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03)
11번과 한창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데, 바일레온이 부드러운 말투로 끼어들었다.
“아는 이가 마리엔뿐이라서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하나 싶겠군요. 저기, 제 동생 클로이즈가 안내 겸 말동무를 해드릴 겁니다.”
무도회장 입장 직후 혼자 어디론가 사라졌던 클로이즈가 군중 속에서 등장했다.
그녀는 제국의 꽃 1등을 밀착 취재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바일레온의 신호를 받고 나타난 거지?’
이 남매는 이상한 순간에 서로 마음이 너무 잘 맞는다.
마리엔은 클로이즈의 기세에 “어어, 네, 어어.” 하면서 휩쓸려 가고 만 11번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대단한 클로이즈. 11번을 데려가면서 마리엔에게 인사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귀부인 무리까지 휘감아 갔다.
그렇게 바일레온과 둘만 남은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나 검은 머리로 다시 염색할까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마리엔이 연인을 홱 쳐다봤다.
“그게 무, 무, 무슨 말씀이세요? 비어스 경, 제가 큰 잘못이라도 했나요? 불만이 있으면 차근차근 얘기해보세요. 저 이래 봬도 제법 말이 통한다고요.”
“마리엔은 의외로 흑발 취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체 어떤 작자가 그런 독약 같은 이야기를 경의 귀에 흘려 넣었죠?”
이에 바일레온은 대답 대신 마리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리엔은 몇 초 후에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요? 제가요? 아니, 제 언행 중 어떤 부분이 경에게 그런 오해를 심어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마리엔은 거세게 고갯짓했다.
“전 비어스 경의 지금 머리가 좋아요. 얼마나 예쁜 갈색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머리를 검게 물들였을 때도 꽤…… 좋아하는 눈치였어요. 차갑고 날카로운 이미지가 색다르다고 했잖아요. 게다가 방금 저 남자는 만장일치로 1등이 되었죠. 그 말은 마리엔도 저 사람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는 뜻인데.”
“아이참. 비어스 경이 흑발로 염색했을 때도 좋아한 이유는요. 제가 흑발 취향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바일레온 비어스를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모르시겠어요?”
마리엔은 조바심이 났다. 그늘진 바일레온의 얼굴로 보아,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당장 염색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지나친 질투심은 결국 자기파괴를 초래한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마리엔이 흑발 미남과 웃으며 대화했다고, 바로 머리를 검게 염색하려 하다니.
“머리 색을 바꾸는 건 경의 자유지만요. 바꾸려는 이유가 제 취향 때문이라면 제발 그러지 마세요. 왜냐면 제 취향은 딱 바일레온의 지금 머리 색이니까.”
그는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한다. 둘만 있을 때 이름을 부르면 십중팔구 키스로 이어지지만, 여기는 무도회장이니까 바일레온의 기분을 풀어주는 효과만 발휘할 거다.
아니나 다를까, 연인에게 비어스 경이라는 호칭 대신 이름으로 불린 순간 바일레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니면 봄에 마리엔이 사다 준 것처럼 사나흘 만에 염색물이 빠지는 제품은 어때요? 잠깐 기분 내는 용도로 쓴다던 염색약. 그걸로 머릴 물들여볼 테니 당신의 감상을 말…….”
“왜 성질 급한 인간이 키스로 상대 입을 막는지 방금 깨달았어요.”
마리엔이 바일레온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제 마음은 비어스 경, 예쁜 갈색 머리의 비어스 경이니까 그만 확인하세요.”
“알았어요.”
그제야 바일레온이 제대로 웃었다. 눈매가 곱게 휘는, 화사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계속 마리엔에게 예쁨받을 수 있다니 안심이에요.”
마치 냉대받은 적이 있기라도 한 듯이 말한다. 마리엔 디디는 바일레온 비어스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만을 좋아했는데 말이다.
‘이 남자를 어찌하면 좋아.’
한편 마리엔은 오데트를 통해 한 자리를 차지하는 즉시, 수도에 존재하는 모든 검은 염색약을 사들여 황궁의 창고에 넣고 잠가버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폭정이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거구나.’
미인 한 명 때문에 나라가 망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그 미인을 보고 눈 돌아간 인간 때문에 검은 염색약의 씨가 마를 수는 있다.
마리엔은 부디 제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기만을 빌었다.
◇ ◆ ◇
오데트는 황태자에 책봉된 후로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해갔다. 국정 면에서는 바일레온, 국방 면에서는 카인, 사교계에선 클로이즈가 오데트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황제는 제가 그간 딸에게 저지른 짓이 있음에도, 딸이 자길 미워하긴커녕 존경한다고 고백하는 상황에 도취됐다.
다른 자녀들과 달리 늘 약간은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오데트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감동적이었을 순 있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야지……. 아니다. 이쯤 되면 판단력 문젠가?’
마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황제 놈에게는 양심이란 게 애초에 없었으니 역시 판단력 문제인 듯하다.
어쨌든 오데트는 황제의 고질병인 남 의심하는 습관을 이용해 아직 남아 있는 적을 처리했다.
이번 차례는 2황비였다.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수백 년 전 대공국(大公國)의 군주가 나온 가문 출신으로, 남동쪽 해상권을 틀어쥐고 있는 3황비의 가문을 내심 해적 집안이라고 깔보았던 그녀다.
오데트가 내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 예절 교육을 빌미로 그녀가 실신할 때까지 뙤약볕에 세워두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내궁의 다른 여자들이 하나씩 정리될 동안에도, 그녀는 여전히 제 어린 아들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했다.
어쨌든 누군가는 황위를 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 시커먼 꿍꿍이속의 오데트 로즈는 절대 적임자가 아니다.
황제는 당장에 괜찮아 보여서 오데트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생각할수록 뒷맛이 찜찜할 터다.
쟤가 정말 나를 용서했을까? 정말 과거는 묻어두기로 한 걸까?
나날이 커지는 의심이 황제를 잠식하는 날이 올 테고, 그때가 되면 어린 7황자가 황태자에 책봉될 가능성도 있다.
아직 열세 살밖에 안 된 소년의 병약함이 황제 눈엔 오히려 장점으로 비칠 것이다. 지금은 폐위되어 첨탑에 갇힌 1황자도 비슷한 이유로 황태자가 됐었지 않나.
‘병약한 게 뭐 어때서. 황실의가 있잖아. 다 죽어가던 오데트도 황태자가 됐는데, 내 아들이라고 못 하겠어. 뭐, 이런 생각이 들었나 보지.’
갑자기 2황비의 머리가 트이기라도 해서 오데트 앞에 무릎을 꿇었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오데트의 용서를 받기엔 2황비도 업보가 많다.
1황비가 주도한 세이브릴 하룬 시신 처리에 가담한 것 외에도, 어린 오데트가 어머니와 살았던 집을 불태워 모녀의 추억을 깡그리 전소시켰으니까.
아무튼 심약한 7황자는 어린 나이를 감안하여 험한 꼴 보지 않도록 미리 친모와 격리해두었다.
“다들 물러나지 못할까!”
울분에 찬 2황비가 책을 집어 던졌다. 그걸 보니 어제 시녀들에게 화병이나 가위처럼 위험한 물건은 미리 치워두라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셔가려고’ 온 근위대도 달관한 분위기였다. 근래 귀한 분들을 모실 일이 많다 보니까 자연히 익숙해진 것이다.
발악하는 황태자를 제압해야 하는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던 근위대는 이제 없다.
다들 무덤덤한 눈으로 2황비가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황비나 3황비와 달리 2황비는 체력이 많이 달리는 편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 좋아 교육이지, 우리 모자를 갈라놓고 죽이려는 게 아니냐! 아아, 오데트 그것이 황궁을 집어삼키려는 거야. 황자들이 줄줄이 썰려나가고 있어.”
“썰린 분은 없는데요. 그냥 다들 좀…… 멀리 가셨죠.”
마리엔이 중얼거리며 회중시계를 흘깃 내려다봤다.
“근데 벌써 십오 분이나 지났네. 슬슬 정리할까.”
“정리?”
2황비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무슨 정리? 네놈들은 내궁에 쳐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황비를 시해하려 함이냐?”
“왜 앞서가시죠?”
황태자 오데트의 지시로 2황비 ‘수거’ 현장을 감독하러 온 마리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해라니 말씀이 지나치세요. 제가 설명해드리지 않았나요? 어디까지나 조용한 곳에서 경전을 읽고 마음을 닦는 교육일 뿐이라고…….”
“폐하를 뵈어야겠다!”
“심신 수양에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입 다물고 당장 길을 내어라. 난 폐하를 뵈러 갈 테니까!”
“휴……. 폐하께서 최종 승인을 하셨으니까 저희가 지금 여기 있는 거겠죠?”
마리엔이 근위대에게 눈짓했다. 결국 2황비는 원작에 나온 대로 “폐하, 억울합니다!”를 외치면서 근위대에게 질질 끌려갔다.
마리엔은 점점 멀어지는 2황비의 뒤통수에다 대고 손을 흔들었다.
“살펴 가세요.”
황후는 잿빛의 궁에 유폐당했다. 1황비는 변경으로 노역하러 갔다. 3황비는 빈 땅콩이 된 아들을 친정 도움으로 구출해보려다가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황제는 인척을 다수 잃었다.
아, 인척만 잃었나? 형제도 잃었다. 어린 오데트를 궁 밖 별저에 가두고 24시간 감시했던 황제의 친동생 하버스타인 공작도 1황비와 같이 엮여서 작위를 박탈당했다.
그간 하버스타인 공작이 암암리에 저지른 악행이 상당하다. 공작령 사람들이 그렇게 호소할 때는 꿈쩍 않던 황제가 갑자기 처벌을 내린 이유는 역시 1황비의 편지 때문일 것이다.
나쁜 놈은 맞지만 황명을 거스르지 않는, 그나마 의지할 만한 친동기였는데.
황제는 그런 동생의 작위를 빼앗고 재산을 몰수한 데다 내년 봄까지 웬 오두막에 가택연금을 시켰으니, 하버스타인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만하다.
제가 당한 이유를 알고 나면 허공에 대고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외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하나씩 정리가 되네.”
마리엔은 주인들이 사라져 조용해진 내궁의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자 깜찍한 소망이 비눗방울처럼 보글보글 생겨났다.
오데트가 황위에 오르면 귀족 자제 중에서 후궁을 뽑아야 한다.
후궁은 여든두 명까지 가능하다고 들었다. 이 여든두 명은 정식으로 후궁 명부에 이름을 올린 이들을 뜻한다.
물론 황제가 원한다면야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정부에게도 황궁의 방 한 칸을 내줄 수 있다. 그런 식이라면 무한대다.
“무한대.”
실로 가슴 뛰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올해 제국의 꽃 선발대회 특별심사위원이자 클럽 블루밍 전용구역에서 진행된 노예 경매까지 섭렵한 이 마리엔 디디가……! 후궁 선발을 맡게 된다면 어떨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한번 가정해보는 거다. 꿈꾸는 건 자유니까.
마리엔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오데트의 심미안을 충족시킬 최고의 꽃들로 이곳을 채우겠다고 다짐했다.
누군 네 후궁 뽑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신나냐고 핀잔할지도 모른다. 미남 선발대회 심사석에 안 앉아본 사람은 모른다.
“저 많은 미남 중에 누굴 뽑을까 고민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데!”
넓은 내궁의 방마다 다른 타입의 미청년이 살고, 그들이 일제히 제게 인사하는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오르는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