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97)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97화(97/200)
13장 부름 : 말을탄 망나니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현재 내 단전에는 세 종류의 기운이 맴돌고 있다.
첫째는 북부 드래곤 레어에서 카일의 유산으로 받은 용혈. 은색 빛을 띄는 용의 피는 호전적이고 맹렬한 성격을 띄고 있다. 실질적인 총량은 가장 적지만 효율은 가장 높다고나 할까.
과거 소드 익스퍼트를 눈앞에 두고 벽에 막혀있을 때 나는 기존의 녹색마나에 용혈을 더해 익스퍼트 승급에 성공했다. 용혈은 지금도 내 몸에 맴돌며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고 있다.
둘째는 바다의 기운을 가득 품은 푸른마나다. 푸른마나의 경우는 리앙의 암시장에서 우연히 얻었던 보물 ‘인어의 눈물’에서 습득한 기운이다.
시원한 파랑색을 띄는 게 특징이며 마나의 성질은 조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당시 푸른마나는 성격이 정반대였던 녹색마나와 용혈의 소소한 마찰을 중재하며 내가 익스퍼트 중급으로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마지막이자 셋째는 바로 녹색마나.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마나다. 아르니아 대륙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마나 유저들은 이 녹색마나를 모으며 새로운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녹색마나는 다른 기운에 비해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마나 친화력만 있다면 대륙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다. 단점은 안정을 추구하는 성질이 짙어서 웬만한 양이 아니면 엉덩이가 무겁다. 수동적인 성질은 자연스럽게 발전 속도 저하로 이어진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몇몇 능력자들은 검은색의 띄는 음의 마나, 즉 어둠마나를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기도 하는데 사령술사 라울이나 악마 단탈레온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시라 보면 되겠다.
어쨌든 나 같은 경우는 흑마나에 손을 대는 대신 용혈과 푸른마나를 이용해 에메랄드색 삼원마나를 완성시켰고, 그동안 삼원마나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촉오처럼 나름의 균형을 이루며 상승 효과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오늘.
엘프의 성역에서 생명수를 마신 순간 폭포수처럼 흘러들어오는 기운이 고요하던 내면을 격하게 흔들었다.
“놀랍군.”
절로 탄성이 나왔다.
일단 맛부터 이야기하자면 도수 높은 럼주나 보드카를 마신 느낌이었다.
목넘김부터 타는 듯이 뜨거웠고 속에서도 불길이 치밀었다.
처음에는 용혈과 비슷한 기운인가 싶었는데 가부좌를 틀고 내면을 관조해보니 착각이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내가 파악한 생명수의 본질은 바로 녹색마나의 집합체였다.
안정적이고 둔한 녹색마나가 동부 대산림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거듭 쌓였고, 그렇게 형성된 농축 엑기스가 생명의 샘이었던 것이다.
“이건!!!”
삼원마나가 무너진다.
그만큼 지원군은 강력했다.
든든하게 받쳐주는 동네 형의 등장에 몸집을 불린 녹색마나가 단전 안에 있는 용혈과 푸른마나를 은근히 압박했다.
그러자 성깔이 보통이 아닌 용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요놈 봐라!?’
용혈이 잘 걸렸다는 듯 전신의 기혈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녹색마나와 충돌을 일삼기 시작했다.
콰콰쾅!!
온몬에 식은땀이 치솟는다.
가부좌를 튼 몸에서 나도 모르게 경련이 일어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샤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아저씨! 괜찮아?”
내면을 다스리는 상황이라 그녀의 목소리는 벽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말하는 듯했다.
어쨌든 지금 사샤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단전을 포함한 전체 기혈과 경맥을 진정시켜야 했다.
진땀을 쏟기를 한 시간.
예상치 못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건 바로 푸른마나였다.
첫만남 때부터 눈치 빠르고 조화를 추구했던 푸른마나가 이번에는 아예 용혈 쪽으로 가세해버렸다.
처음 흡수했을 때 녹색마나와 용혈의 정가운데 딱 웅크리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러자 삼각형을 이뤄왔던 삼원마나가 신록의 녹빛과 은푸른빛의 용혈+푸른 마나 연합 구도로 변화했다.
삼원에서 이원마나로 재편된 것이다.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은 서로를 감싸며 단전 내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양은 마치 태극과도 같았다.
‘급한 불은 껐다.’
새롭게 편성된 기운을 조심스럽게 유도해서 온몸 구석구석에 퍼트려보았다.
일시적인 평화조약이 맺어져서인지 기운들은 내 통제에 잘 따랐다.
이전보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증가한 기운들은 개선군처럼 전신의 기혈을 거침없이 확장했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통로가 생기는 긍정적인 효과도 뒤따랐다.
그간 지나치게 외딴곳에 있어서 연결되지 못했던 세맥들이 이번 내공 교통망 재정비 사업으로 빛을 보았다.
전신이 유기적으로 이어지자 잠깐이지만 내부 혈관과 장기가 다 보일 정도로 피부가 투명해졌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번쩍!!!
눈을 뜨자 전보다 훨씬 짙은 에메랄드빛 정광이 흘러넘쳤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한 단계 더 도약했다는 것을.
예전 경지가 익스퍼트 중급이었다면 현재 경지는 익스퍼트 상급, 즉 완숙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조금 있으면 최상급에 해당하는 극의에 이를 날이 머지않았고 그다음은 대망의 신세계인 소드 마스터다.
물론 목표한 곳에 도달하려면 여태껏 넘은 장애물보다 훨씬 험난하고 높은 벽을 극복해야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괄목상대할 업적이었다.
“아저씨!!”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자 사샤가 종종걸음으로 달라붙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지?”
“당연하지. 오히려 최상이다.”
“중간에 아저씨가 잘못되는 줄 알았어.”
“그럴 뻔했는데 위기를 넘겼다.”
사샤가 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댄다.
그 모습이 강아지와 똑닮았다.
“아저씨, 원래도 엄청 강했는데 또 강해졌구나.”
“어떻게 알았지?”
“기분 좋은 냄새가 더 진해졌어.”
사샤가 폭 안겨온다.
숲을 사랑하는 하이엘프에게 숲의 정기를 가득 품은 드루이드라니, 그녀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한편으로는 리처드 대장로가 행한 세례식이 얼마나 무식했는지도 체감됐다.
이렇게 자아가 강한 생명수를 엘프 전사의 극단적인 강화를 위해 대책 없이 먹여댔으니 말이다.
사샤처럼 병자들에 한해서 극미량을 조금씩 먹였으면 몰라, 대장로는 보나마나 많이 먹을수록 더 강해진다며 왕창 먹였을 것이다.
용혈과 푸른마나가 있는 나조차도 이렇게 애를 먹었는데 아무런 저항 수단도 없던 엘프 전사들은 어땠을까.
감당하기 힘든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전신의 기혈이 점진적으로 망가지고 뒤틀렸을 터.
그나마 녹색 기운이 원체 게으르고 둔한 성격이라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 용혈처럼 불같은 성정이었으면 이 정도 양을 섭취하는 즉시 몸이 부풀다 터져나갔을 게 분명했다.
“집단 세례식 전에 동부 대산림에 도착해서 천만다행이군.”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사샤가 내 말에 긍정해줬다.
“아저씨 말이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사샤.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네 계획을 듣고 싶다.”
“글쎄.”
사샤는 양팔로 다리를 감싼 채 돌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때마침 산 정상을 스치는 산들바람에 반짝이는 은발이 나풀거린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엘프의 안식처를 떠나 아저씨와 함께하고 싶어.”
“어째서지?”
“근거 없는 예감이긴 한데, 아저씨와 여행을 하면 평생 못 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것 같거든.”
주술사의 촉이 확실히 예리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 여기에 남을 생각이군.”
“맞아. 어쨌든 나는 엘프족의 주술사고 대장로가 사라진 시점에서 모든 엘프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나는 이들을 통솔하고 이끌 의무가 있어.”
보름달 시장에서의 첫만남부터 어리게만 보였던 사샤.
비록 만난 기간은 짧았으나 정신적으로 훌쩍 큰 그녀는 어느새 지도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너를 응원하마. 사샤.”
“응.”
그녀의 고운 볼가를 타고 맑은 이슬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갑자기 터져버린 그녀의 울음.
“정말···진심으로 고마워. 리앙에서부터 여기까지. 엘프족의 주술사로서도, 그리고 개인으로서도 전부.”
아르니아 대륙의 평범한 엘프 소녀.
평범하게만 태어났으면 아무 걱정 없이 해맑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텐데 운명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고 끊임없이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종족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했다. 손을 내밀어 굳게 다짐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앞으로 못 만나겠지? 엘프는 인간에게 못할 짓을 너무 많이 했잖아.”
“은거하려고?”
“우리에게 숲은 집이자 터전이니까.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대산림에 숨어서 다시는 눈에 띄지 않을게.”
이대로 엘프족이 숨으면 어떻게 될까.
영원히 엘프와 인간의 관계는 평행선을 그리겠지.
긴 세월이 지나 문명이 발전한 인간이 대산림을 개척하고 숲을 개간할 때가 되면 다시금 충돌과 갈등이 일어날 테고.
과거의 앙금은 미래의 갈등이 되어 참혹한 비극이 되풀이될 게 뻔했다.
지구에서 배운 역사대로라면 항상 그런 흐름이었다.
“사샤, 내 생각은 달라. 동부 대산림에 숨겠다는 건 오히려 비겁한 행동이야.”
내 말에 놀랐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왕방울만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히려 전면에 나서라는 말이야.”
“하지만···”
“알아. 인간은 엘프를 증오하지. 적어도 현재 몰티령 주민들은 너희를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
“아저씨 말대로 될 것 같아서 숨으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오랜 세월 진심으로 사죄하고 화해를 추구한다면 어떨까? 과연 세대를 거듭해도 여전히 너희를 싫어할까?”
이해력 좋은 사샤가 금세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시간을 투자하라는 말이구나.”
“그래. 이번 일의 주모자는 확실하게 처벌해서 인간에게 보여주고 나머지는 계속 소통하려고 노력해봐.”
“과연 될까?”
“내가 도와줄게.”
사실 이 아이디어는 조금 전 리처드 대장로와 힐튼 백작과의 편지를 보고 번뜩 떠올린 영감이었다.
두 사람은 로이드 가문을 삼키기 위해서 표면적이고 가식적이긴 할지라도 어쨌든 이종족 간 동맹을 맺었다.
욕심 많은 두 사람도 이뤄낸 동맹이니 나 또한 사샤와 이종족 간 동맹을 체결하고 싶었다.
그것도 단순한 겉치례가 아닌 진지하게 서로를 동지라 부를 수 있는 영혼의 동맹을 원했다.
“어려움도 많겠지. 아마 엘프를 향한 무분별한 적개심을 내보이는 인간들도 있을 거야. 이에 지쳐서 똑같이 이빨을 드러내는 엘프들도 있을 테고.”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해결될 문제다?”
“맞아. 엘프의 기나긴 수명은 절대적 무기니까. 인간이 망각하고 잊어갈 동안 너희가 일관적인 태도만 취해준다면 두 종족 간 평화는 반드시 오리라고 믿어.”
내 제안은 진심이었다.
만약 사샤가 수락만 한다면 몰티령에 주둔군을 급파해서 두 종족 사이를 중재해줄 의지도 있었다.
훗날 세월이 흘러 인간과 엘프가 뒤섞이기 시작하면 그조차도 필요 없게 되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아저씨 계획이 좋긴 한데 문제가 있어.”
“무엇이지?”
“엘프의 안식처부터 가장 가까운 인간 거주지인 몰티성은 너무 멀어. 오가는 데만 한참 걸릴 거야.”
사샤의 말에 피식 웃었다.
“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 내 군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잊었어?”
“···아!”
웜홀 생성기를 떠올린 사샤가 탄성을 내뱉었다.
“텔레포트 장치는 여기에 계속 놔둘게. 여분도 있어서 부담도 없고. 너희는 그저 웜홀을 이용해서 인간과 교류하면 돼.”
계획이 구체화되자 사샤가 다시금 울먹인다.
“그러면 아저씨 또 만날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여유가 되면 놀러 와. 언제든 환영이니까.”
“아저씨이이이!!!! 흐앙!!”
사샤의 눈물로 옷이 푹 젖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헤논이 엘프와의 일을 마무리 지을 무렵. 기세 좋게 진군하던 영주연합군은 완전히 궁지에 몰려있었다.
“젠장할!”
콰직!!
피엔토 자작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리치자 직사각형 탁자가 단숨에 부서졌다.
덕분에 탁자 위에 깔린 전략지도부터 시작해서 부대를 표시했던 장기말이 모조리 떨어져 바닥이 난장판이 되었다.
회의실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살갗이 베일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가장 상석에 앉은 피엔토 자작이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뗐다.
“해결책은?”
묵묵부답.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다시 억누르며 피엔토 자작이 재차 물었다.
“해결책 말이야. 내놔 봐.”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머리를 감싸 쥔 자작이 탄식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분명 초반에 로이드 자작에게 큰소리를 땅땅 치고 공격을 개시할 때만 해도 소풍을 나온 듯 신났다.
엘프 같은 야만족 따위 후딱 해치우고 영지를 나눌 생각에 모두가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당일 저녁부터 사고가 터졌다.
“엘프족 궁병들이 야밤을 틈타 기습하고 있습니다.”
주변 수풀에 교묘히 몸을 숨긴 다음 멀리서 병사들을 저격하고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지휘관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그곳을 수색하면 습격했던 엘프 궁병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자 누구도 경계근무를 서려 하지 않았고 사기가 저하되며 군 기강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여겼다.
아무리 엘프족이 야지에서 강하다 해도 결국 거점이 무너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
요새를 점령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라 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다.
“잔악한 엘프 놈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요새 공성전은 치열했다.
엘프족 전사는 숫자는 적어도 하나같이 용맹하고 무술 경지가 어마무시했다.
도대체 엑스퍼트 급 무인들이 몇 명인지 추산이 불가능한 수준.
무엇보다 단체로 마약이라도 빤듯 죽는 와중에도 인간에게 적개심을 보이며 싸우는 지독함은 상대하는 입장에서도 혀를 내두를 만했다.
설상가상으로 야밤에 기습해오는 엘프 궁수들이 지휘관만 골라 맞추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지휘관들은 병사들처럼 후줄근한 복장을 입거나 말에서 내리는 등 굴욕적인 행동을 잇달아 연출했다.
지휘 체계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갔다.
그래도 성과를 거두었다.
온갖 생고생을 하며 첫번째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오천 명이었던 병사는 삼천으로 줄고 엘프 사망자는 극히 소수인 상처뿐인 승리였지만 말이다.
여기서 영주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악마 같은 엘프 놈들. 이 여세를 몰아 모조리 말살시킵시다.”
“손해가 너무 컸어요. 이만 돌아갑시다.”
“뭐요? 당신 제정신이요?”
“당신이야말로 제정신이요? 지금 병사들 피해가 안 보입니까?”
“퇴각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수확은 없는 셈이요. 그래도 괜찮소?”
“지금 이 와중에도 몰티령을 욕심내? 제발 적당히 좀 하시오!!”
“누가 욕심낸댔소? 아군이 상당수 죽어나갔소. 이들의 목숨값도 갚지 않고 철군하면 어쩌자는 말이오? 당신이나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공격파와 후퇴파로 나뉘어져 지휘소에는 연일 고성이 오갔다.
피엔토 자작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최종 결론은 공격이었다.
이후 두번째 요새 앞 평야에서 벌어진 엘프족 본대와의 회전에서 인간군은 대패했다.
스콧이라 불리는 엘프족 지휘관의 무력은 그야말로 야차 그 자체였다.
그의 쿠크리가 번뜩일 때마다 아군 병사의 목이 짚단처럼 썰려나갔다.
피엔토 자작은 스콧을 막으려다가 왼쪽 새끼손까락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고 황급히 첫번째 요새로 퇴각했다.
삼천 병력은 죄다 도망가거나 죽어서 수백 병력뿐이었고 엘프족은 영주 연합군이 웅크린 요새를 둥글게 둘러싸고 연일 공격을 퍼부었다.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
지휘소 사기가 이 지경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해결책이 하나 있습니다만···”
부들대며 손을 올린 캉테 남작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오! 말씀해보시오.”
다들 반가운 마음에 그를 재촉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제안.
“항복은 어떻습니까?”
“에휴!”
“기대한 내가 바보지.”
“저들이 우리를 살려주겠소?”
“똥구멍이 확장되더니 아예 남성성을 상실했나.”
“뭐요? 지금 말 다했소?”
“그만!!!”
피엔토 자작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의 속마음은 이러했다.
‘쓸만한 놈 하나 없다.’
하나 같이 무능했고.
하나 같이 쓸모없고.
하나 같이 대책없다.
영주 중에 상식적인 놈 하나만 있었어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럴싸한 전략 짜는 놈 하나 없으니 오천 병력으로 고작 천오백에 불과한 엘프족에게 박살났다.
“제가 볼 때는 말입니다.”
옆에 있던 노른 남작의 말.
“자작께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으십니다.”
“뭐라?”
이제는 지휘관 탓하기인가.
한심함에 신물이 난다.
자신은 익스퍼트기라도 하지, 저들은 무력도 통솔력도 없고 작위조차 낮으면서 욕심만 많다.
“결국 저희는 자작님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결과가 좋지 못하면 지휘관이 책임을 지는 게 전통적인 관습이지요.”
“애초에 로이드 자작과 함께 일만 군대로 몰아쳤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별안간 영주들이 자기들끼리 쑥덕댄다.
그들의 희번덕대는 눈알을 보며 피엔토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사령관인 자신을 넘기고 항복하자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잠시 머리 좀 식힙시다.”
서둘러 회의를 끝낸 피엔토 자작은 성벽 위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저 너머로 엘프족의 포위망이 보였다.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틈 없이 꼼꼼하고 조밀했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겠구나.’
영주들이 자신의 목을 들고 엘프족 사령관에게 자비를 청할 게 뻔해 보였다.
엘프족 사령관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을 내릴 것도 뻔해보였다.
이번 엘프전을 겪으면서 피엔토 자작이 느낀 것은 로이드 가문이라는 우산의 거대함이었다.
로이드 가문이 아니었으면 저 살찐 돼지들이 작위를 유지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인제 보니 로이드 자작 정도면 양반이었어.’
서출이고 자시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로이드 자작은 육천 군대를 이끌고 오고 본신의 무력 또한 증명했다.
오늘날의 처참한 결과를 마주하고서야 피엔토 자작은 유능한 인물을 일부러 박대하다 제 무덤을 판 사실을 후회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이미 끝났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온다면 로이드 자작에게 손을 내밀어 보리라.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언덕 너머로 말을 탄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혼자 나타난 한 사내는 깃대를 들고 있었는데,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는 상수리나무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로이드 가문의 문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