요.”
-뭣이?
“겨우 천마 아닙니까?”
-뭐라? 겨우 천마?
“난 또 드래곤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 됐습니다. 검은 여기 떨구고 가겠습니다. 혹시 모르죠. 똥통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날지도요. 그럼 이만.”
내가 진짜로 버리려고 하자 머릿속으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네이놈! 감히 본좌를 무시하는 게냐? 중원대륙을 일통하고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만인지상이었단 말이다!
“그럼 뭐해요. 여기서는 검에 갇힌 신세인걸. 누군가에게 졌으니 그런 꼴이 됐겠죠. 그렇게 따지면 천하제일인도 아니네.”
자존심을 슬쩍 긁어주니 거품을 무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오냐! 뭘 어떻게 보여주면 되겠느냐? 널 고수로 만들어주면 이 몸의 위대함을 인정하겠느냐?
“천마님이 절 가르친다고 뭐가 달라지기나 하겠습니까? 사람도 아니고 고작 검인데요.”
-멍청한 소리! 본좌의 무공은 이곳 대륙의 미개한 무인들이 익히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장담하는데 넌 엄청난 고수가 될 테다.
시온라이크에서도 시온은 에고소드의 도움으로 짧은 시간에 빠르게 강해진다는 설정이 있다.
이 세계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천마의 조력은 필수다.
“솔직히 안 믿기는데, 속는 셈치고 한 번 믿어보지요. 배웠는데 성능이 별로면···아시죠?”
-이런 씨빰바 같은 놈!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저 근본 없는 욕설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물어봐야겠다.
* * *
해가 떠오르기 전 어슴푸레한 새벽.
새파란 빛이 사위를 물들일 때, 허리춤에 천마검을 챙기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후작성의 고용인들은 부지런했다.
이른 새벽에도 동동대며 돌아다니다가 훈련하러 가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서 도망갔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누구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소곤댄다.
“들었어? 저 망나니가 일대일로 필립 공자님을 꺾었대잖아.”
“난 안 믿어. 무슨 비겁한 수를 쓴 거겠지.”
“목격자가 한두명이 아니래. 기사들은 거의 다 봤고, 후작님도 직접 참관하셨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본격적으로 후계자 싸움이 시작되는 건가?”
“싸움은 개뿔. 상대가 되겠냐? 조만간 후작성에 피바람이 몰아치겠어. 우리는 그냥 조용히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저렇게 다 들리게 말할 거면 왜 굳이 귀에다 손을 대고 귓속말로 말하는지.
아무튼 하녀들의 말이 맞았다.
요근래 내성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모두가 내 작품이다.
천마가 옆에서 피식 댔다.
-듣자하니 사생아라던데. 이곳에서 네 평판이 어떤지 알만하구나. 하긴 검을 똥통에 처박으려는 사고방식을 가진 놈이 정상일 리가 없지.
“방금 일어났더니 배가 살살 아프네요. 다시 그 변소로 갈까요?”
-······
말 한 마디로 천마를 합죽이로 만들었다.
훈련장에 도착하니 시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랏빛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모습이 상큼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과연 주인공이라는 건가.
한손에 목검을 들고 있길래 말해줬다.
“오늘부터 네놈의 무례를 벌하는 걸 그만둘 예정이다.”
“그렇습니까?”
“방해받지 않고 혼자 훈련하겠다. 그러니 너는 이곳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라. 네 아버지인 집사장도 포함이다.”
“알겠습니다.”
시온은 내가 훈련방식을 바꾼다고 말하자 묘하게 실망한 눈치였다.
모르긴 몰라도 나랑 검을 맞대는 게 그녀에게는 나름 소소한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착각하지 마라. 뭔가 깨달음을 얻어서 비장의 특훈을 하려는 것이니. 조만간 다시 벌을 줄 테니 각오하고 있도록.”
“예!”
다시 밝아지는 얼굴.
쟤도 약간 기질이 있어 보인다.
무슨 기질인지는 말 못하지만.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웃통을 벗고 검을 휘둘렀다.
내가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것. 깨달았던 것.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허공에 쏟아부었다.
천마검은 내 검무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상단세 내려치기로 땀을 털어내자 바로 입을 열었다.
-네놈. 천재로군.
과연 천마.
바로 이 몸의 미친 유전자를 알아봐 주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재면 뭐하나? 쓰는 검술이 기초가 하나도 안 잡혀있는데. 내가 살던 대륙 길거리 왈패도 너보다는 형식 있는 검술을 구사하겠다.
“그렇게 엉망입니까?”
-엉망?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돼야 쓸 수 있는 단어지. 너는 아예 검을 모른다고 해야 맞다. 하긴, 이 대륙에서 검을 제대로 구사하는 놈이 몇이나 있겠냐만.
“제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갑자기 고든 로이드 후작의 무력 수준이 궁금해졌다.
그래도 천마검은 후작의 비밀창고에 오래 있었으니 그의 수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지 않을까.
-그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외다리 녀석 말이냐? 그놈은 좀 쓸만하더군. 만약 중원대륙이었으면 휘하에 두었을 것이다.
마왕으로부터 대륙을 구한 소드 마스터쯤은 되어야 쓸만하다는 평을 받는 건가.
새삼스레 천마의 기준치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넌 오늘부터 죽었다고 복창해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뜯어고쳐 줄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천마의 지도 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을 이어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산등성이 사이로 태양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시온이 들어왔다.
“도련님.”
“무슨 일이지?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했을 텐데.”
“중요한 일입니다.”
“말해라.”
“후작님께서 도련님을 아침식사자리에 부르셨습니다. 빨리 씻지 않으면 늦을 듯합니다.”
아침식사.
여태껏 후작성의 가족들은 각자 바쁜 와중에도 아침밥만큼은 꼭 같이 모여서 먹었다.
일종의 가족 간의 화합을 위한 자리라고 보면 된다.
그동안 나는 후작의 아들이었음에도 아침식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참석을 안 한 것도 있고 알게 모르게 저쪽에서 압박을 넣은 것도 있다.
한마디로 가족이되 가족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단 말이다.
그렇게 겉돌던 나를 로이드 후작이 먼저 식사자리에 불렀다.
벌써부터 후작성의 지각변동은 물밑에서부터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 * *
아침식사장.
기다란 직사각형의 식탁에 새하얀 식탁보가 깔려있다.
고급스러운 촛대와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벽에 걸린 고가의 초상화들.
귀족의 만찬장에 나와 시온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족은 물론이고 하인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왔군. 앉아라.”
식탁의 넓이에 비해 깔린 건 많이 없었다.
한국처럼 9첩 반상 12첩 반상 이렇게 먹는 문화가 아니다.
앞에는 소량의 스프와 빵이 놓여 있었고 이건 필수로 다 먹어야 했다.
양이 부족하다 싶으면은 뒤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에게 원하는 메뉴를 말하면 주방에서 미리 준비한 음식을 가져다주는 식이다.
그래서 가족들 뒤에는 각자 전담하는 하인이나 하녀가 한 명씩 전봇대처럼 서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시온이었다.
“이렇게 다 모인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들거라.”
“네, 후작님.”
덜그럭 덜그럭
적막한 분위기.
포크와 나이프 놀리는 소리만 어색한 침묵을 달랬다.
빵을 스프에 찍어서 한입 뜯어먹고는 이복형 필립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식사장에 나타나고서부터 죽상이 된 필립은 접시에 코를 박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계모 로잘린은···
‘적의를 숨길 생각도 없구나.’
밥도 안 먹고 대놓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얼굴에는 ‘사생아 따위가 감히 겸상하려 들어?’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시선만으로도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고 체할 것이다.
하지만 망나니 기질이 옮았는지 헤논의 몸에 빙의된 이후로 이런 시선에 익숙해진 나는 태평하게 빵과 스프를 다 먹고 시온에게 스테이크까지 달라고 했다.
제집 안방처럼 구는 모습에 로잘린의 눈이 더욱 세모꼴이 됐음은 물론이다.
“로잘린, 식사 좀 하시오. 빵과 스프가 그대로 남아있군.”
“···몸이 좀 불편해서요.”
“허허, 오늘 푹 쉬시오.”
“푹 쉰다고 나을 병이 아닌 것 같네요.”
후작의 말에도 삐딱선을 타는 걸 보니 날 초대한 후작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티를 팍팍 냈다.
후작도 이 정도 분위기는 예상했는지 마지막 빵 한조각을 입에 넣어서 식사를 마무리하고 입을 뗐다.
“헤논.”
“예, 후작님.”
“오늘 너를 부른 이유가 있다.”
“무슨 일입니까?”
“너에게 작은 일거리를 하나 맡길까 한다.”
“!!!”
필립이 번쩍 고개를 들고 로잘린이 옆에서 바로 팔딱거리는 반응을 보인다.
“당신!”
“말끝까지 들으시오.”
주위를 조용히 만든 뒤 그가 말을 이었다.
“헤논 너는 후작성에서 태어난 후 한번도 멀리 나가본 적이 없지.”
“그렇습니다.”
“사람이 맨날 같은 곳에만 있으면 편협하고 옹졸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김에 출장임무를 내리마.”
후작의 말을 들으니 어떤 임무를 내릴 지 대충 예상이 갔다.
“마침 추수철도 끝나고 후작령의 세금을 걷는 시기가 다가왔다. 사람을 붙여줄 테니 영지를 시찰하면서 세금을 걷어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