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93)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93화(93/200)
12장 잠식 : 총꺼낸 망나니
일천 년 전 아르니아 대륙에 등장했던 최초의 드루이드가 내 눈앞에 현현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했다.
멀린은 천마를 봉인할 당시 세계수의 파편을 일곱 개로 나누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영혼 또한 같은 수로 분리했다.
한마디로 황금가지에는 멀린의 영혼 조각이 들어있는 셈이다.
그랬기에 황금가지를 흡수할 때마다 멀린의 기억을 토대로 시험을 봤었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멀린은 멀린의 본체가 아니라 영혼의 일부, 즉 화신(化身)이라고 보는 게 더 합당했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후손님의 질문이라면 대답해주지.]“리처드 대장로는 집단 세례식을 통해 인간과의 전쟁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인간과 엘프 모두의 공멸이었죠.”
[그래서?]“혹시 멀린님께서 리처드 대장로를 조종했습니까?”
아까부터 이 부분이 찜찜했다.
리처드 대장로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다.
마치 자신은 원치 않았는데 세례식을 진행했다는 반응이었다.
내 질문을 받은 멀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했다.
[맞아. 내가 대장로를 조종했어.]역시나 그랬던 건가.
강화전사처럼 리처드 대장로 또한 멀린의 영혼에 잠식되었던 듯했다.
심지어 항상 황금가지를 지녔으니 엘프족의 그 누구보다도 멀린에게 깊이 지배당했었겠지.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해버렸다.
“어째서 그런 짓을 벌이셨습니까?”
[무슨 말이야?]“왜 잘 살고 있던 엘프족을 멸족의 위험에 빠트리고 가만히 있는 인간족까지 고통에 빠지게 했느냐는 말입니다.”
내 질문을 들은 멀린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후손님은 참 이상하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내 편이어야지.]“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이군요.”
[영 모르겠다면 하나만 물어볼게. 드루이드인 자네는 하프엘프가 맞지?]“그렇습니다.”
[인간족이 자네를 환영하든가?]머릿속에 로잘린과 필립의 얼굴이 스쳤다.
그밖에도 이세계로 떨어진 초반에 나를 망나니로 취급하며 무시하고 멸시했던 수많은 사람이 의식 속을 맴돌았다 사라졌다.
[아니면 엘프족이 너를 맞이하든가?]엘프들과 오래 지내본 건 아니다.
그러나 이번 몰티령 전쟁을 겪으면서 엘프들이 얼마나 순혈주의를 추구하는지 제대로 느꼈다.
폐쇄된 숲에 오래 갇혀있던 이 종족은 외부인이 자신과 섞이길 바라지 않는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엘프와 인간에게 버려진 너와 나 같은 하프엘프는 어디에 머물고 정착해야 할까?]묵묵부답.
이미 내 대답을 예상한 멀린은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를 그렸다.
[정답은 바로 인간과 엘프 둘 다 없는 세상. 그곳이 우리 같은 잡종들의 유토피아다.]“그래서 인간과 엘프의 동귀어진을 노렸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나를 배척하는 녀석들을 굳이 신경 쓰고 배려해줄 이유가 있을까?]상당히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사고방식이나 묘하게 설득되는 구석이 있다.
“이제야 멀린님의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황금가지의 시험을 치르면서 멀린의 기억을 엿보았다.
트롤의 둥지에 일부러 떨어트리는 친구들과 어머니를 희롱하던 마을 사람들.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죽인 당시의 대장로까지.
그가 엘프족에게 무한한 증오를 느낀 건 감정을 가진 지성체라면 지극히 정상이었다.
[맞지? 그렇지?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어.]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하는 그를 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공감은 가지 않는군요.”
만약 내가 빙의자가 아닌 본래의 헤논이었다면 멀린의 논리에 감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구에서 이념과 종교와 개인의 욕심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전쟁을 배우고 온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고통받았는지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멀린과 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로이드 후작, 세바스찬, 사샤, 코코, 라칸, 에이든.
마지막으로 시온과 캠벨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나를 따르고 위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중에는 엘프도 있고 인간도 있고 심지어 드래곤까지 있었으니.
이들에게 있어서 내가 하프엘프라는 사실은 오히려 장점이었으면 장점이었지, 단점은 전혀 아니었다.
내 대답을 들은 멀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미간을 모았다.
[이상하네.]“멀린님이야말로 생각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니신지.”
[내가?]“그렇습니다. 두 종족을 향한 당신의 부정적인 감정은 백번 이해하나, 그것이 두 종족 전체가 몰살당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전쟁의 끔찍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절규.
남편 잃은 과부의 비애.
사지 잃고 희망마저 끊어진 장정들.
배고픔과 굶주림에 지쳐 서로 잡아먹는 이웃들과 먹물처럼 번지는 죽음의 전염병.
한 사람의 복수심 때문에 세상 모두가 이러한 재앙을 감당하는 건 가혹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멀린의 화신은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모두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었다.
“복수가 의미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악행을 저지른 대상만 벌할 수 있을 텐데요. 어째서 복수의 대상을 당신과 연관 없는 사람에게까지 확대한 겁니까?”
내 질문에 한참이나 뜸 들이던 멀린의 화신이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후손님과 나는 의견이 맞지 않는 듯해.]“계속 똑같은 주장을 고집하신다면,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상관없어. 건방진 후손 따위 집어삼켜서 하나로 만들면 그만이니까.]계속해서 예의를 차리던 멀린의 화신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희번덕대는 눈에는 흰자위만 가득했고 입가에는 탐욕스러운 침이 뚝뚝 떨어졌다.
[너에게서 짙은 세계수의 냄새가 난다. 너를 흡수해서 그 힘을 내 것으로 만들어주마.]“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나오면 얼마나 좋았냐? 어설픈 개똥철학 따위 집어치우고 시원하게 한 판 붙자고.”
[크핫하하하!! 이런 면에서는 너와 내 성향이 일치하는군.]“아까 잊어버리고 말을 못했는데. 자꾸 공통점 찾지 마라. 역겨우니까.”
천마검을 뽑아들었다.
에메랄드 검기가 검신을 휘감았고.
베어버릴 목적으로 놈을 향해 돌격했다.
아까 전에 잠깐이나마 그의 힘을 견식했었다.
나와 동일한 드루이드의 스킬을 사용하는데 파괴력만큼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확실히 드루이드 레벨은 나보다 윗줄이었다.
그렇다고 낙담하기엔 이르다.
나에게는 드루이드 스킬뿐만 아니라 시온 라이크에 떨어진 이후부터 줄곧 치열하게 연마하던 천마검술이 있었으니까.
특히 드루이드는 근접전에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접근해서 칼로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결국 이건 내가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해서 놈을 처치하느냐, 아니면 그전에 멀린이 나를 드루이드 스킬로 처치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어디 후배 기강 좀 잡아볼까.]리처드 대장로의 모습을 한 멀린의 화신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갈라진 땅에서 나무뿌리가 뱀처럼 꿈틀대며 나를 옥죄려 들었다.
내가 소환하는 나무와는 차원이 다른 굵기였고 심지어 뿌리 사이에 날카로운 가시들도 달려있었다.
[우드 컨트롤] [바인드]일단은 나도 똑같이 나무뿌리를 소환해서 맞섰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상대의 나무뿌리에 먹히거나 눌려서 영 힘을 못 썼다.
그래도 나를 포위하려는 나무뿌리의 진입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효과는 있었다.
[소용없다. 순순히 네 운명을 받아들이거라.]갑자기 머리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시선을 올려보니 스톤 골렘 다섯 기와 우드 골렘 열 기가 나를 둘러싼 채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총 열다섯 기가 나 하나만을 죽이려고 살기를 내뿜는 셈이다.
[우드 골렘 소환] [스톤 골렘 소환]이에 맞서서 나도 골렘을 소환했다.
스톤 골렘 한 기와 우드 골렘 세 기로 총 네 기가 나왔으나 상대의 골렘 수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였다.
15대 4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수적인 열세 때문에 멀린에게 접근할 수가 없길래 하는 수 없이 상대의 스톤 골렘을 전담해서 맡았다.
-오른쪽 사각
-왼쪽과 발목 쪽
-뒤에서 주먹으로 내리친다.
천마게이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공격 방향을 알려줬지만 겨우 회피하는 수준.
그조차도 점점 어려워졌다.
잠깐 새에 내가 소환한 나무뿌리가 모조리 제압당했다.
할 일이 없어진 멀린의 나무뿌리는 나를 표적으로 삼아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애송아, 상황이 좋지 않다.
천마의 말이 맞다.
이대로라면 필패다.
쓸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모조리 써야할 때임을 직감했다.
우선은 아공간 호리병에서 도토리부터 꺼냈다.
까득!!
[도토리를 섭취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이 강화됩니다] [스태미나가 대폭 상승합니다] [마나 재생량이 큰 폭으로 증가합니다] [드루이드에게만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제한시간 3시간]중급 드루이드로 승급하고 나서는 처음으로 섭취한 도토리다.
그래서인지 효과 지속시간이 1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었다.
효과 또한 이전보다 엄청나게 상승했다.
몸에서 힘이 넘쳐흐르고 교감력이 어찌나 증가했는지 잠시지만 정수리를 뚫고 하늘과 연결되었단 기분이 들었다.
“후반전 시작이다. 다시 가보자고.”
[우드 컨트롤] [스톤 컨트롤] [윈드 컨트롤]현재 쓸 수 있는 드루이드 스킬을 총동원했다.
도토리를 먹은 상태에서 쓰는 스킬이 얼마나 강화되는지는 북부에서 절절히 체감했다.
그때는 겨우 초심 드루이드였는데 지금은 무려 중급 드루이드가 되었으니 스킬 강화의 폭이 확연히 달랐다.
[우드 골렘 소환] [스톤 골렘 소환]스톤 골렘 세 기와 우드 골렘 일곱 기가 소환되며 위풍당당한 위용을 드러냈다.
도토리를 먹기 전에 네 기만 소환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열 기는 장족의 발전이다.
아까는 15대 4의 싸움이었는데 이제는 15대 10의 싸움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줬다.
콰콰콰쾅!!
골렘들이 벌이는 전투에 성역 전체가 뒤흔들렸다.
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골렘들의 팔다리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그러나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주변의 재료로 자신의 몸을 수복하는 게 골렘이란 존재.
싸움은 장기화 조짐을 보였다.
[바인드]한결 굵어진 나뭇가지가 징그러운 뱀떼처럼 다가오는 멀린의 바인드 스킬을 차단했다.
식물 간의 전쟁도 살벌했다.
나무뿌리들은 엉킨 채로 서로를 꽉 조여서 부러트리고 때로는 양분을 빨아먹어 바싹 말려버리는 피 말리는 광경을 연출했다.
도토리를 먹은 후 얼추 체급은 맞춰줬지만 여전히 밀린다.
비록 본체가 아닌 화신이라 할지라도 드루이드로서의 오랜 세월 쌓아온 멀린의 경험치는 방대했다.
그러니 골렘과 나무뿌리가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에 멀린을 끝장내야만 했다.
[순보]카리나에게서 배운 이동술이 오늘만큼 쏠쏠했던 적이 없다.
공기를 박차고 빠르게 놈에게 쇄도했다.
둘 간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진다.
들고 있는 천마검을 눕혀 신검합일의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끝이다.”
수평으로 그어서 놈을 끝장내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진 않았다.
천마의 다급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피해라!
순보를 써서 공중에서 방향을 틀었다.
옆으로 튀자마자 내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주먹이 내려앉았고.
굉음과 함께 지반이 박살 났다.
콰콰콰쾅!!!
고막이 먹먹하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정체불명의 주먹에 깔려 비명횡사할 뻔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공격한 존재가 무엇인가 파악했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난생 처음 보는 존재였다.
한없이 단단한 옥빛 광석이 햇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미형을 뽐낸다.
크기만 해도 7~8m.
거인족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설마 크리스탈 골렘인가?”
[눈썰미가 좋군. 네 말이 맞다. 이 싸움을 종결지을 최후의 비밀병기지.]크리스탈 골렘.
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경도가 미친 수준일 게 뻔했다.
드루이드 레벨이 높으면 이런 괴물딱지도 소환할 수 있는 건가.
[능력이 된다면 크리스탈 골렘을 뚫고 나한테 와보거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크핫하하하!!!]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멀린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광소했다.
‘크리스탈 골렘과는 싸워본 적이 없는데.’
전투 데이터가 없다 해도 당장 대안책이 없다.
이 순간에도 뒤쪽에서 내 골렘들은 멀린의 골렘에게 하나둘씩 당했고, 나무줄기 또한 점점 먹혀가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내편이 아님은 확실하다.
속전속결로 끝내야만 했다.
“하앗!!”
기합을 내지르며 에메랄드 마나소드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그대로 머리를 이등분할 계획이었다.
양팔을 교차한 골렘이 내 일격을 막았다.
쩌어어엉!!!
분명 돌 따위는 마나소드로 두부 자르듯 잘라왔는데 부스러기만 날릴 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과연 크리스탈 골렘이라 이건가.
일단 검을 뽑았으니 멈추기엔 늦었다.
도토리로 강화된 일격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쾅! 콰쾅! 쾅!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크리스탈 골렘도 연달아 얻어맞더니 여기저기 금이 생기고 신체 부위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도 저놈은 이미 이긴 셈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멀린이 킥킥대며 나를 조롱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골렘을 뚫고 나를 잡을 거야? 참고로 골렘은 핵을 부숴야 기동을 멈춘다. 핵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겠지? 크하하하!!!”
멀린의 말이 맞다.
싸우면서 계속 핵의 위치를 탐색했는데 감이 안 잡혔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소환한 골렘은 이제 다섯 기 남짓 남았고, 멀린의 나무줄기도 곧이어 날 덮칠 기세였다.
이대로 난관에 봉착하나 싶었다.
바로 그때.
의식 속에서 천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송아.
“말씀하십시오.”
-네놈이 싸우는 동안 기운의 흐름을 파악했다. 저 돌덩이의 단전이 어딘지 대충 알 것 같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입니까?”
-오른쪽 허벅지 안쪽이다.
여기서 천마님이 한 건 해주는구나.
“감사합니다.”
-인사는 나중에. 일단 저 빌어먹을 놈을 처치하는데 집중해라.
비록 화신이라지만 자신을 봉인한 자와 마주했으니 천마도 진심인 모양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핵의 위치로 짐작되는 곳에 검을 찔러넣었다.
쩌어엉!!!
그동안 단단한 몸을 믿고 대놓고 내 공격을 맞아대던 크리스탈 골렘이 처음으로 공격을 회피했다.
나는 집요하게 그곳만을 노렸고 골렘이 허둥지둥 방어에만 골몰했다.
이 장면을 본 멀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핵 위치를 파악했어? 어떻게?]멀린을 무시하고 크리스탈 골렘 공략에 집중했다.
핵의 위치가 발각된 이상 스톤이든 우드든 크리스탈이든 다 똑같았다.
아무리 크기가 커도 급소를 가리기 바빴다.
[귀찮게 하네.]멀린이 크리스탈 골렘을 지원했다.
그가 허공에 대고 손짓하자 돌로 이루어진 기다란 창 십수 개가 생성되더니 나를 향해 쏘아졌다.
스톤 컨트롤의 응용으로 보이는 기술이었는데, 창마다 마나가 흘러서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위력적이었다.
쩡! 쩌엉!
수없이 쏟아지는 돌창을 받아치거나 피하다 보니 손발이 꼬이고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여유를 찾은 크리스탈 골렘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갑자기 발악하길래 깜짝 놀랐다. 이대로 죽어라.]승기를 되찾은 멀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소환한 돌창과 크리스탈 골렘의 일격을 감당하던 나는 더는 이런 상황을 지속하는 게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어쩔 수 없군.’
뒤로 뛰어서 멀린과 그를 보호하는 크리스탈 골렘과 거리를 벌렸다.
그동안 거리를 좁히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하던 내가 오히려 후진하자 멀린의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포기했나? 잘 선택했다. 세상에는 네가 감당하기 힘든 적도 있는 법이야.]“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미덕이다. 이만 승복하고 순순히 나와 하나가 되어라. 너도 알다시피 네 승산은 제로다.]멀린은 완전히 방심한 상태.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서 리앙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던 무기를 꺼냈다.
6연발 오러블렛 리볼버.
아까워서 안 쓰려고 했는데 역시나 아이템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너도 비장의 무기를 꺼냈으니 내 쪽도 꺼내주마.”
목표는 크리스탈 골렘의 핵.
사격이야 지구에 있었을 때 질리도록 해보았다.
침착하게 표적을 겨누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긴다.
타아아아앙!!!
총성에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러 블렛은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골렘의 핵이 위치한 오른쪽 허벅지를 정확히 관통했다.
무려 오러가 담긴 총알이다.
방어가 의미 없었다.
[뭐, 뭐야?]당황한 멀린의 음성.
하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졌다.
핵이 파괴된 크리스탈 골렘은 중심부터 서서히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파사삭 부서져서 자연으로 돌아갔다.
오러불렛 5/6
남은 총탄 수는 다섯 발.
비장의 무기를 꺼냈으니 이제는 뒤가 없다.
보디가드가 쓰러져서 무력하게 노출된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끝이다. 멀린.”
타아아앙!!!!
총구가 불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