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96)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96화(96/200)
13장 부름 : 물마신 망나니
아슬란 제국.
일만 년 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미지의 나라를 처음 접한 건 북부에서 아공간 호리병을 얻었을 때부터다.
그때만 해도 아슬란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황금산을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편리한 유물을 만들어준 고마운 나라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리앙에서도 아슬란 제국의 유물은 계속 등장했다.
황혼의 대간부 탐욕은 숙련된 검사도 한 방에 쓰러트릴만한 리볼버를 사용했으며 순례자 톰은 대물저격포로 촉수괴물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오늘.
엘프의 숲에서도 고대의 유물을 만났다.
사샤의 말로는 부족 주술사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라는데, 시스템창을 통해 해당 아이템이 아슬란 제국의 고대 유물임을 확인했다.
반지의 효능은 절대방어막.
이게 말이나 되는 능력일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물론 하루에 한 번만 발동하고 시공간과 인과율을 초월하는 공격은 무효화하지 못한다는 페널티가 있긴 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공격을 ‘무조건’ 1회 막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다는 제한조건은 오히려 너무 약한 패널티가 아닌가 싶다.
또다른 패널티인 초월 공격 무효화 불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여태까지 그런 비상식적인 공격을 하는 존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에.
하물며 소드마스터도 그러한 공격은 못한다.
혹시 지지리도 운이 나쁘면 그런 존재를 만날지도 모르겠으나, 아르니아 대륙에서 그런 공격을 날릴 존재는 손에 꼽을 수준일 테니 마주할 확률은 극히 적다고 보면 된다.
황금가지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면서 우연찮게 만난 고대유물이 벌써 꽤 많다.
발견한 유물마다 그 성능과 효과가 무척이나 다양하고 괴랄하다.
도대체 아슬란 제국이란 곳은 어떤 나라였기에 이런 진보된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순례자 톰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순례자들은 평생 아슬란 제국의 자취를 쫓으며 그 유물과 유적을 탐색한다.
그런 톰이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을 터.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에게 아슬란 제국에 관해서 질문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맙다. 사샤.”
사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절대방어막 사용!’
머릿속에 아이템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떠올리자 반지에 박힌 보석에서 정체불명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기운은 무형인데다가 투명해서 오감으로 인지하진 어려웠지만 육감으로는 분명히 느껴졌다.
비단처럼 나풀대던 기운은 이내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고 피부에 착 달라붙었다.
내 생각을 읽고 저절로 작동하는 반지라니, 정말 보면 볼수록 말도 안 되는 성능이다.
좋은 아이템도 얻었다.
이제는 바깥에 나갈 차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는 더 쉬어야 해.”
“괜찮아. 다 회복했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침의 숲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지구에서는 경험한 적 없던 청량함.
엘프의 안식처는 신기했다.
이들은 인간처럼 목조건물이나 석조건물을 짓는 대신에, 나이가 족히 수천 년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에 구멍을 파고 그곳을 집으로 삼았다.
나무문을 달아놓은 집도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고 대부분은 문 대신에 사냥했던 동물의 가죽을 늘어트려서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 정도만 막아놓는 식이었다.
그조차도 귀찮은 엘프들은 질긴 이끼로 엮은 해먹을 만들고 나무 위에서 생활했다.
이처럼 엘프족이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모습을 보니 어째서 이들이 숲의 종족으로 불리는지 실감했다.
“도련님, 일어나셨군요!”
엘프 마을을 구경하기 여념이 없을 때, 내 모습을 본 시온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캠벨과 라칸, 에이든이 나를 보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뀨!뀨!”
마지막으로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던 코코가 내 품에 안겼다.
코코는 멀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마지막 순간에 녀석이 상대의 균형을 무너트리지 않았다면은 멀린은 내 정수리에 오러불렛을 박아넣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동료들을 마주하지 못했을 거다.
“귀여운 녀석.”
코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녀석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 가슴에 머리를 부비부비하면서 그르릉 소리를 냈다.
바로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시온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는데 아마 착각이겠지.
“주군,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군요.”
“심려라니요. 정상에서 벌어진 엄청난 전투를 산 아래에서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이러다가 산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라칸과 에이든이 내 손을 붙잡고 흔들며 내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안도해줬다.
바로 그때,
쩌어엉!!
“으헉!”
등 쪽에 자극이 왔다.
뭔가 싶었더니 캠벨이 빨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부여잡고 입김을 호호 불고 있다.
동시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절대방어막 발동] [쿨타임 24:00, 23:59, 23:58···]“뭐지? 부단장이 다 나았는지 확인하려고 등짝 좀 때려봤는데 왜 이렇게 등딱지가 딱딱한 거야? 거북인 줄 알았네.”
캠벨의 기습 등짝 스매싱이 절대방어막이 막아줬다.
사샤가 준 반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걸 확인했으니 소소한 수확을 거두었다고나 할까.
거친 방법으로 내 건강을 체크한 캠벨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온이 캠벨에게 핀잔을 줬다.
“벌 받은 겁니다. 캠벨.”
“하녀는 오늘도 까칠하네.”
“당신에게만 까칠합니다.”
“뀨우!!”
“이 도마뱀은 왜 또 난리야.”
코코는 멀린에게 일격을 먹인 이후로 몸통박치기에 맛 들렸는지 캠벨을 향해서 똑같이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탁!
당연하게도 캠벨의 손바닥에 허무하게 막혔다.
아직 코코는 아기용이다.
무심한 캠벨이 붙잡은 코코를 어깨너머로 휙 던져버린다.
“뀨우우우우!!!”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코코.
잠시 후에 씩씩대며 돌아오겠지.
나름 재미있게 노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아무튼 일행들도 얼추 컨디션을 회복했으니 향후 일정에 대해서 논의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번 전란을 일으킨 주범 리처드 대장로를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진지하게 말하자 다들 자세를 고쳐앉았다.
푸른매 용병단장 라칸이 말했다.
“맞습니다. 애초에 저희는 두 갈래로 나눠져서 몰티 성을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저희는 엘프 본거지를 공격해서 우두머리를 처치했고요.”
“계속 말씀하세요.”
“현재도 영주 연합군은 몰티령을 점령한 엘프군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남은 잔당들을 완전히 섬멸해야만 이번 전쟁의 진정한 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사샤에게 물었다.
“사샤, 남은 엘프들을 지휘하고 있는 자는 누구지?”
“그게···”
“내가 설명하마.”
사샤 옆에 얌전히 대기하던 아멜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저쪽의 지휘관은 스콧이란 사내다. 상당히 강한 녀석이지. 원래도 나와 호각이었는데 세례를 받은 이후로 나보다 더 강해졌다.”
“나랑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잠시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아멜리아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콧이 강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이나 엘프 기준이다. 괴물을 상대로 강약을 논하는 건 의미 없지.”
한마디로 나는 괴물이라는 건가.
칭찬과 욕을 아슬하게 넘나드는 아멜리아의 화법이다.
에이든이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봐도 로이드 자작님이 계시는 한 전투에서의 승리는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패배한 엘프에게 어디까지 인도적인 대우를 약속하느냐지요.”
에이든이 사샤를 슬쩍 보며 말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사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저는 괜찮아요. 아멜리아에게 듣기로는 현재 점령지 엘프들은 대다수 세례를 받았고 받지 않은 병사들도 인간에게 심한 행패를 부린다 들었어요. 저는 그들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샤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이제 시원하게 깨부수기만 하면 된다.
“설치해뒀던 웜홀을 타고 귀환하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남은 적을 섬멸하죠.”
“부단장, 적을 소탕하는 건 좋지만 영주연합군을 굳이 도와줄 필요 있을까? 승리하면 또 자기네 덕분에 이겼다고 으스댈 게 뻔한데.”
캠벨의 말이 일리 있었다.
가만히 듣던 아멜리아가 나섰다.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어째서지?”
“어제 스콧에게서 연락이 왔다. 리처드 대장로의 사망 소식을 숨기고 내가 대신 연락을 받았지.”
“그래서?”
“현재 너희가 따로 파견한 인간군은 포위된 채 전멸 직전이라더군. 패전을 앞둔 모양이다.”
어째 시작부터 불안하더라니.
오합지졸처럼 우왕좌왕하다가 몰티성 점령은커녕 몰살되기 일보 직전이란다.
내가 안 가면 저들은 다 죽는다.
그냥 죽게 놔둬도 상관은 없는데 차출된 농노병들은 죄가 없다.
또한 미우나 고우나 로이드 가문에 충성을 바친 봉신들이니 도와주러 가는 게 이치에 맞을 듯 싶었다.
“내일 진군하겠습니다. 전군 출정 준비하세요.”
“명을 받듭니다!!”
라칸과 에에든이 각각 용병단과 수호군을 지휘하기 위해 흩어졌다.
사샤와 아멜리아도 따로 얘기할 것이 있는지 물러났고 코코와 캠벨은 배가 고팠는지 자기들끼리 먹을 걸 찾아나섰다.
오직 시온만이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시온? 남은 용건이 있나?”
“이걸 한 번 봐주시지요.”
시온이 편지 뭉텅이를 건넸다.
“이게 뭐지?”
“도련님께서 누워계시는 동안 리처드 대장로의 숙소를 수색해서 이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내용도 확인했나.”
“읽어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도련님께서 직접 읽으시는 편이 빠를 것 같습니다.”
편지의 첫장을 뜯어서 읽어보았다.
처음에 눈에 들어온 건 질 좋은 양피지 위에 적힌 고풍스러운 글씨체였다.
그러나 보낸 사람과 내용을 읽는 순간 글씨체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to. 리처드 대장로』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소. 그쪽은 우리보다 수명이 기니 시간의 흐름을 논하기 어렵군.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하지요. 당신의 요청대로 사샤라는 하이엘프 소녀를 리앙의 노예시장으로 보냈소. 하만이라는 브로커와 줄을 댔으니 앞으로 엘프를 노예로 팔려면 그와 연락하시오.
또한 가문의 대군을 움직여서 로이드 후작력 근처에 세워두워소. 내가 후작이면 불안해서라도 전 병력을 우리 쪽으로 세워두겠지. 대장로께서는 그저 빈집을 털기만 하면 되오. 참으로 쉽지 않소?
얼마 전 몰티령을 집어삼켰다는 소문을 들었소. 축하하오. 허나 나는 대장로를 잘 알고 있소. 고작 몰티령 하나로 만족하진 않겠지.
대장로는 나와 한 약속을 잊지 마시오. 로이드 가문이 무너지면 거대한 후작령을 당신과 내가 반반으로 나누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프족의 세력도 강성해지고 나 또한 왕국에서의 입김이 강해질 테니 서로에게 이득이겠지.
자세한 조건은 로이드 가문이 무너지고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눠봅시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겠소.」
『From. 힐튼 백작』
“이것들 봐라?”
리처드 대장로와 연결된 사람이 힐튼 백작이었단 말인가.
어쩐지 엘프들이 너무 대책 없이 전란을 일으켰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장로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거슬리네.’
힐튼 백작가.
영지전 때부터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알버스 성을 둘러싸고 알력다툼을 했을 때 힐튼 백작가에서 익스퍼트의 고수 호르만을 포함한 지원군을 보내줘서 애를 먹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리앙의 보름달 시장에서는 어땠는가.
푸른 마나를 얻고자 인어의 눈물을 구매하려 했는데 힐튼 백작 부인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만약 드래곤 레어에서 얻은 황금산이 없었다면 인어의 눈물을 그녀에게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경매를 통해 정당하게 아이템을 얻은 이후에도 그녀는 계속 질척대며 곤란하게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해했다.
그런데 이 망할 백작가가 엘프족과 짜고 우리 가문의 뒤통수를 치려 했단다.
아무리 왕권이 약한 봉건제라지만 엄연히 같은 엘든 왕국의 귀족인데 이 같은 더러운 뒷수작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힐튼 백작.
이름 똑똑히 기억해두었다.
우선 엘프 사건부터 마무리한다.
이후에 여유가 생기면 힐튼 놈에게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제대로 알려주기로 결심했다.
“저는 이 편지를 읽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시온의 말.
“힐튼 백작이 같은 왕국 내 가문을 잡으려고 이종족과 손을 잡아서 말인가?”
“그도 그렇고, 도대체 두 인간과 엘프가 서로의 무엇을 믿고 이런 동맹을 맺었는지 의문이더군요. 설령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로이드 가문을 반반 나누었다고 해도 이후 두 세력은 경계를 맞대는 사이가 되었을 텐데요.”
그녀에게 멀린의 계획을 일부 설명했다.
엘프족 안위와 상관없이 그저 인간과 엘프의 공멸만을 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리처드 대장로는 힐튼 백작을 완전히 믿은 게 아니었군요.”
“당연하지. 그저 성공적으로 인간을 죽이기 위한 기회로 생각했을걸. 아마 대장로는 로이드 가문을 집어삼키자마자 힐튼 백작가도 공격했을 거다.”
엘프족의 기세는 마치 초봄에 준동하는 메뚜기 떼와 흡사했다.
모든 논밭을 휩쓸며 끊임없이 몸집을 부풀리다가 먹을 게 떨어지면 사라지고 마는 곤충 무리.
“여기서부터는 내 추측이긴 한데, 힐튼 백작 또한 리처드 대장로를 전혀 믿지 않았을 거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만 했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힐튼 백작도 엘프족을 라이벌인 로이드 가문을 처치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여겼을 거야. ”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로이드 가문이 무너졌다면 힐튼 백작과 엘프족은 반드시 충돌했을 터.
결국 엘프족과의 전쟁은 영지를 넘어서 엘든 왕국 전체로 확대되고 훨씬 많은 사상자와 희생자의 눈물을 받아낸 뒤에야 멈췄을 것이다.
“그러니 시온,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너는 왕국을 불태울 뻔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니까.”
“영웅은 제가 아니라 도련님이시지요. 저야 그저 도련님을 보필했을 뿐인데요.”
역시나 시온은 언제나 겸손하다.
그 와중에 부단히 노력하고 발전한다.
과연 시온 라이크의 주인공다웠다.
* * *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성역을 다시 찾았다.
이곳에 온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멀린과의 전투를 되새겨볼 참이었다.
“난장판이군.”
전투의 흔적은 선명했다.
정갈했던 돌바닥은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고 튀어나온 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팔다리가 잘리거나 몸통만 덩그러니 남은 골렘의 잔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아나콘다만한 굵은 나무뿌리들이 제멋대로 꼬부라진 채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시사했다.
“!!”
그래도 유일하게 멀쩡한 게 있었다.
생명의 연못은 돌무더기 사이에서 은은하게 빛을 뿌리며 고아한 자태를 자랑했다.
“생명수가 뭐길래.”
따져보면 이 모든 사태는 황금가지와 생명수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둘 중 하나만 부족했어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
도대체 샘물에 무슨 효과가 있길래 리처드 대장로는 세례식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상념에 잠겨있는 내 뒤로 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네. 아저씨.”
가만히 서 있는 내 옆으로 사샤가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사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뭐든지 물어봐. 아저씨라면 다 대답해줄 수 있어.”
“그것참 고마운 말이군. 생명수에 대해서 알고 싶다.”
손가락으로 은색 연못을 가리켰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사샤의 입이 열렸다.
“기원은 나도 몰라. 무슨 효과가 있는지만 어렴풋이 알지.”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알려줘.”
“숲과의 교감력을 대폭 늘려주는 걸로 알고 있어. 추가로 체력도 좋아지고 작은 병도 낫게해.”
“그야말로 약수로군.”
“맞아. 그래서 내가 주술사로 있었을 적에 잦은 병치레를 하던 병자에게는 생명수를 소량 먹여서 치료하곤 했어.”
“이렇게 좋은 물이 어째서 엘프들을 죽이는 독극물로 변모하게 되었을까.”
사샤가 어깨를 으쓱한다.
“어쩌면 대장로가 갖고 있던 그 나뭇가지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
사샤의 가설이 그럴듯했다.
원래라면 멀린의 영혼 조각은 황금가지 속에서 조용히 잠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숲과의 교감력을 극대화하는 생명수가 드루이드였던 멀린을 자극했고, 결과적으로는 영혼의 의지가 엘프족 전체를 잠식시키는 비극이 일어나버렸다.
“안타깝군.”
“그래도 다행이야. 그 요상한 나뭇가지를 아저씨가 가졌다고 하니까.”
“나도 리처드 대장로처럼 변할지 모른다. 불안하진 않나?”
내 질문에 사샤가 해맑게 웃는다.
“전혀. 아저씨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는걸? 대장로에게서 나던 냄새와는 아예 달라. 분명 그 나뭇가지의 주인은 아저씨였을 거야.”
주술사라서 그런가.
직감이 예리하고 날카롭다.
“그런 김에 아저씨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이지?”
“저 생명수를 좀 마셔봐.”
뜬금없는 제안이다.
“어째서?”
“몇 년간 생명수를 지켜오면서 이 기운에 친숙해졌거든. 그런데 아저씨에게서도 이 샘물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어쩌면 이 생명수가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난 이미 충분히 건강하다만.”
“그건 알아. 감기에도 안 걸리겠지. 하지만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잖아.”
엘프의 성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약수.
세례식에 사용된 물이라서 꺼림칙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든다.
한 번쯤 섭취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무엇보다 나쁜 기운이 섞여 있다면 상태이상 면역 스킬인 자정작용이 알아서 잘 걸러주겠지.
“배려해줘서 고맙군.”
“아저씨가 나한테 베푼 은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걸.”
“그래도 고맙다.”
“응.”
사샤를 뒤로하고 연못으로 향했다.
얼굴을 샘물에 갖다 대자 미세한 은색 입자가 연기를 이루며 호흡기로 흡입된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확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셔봤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함께 안쪽에서 불같은 기운이 치솟았다.
“이건!!”
더이상 말을 지속할 여유가 없다.
급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런 나를 중심으로 폭풍 같은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