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
“흑발 새끼…….”
어찌나 욕에 진심이 담겼는지 입술 주변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은 부조리하다. 왜, 어째서, 항상 로판의 남주인공 자리는 흑발에게 돌아가는가. 그리고 왜, 어째서, 항상 나는 갈색 머리에게 마음을 주고 마는가.
이 주식의 끝이 개털임을 알면서도 재산을 올인하는 자의 심정을 그 누가 아는가?
그중에서도 4년 전에 출간된 의 서브남 바일레온 비어스는 안타까움의 절정을 찍었다.
이름부터가 사연 있어 보이잖아. 바일레온 비어스라니. 거기다 여주인공의 소꿉친구이자 현재 제국의 재상이라니. 진짜 작정하고 만든 인물이 틀림없었다.
남주인공 안 되는 설정만 몰아넣은 만년 서브남.
아니, 어떻게 문과 재상이 철혈 공작을 이기냐고. 어떻게 바일레온 비어스를 카인 블랙우드랑 싸우라면서 등 떠밀어 내보내느냐고.
양심 있는 인간이라면 이런 짓 하면 안 된다, 진짜.
“이 원통함을 어찌하면 좋아. 아이고, 아이고……. 작가님, 아이고.”
차라리 인물에 공들이시지나 말 것을. 그럼 나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4년째 최애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집착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검은머리파뿌리 작가님은 소위 존잘이셨다. 거기에 온화한 갈색 머리를 최애로 미는 독자 1은 넘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이야기야.”
물론 역경과 고난 끝에 제위에 등극한 여주인공의 생각은 다르겠지. 여주인공 옆을 차지한 흑발 새끼에겐 더없이 완벽한 엔딩일 거고.
역시 안타까운 건 독자 1뿐이다. 당시에 같이 안타까워하던 독자 2, 3, 4님은 요즘 다른 작품의 갈색 머리를 파고 계시더라.
“장장 4년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돌잡이 때 잡으라는 물건은 안 잡고 나무 탁자를 잡았나, 싶은 한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자꾸 바일레온 비어스로 돌아오게 될까.
로판계에서 4년이면 긴 시간이다. 그간 소중한 인생작과 많은 꿀잼작을 만나긴 했다. 내 마음을 살랑살랑 간질인 갈색 머리도 제법 있었다. 무려 남주인공을 차지한 갈색 머리도 만났다.
한데 희한하게도 바일레온 비어스가 내 안에서 자꾸 맴돈단 말이지.
연어인가요?
때가 되면 물살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도 아닐진대 어째서 잊을 만하면 이 만년 서브남을 찾게 되나요.
난 묵직한 한 권의 종이책을 들어올렸다. 사무용 의자에 앉은 채 빙그르르 돌자 검은 글자가 내게로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음……. 기분 탓이겠지? 왠지 진짜로 글자가 쏟아지는 것 같은……. 아! 아야! 아! 잠깐, 이게 뭐야?”
나는 그렇게 로판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앗, 저기. 잠깐만! 나 작업물 저장을 못 했어!
◇ ◆ ◇
“저자아아앙!”
절박한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왼손 새끼손가락과 검지가 정확하게 Ctrl 키와 S 키 사이만큼 벌어진 채로 방 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났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침을 꼴깍 삼켰다.
왜…… 침대가 아니지?
상식적으로 낯선 천장이 보여야 되는 거 아닌가. 빨리 시녀가 와서 내 개인정보도 좀 알려주고. 뭐, 그래야 하지 않아?
하지만 햇볕이 잘 들어오는 방엔 책장과 아주 많은 책과 책상과 아주 큰 책상, 약간의 화분 및 액자가 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 봐도 지금은 회의 중이었다.
이 지독하게 어색한 분위기를 어쩜 좋아.
“……디디 보좌관. 손가락은 왜 그러고 있는 건가?”
세상 제일 감사합니다, 제 건너편에 앉아 계신 중년 남성분. ‘이보게’나 ‘자네’로 부르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 중에 조는 부하직원이 참 마땅치 않지요? 한심한 눈빛에서 모든 것이 느껴지네요.
응, 근데 방금 날 뭐라고 불렀지?
“피곤하면 먼저 돌아가 쉬게. 꼭 디디 보좌관이 지켜야 하는 자리도 아니니까.”
디디가 누구더라. 분명 내가 아는 이름이긴 한데. 보좌관? 누구의 보좌관이라는 거야?
문득 생각이 미치는 곳이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단축키를 누르고 있던 왼손을 슬그머니 머리 쪽으로 가져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들어올리자 보송보송한 솜사탕 색깔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오, 세상에. 맙소사. 나 이 사람 알아.
작중에서도 다소 특이한 머리 색의 소유자라고 언급되었다. 비중은 상당히 낮지만 전체회의 장면이나 상관과 의논하는 장면에서 한 번씩 등장하곤 했다.
비중 낮은 엑스트라니까 기억하기 쉬운 성(姓)인 디디.
마리엔 디디 제3보좌관. 큰 하자는 없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바일레온 비어스 재상의 수하.
“헉.”
마리엔은 충격에 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에. 나, 나, 내가 비어스 재상의 사람이 됐어! 헉, 세상에나. 이럴 수가.
아니, 그렇다는 말은.
“머리카락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부드러운 저음이 집무실에 깔렸다. 마리엔은 본능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쳐다보기가 무서웠다. 설레거나 기쁠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앞섰다. 마리엔은 이보다 느릴 수 없는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는 곳에 바일레온이 있었다.
‘와…….’
이마를 덮고 있는 아몬드 색 머리카락은 결이 좋아 보였다. 거기다 머리숱은 어찌나 빽빽하고 풍성한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 손가락에 감겨드는 감촉이 끝내줄 것 같았다. 마리엔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부드러운 느낌을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저 예쁜 눈은 또 어떻고.’
길고 탐스러운 속눈썹 사이에 자리한 눈동자는 초록색이었다. 단정한 콧날과 연분홍빛을 띠는 입술을 정신없이 쳐다보던 마리엔은 또다시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말았다.
아까와는 좀 다른 의미로 안달이 났다.
‘작가님, 수려한 미모라고만 하셨지 이렇게…… 몸이 좋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얼굴은 문학청년인데 몸은 용병이다. 용병 일이 마땅찮을 땐 대장간에서 일한다는 설정도 그럴싸하겠다. 역삼각형 상체를 따라 떨어지는 정복의 맵시가 근사했다. 팔뚝은 매달리고 싶을 만큼 실한 데다 펜을 쥔 손은 큼직했다.
남자는 역시 손이라고 생각하던 마리엔은 일 초 만에 제 생각을 고쳐먹었다.
‘잠깐만, 가슴이 되게 큰데?’
이 남자는 나랏일을 가슴으로 하나 보다. 한데 큰 것은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수하들은 앉혀놓고 재상 혼자 서 있는 까닭에 바일레온의 허리 아래가 보였다. 마리엔의 동공이 확장됐다.
허벅지.
허벅지.
……허벅지!
“디디 보좌관.”
마리엔이라고 부르세요.
제가 만약 여주인공이었다면 자신 있게 대꾸했을 것이다. 살짝 미소도 지으면서 말이다. 여주인공은 뭐든 해도 된다. 그것이 그녀의 특권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은 마리엔 디디. 서브남의 제3보좌관. 뒷배 같은 건 없다.
재상께서 참석하신 보좌진 회의 중에 졸고 만 마리엔 디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1보좌관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분께도 경례.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마리엔이 다시 자리에 앉을 땐 황실 기사단장이 울고 갈 만큼 각 잡힌 자세였다. 괜히 깃펜을 쥔 다음 뜨거운 눈빛으로 자신의 상관을 응시했다. 불타는 눈. 최애를 향한 경모의 시선.
너야 너.
오늘 동맹 결혼 주인공은 너야 너.
이 마리엔 디디가 다시 태어난 이상! 바일레온 비어스야말로 제국의 진정한 남주인공이 될 것이다!
“문제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묘하게 불편한 표정으로 바일레온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제3보좌관이 열이 나나 보다고 여기는 듯했다.
◇ ◆ ◇
“마리야.”
부푼 가슴으로 집무실을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붙었다. 처음엔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줄도 몰랐다. 지나가는 시녀 이름이 마리인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칭을 부르며 밀착한 상대가 회의 중에 눈치를 준 중년 남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상의 제1보좌관 로크만 필.
“얘, 마리엔.”
거의 속삭이다시피 마리엔을 부른 그가 자신의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위를 슬쩍 살피는 은밀한 태도에 마리엔은 조금 긴장했다.
빙의한 지 얼마 됐다고 살해 각인가요. 사람이 일하다 보면 회의 중에 졸 수도 있지. 상대를 죽이기까지 할 일인가요?
“많이 피곤하냐? 요거 하나 먹어라.”
대담하게도 황궁 복도에서 칼빵을 놓으려나 싶던 그는 반지 케이스보다 작은 통을 꺼냈다. 통 안에는 연둣빛 사탕이 들어 있었다.
독살인가.
“별로냐? 다른 맛으로 줄까? 잠깐……. 아이고, 이를 어쩌나. 서랍에 두고 왔나 보다.”
마리엔은 눈만 굴려서 복도 좌우를 살폈다. 다른 보좌관들은 이미 해산한 후였다. 다시 집무실로 뛰어 들어가서 문을 잠글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사탕은 감사하지만. 음, 필 보좌관님이 드시는 게 좋겠어요.”
책상 건너편에서 혀를 차기까지 했던 그가 이 무슨 서운한 말이냐는 양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둘만 있을 땐 삼촌이라고 불러도 되잖니.”
“삼촌……이라고요?”
뜨악하게 되묻자 로크만이 얼른 정정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넌 내 처남의 이웃집 딸의 친구니까 우린 혈연관계가 아니다만. 그래도, 그래도. 대충 삼촌이라고도 부를 수 있잖니.”
누가 호칭을 대충 불러요. 이래 봬도 저는 동방의 유교국에서 왔거든요. 그리고 엄밀히 안 따져도 혈연관계가 아니잖아. 친구의 이웃집 아저씨의 누이의 남편이면.
마리엔은 흡사 개구리를 삼킨 얼굴이 됐다.
“그냥 남이잖아…….”
로크만이 충격과 상심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순간 나이가 나이니만큼 지병이라도 도졌나 의심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마리야. 가슴이 아프구나. 삼촌은 그저 체력만큼은 남부럽잖은 우리 마리가 잠꼬대까지 하면서 졸기에.”
“설마 우시려는 건 아니죠.”
“장점이라곤 튼튼한 것밖에 없는데.”
“은근히 돌려 까기까지?”
로크만이 품에서 제비꽃이 수놓인 손수건을 꺼냈다. 눈가를 닦자 물기가 묻어나왔다. 뭐야, 이 아저씨 진짜 울어!
마리엔은 경악스러운 본심을 감추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의심스러운 사탕 삼촌은 이만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사탕 하나를 집어서 로크만에게 건네자 그가 반색하며 받아먹었다.
“오, 우리 마리가 직접 먹여주는 사탕!”
마리엔은 이어서 제 몫의 사탕을 입에 넣었다. 조심스레 어금니 사이에 끼우고는 이제 만족하냐는 뜻으로 눈썹을 들썩였다.
“일은 재상님과 삼촌이 다 하잖니. 마리 너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단다.”
로크만이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알 듯했다. 마리엔은 고장 난 인형처럼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삼촌은 이만 가보마.”
로크만이 몸을 돌리자마자 마리엔은 입안의 사탕을 뱉은 다음 뒷짐을 졌다. 그래도 정보는 빼내야지 싶었다.
“저기, 필 보좌관님.”
로크만이 돌아봤다.
“재상님은 저희 관계를 아세요?”
뱉고 보니 되게 불륜 남녀를 떠올리게 하는 대사였다. 오십 대 아저씨와 솜사탕 머리 아가씨를 엮으려는 뇌 텅텅 새끼는 죽어 마땅했다. 그게 비록 마리엔 자신이라도.
마리엔은 속으로 스스로의 뺨을 쳐서 징벌했다. 앞으로 여기서 생활을 하려면 뉘앙스에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크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입을 잘못 놀렸을까 봐 걱정하는 거냐?”
“모르신다는 뜻이죠?”
“그렇고말고.”
로크만이 늙은 삼촌 특유의 익살을 보였다. 윙크 날리지 마세요, 아저씨.
“걱정 붙들어 매려무나. 아무도 모르니까.”
“네, 그럼 가던 길 가세요.”
로크만은 소름 돋게도 힝, 소리를 내며 꺼졌다. 마리엔은 거처로 돌아가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F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