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05)
마리엔은 탄성이 새어나올 뻔해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거울 속 퀭한 제 모습을 마주하고 충격에 사로잡혔을 황제에게 ‘아, 그거 기분 탓이 아니고 사실이야. 당신 늙었어. 한물갔어.’ 친절히 확인사살을 해주다니.
과연 칼을 빼 들면 무라도 써는 게 아니라 피를 보고야 마는 오데트다웠다.
“어젯밤에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쳤죠. 비바람이 얼마나 몰아치던지 창문이 덜컹거려서 저도 몇 번이나 깼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노역 중인 1황비가 떠오르네요. 그녀가 편지에 이렇게 썼던가요. 지금도 쏘른 홀에서 도장을 쿵쿵 찍어댈 그 남자는 폭풍우가 치는 밤이면 누렇게 시든 고춧잎처럼 흐느끼며 제 침대로 찾아올 망령을 두려워한다고.”
오데트가 시간 끌 것 없이 곧장 맹공격을 퍼붓자 황제는 멍하니 딸을 쳐다봤다.
사람이 갑자기 후려 맞으면 저런 얼빠진 표정을 짓게 되나 보다.
“행색이 말이 아니세요, 폐하. 혹시 어젯밤에 폐하께서 죽인 망자들이 천둥 번개를 타고 폐하의 꿈속으로 내리꽂히기라도 한 건가요?”
“그게, 그게 무슨 망발이냐.”
“전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이었나 보네요.”
오데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어머니도 만나셨어요?”
“너도 잠을 설친 모양이구나. 다짜고짜 찾아와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온전한 모습이시던가요? 그럴 리 없을 텐데.”
오데트는 황제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선득한 그 표정은, 황제가 밤새 식은땀을 흘리도록 만든 꿈속의 여인과 닮아 있었다.
오데트는 담담한 어조로 하만 왕국의 풍습에 관해 이야기했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의 시신을 제대로 거둬주지 않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황제는 그런 건 죄다 미신이라고 일갈하면서도 손수건을 꺼내 연신 이마를 닦았다.
“폐하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듯하시니, 더는 지체 않고 말씀드릴게요. 오늘부터 저와 비어스 재상에게 국정을 맡긴다고 하셨죠. 한데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참에 양위 조서를 쓰시는 거예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고요. 폐하께서도 아시잖아요.”
오데트는 황제 앞에 종이를 들이밀었다.
“때가 됐다는 걸.”
“양위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
황제가 노발대발하며 펜과 종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늙은 남자의 마지막 발악 같았다.
오데트는 이래서 말 안 통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피곤하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쏘른 홀을 거닐었다. 흡사 산책이라도 하듯 여유로운 모습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황제와 대비되었다.
“오데트, 네 아버지는 황가에서 태어나선 안 됐어. 그냥 먹고살기 어려움 없는 집에서 태어나 성악가가 되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이의 군주로서의 자질이 노래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더구나. 왜냐면 히센은 정말 황위를 간절히 바랐거든. 황가에서 황자로 태어난 까닭에 가장 높은 자리밖에 염원할 수 없었던 거지.”
오데트는 이번엔 어머니 세이브릴이 했던 말을 무기로 꺼내 들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옛 남자의 무능함을 진심으로 딱하게 여기는 말에 황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곧 평정심을 잃었고, 오데트는 상대가 약점을 보이자마자 그곳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폐하, 언제까지 유능한 신하에게 기생하며 그 자릴 지키시려고요. 슬슬 벅차지 않으신가요? 당신 스스로 물러날 기회를 드릴 때 잡으세요.”
대놓고 넌 기생충이라 욕한 거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씨근덕대며 반박을 하려다가, 이내 밀려드는 참담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침통한 목소리에서는 짙은 비애가 묻어났다. 내버려두면 당시엔 그게 옳은 길인 줄 알았다는 둥 자기도 후회한다는 둥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어놓을 기세다.
비루한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오데트가 바로 되받아쳤다.
“이런 날이 뭔데요? 폐하 스스로 양위 조서를 쓰는 날? 아버지를 용서한 줄 알았던 딸에게 조롱과 위협을 당하는 날? 역시 저 애를 어미와 함께 죽였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는 날?”
오데트의 표정은 더없이 싸늘했다.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일을 예상했지만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비련의 군주 행세라도 하고 싶으신지?”
“너…….”
“인정하세요, 폐하. 당신에겐 그만한 통찰력이 없어요. 소위 큰 그림을 보지 못하시잖아요. 그러니 제가 계획한 대로 1황자를 폐위하고, 내궁의 주인인 황후를 유폐하고, 이어서 두 황비와 2황자를 험지로 노역 보내셨죠. 폐하를 위해 번거로운 일을 도맡았던 친동생의 날개도 꺾으셨고요. 얼마 전엔 하나 남은 황비마저 황궁에서 쫓아내셨지요. 그들은 제게 원수지만 폐하께는 아군이었어요.”
오데트가 한 걸음 다가서자 황제가 어깨를 움찔했다. 체구든 완력이든 그가 딸보다 압도적인데도 그랬다. 기세에서 밀린 것이다.
“제가 폐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그들을 버리라 위협했던가요? 아뇨. 저는 그런 적 없어요. 고질병인 의심과 불안 때문에 당신의 수족 같은 그들을 잘라낸 이는 다름 아닌 폐하 본인이세요. 수십 년간 지속해온 명문가와의 혼인 동맹을 단칼에 쳐낸 이는 당신이라고요.”
황제의 얼굴근육이 제멋대로 실룩거렸다. 오데트의 말을 부인하고 싶지만 어느 하나 틀린 구석이 없는 까닭이다.
오데트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고는 또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더.
황제는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딸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치 오데트가 품속에서 단검이라도 꺼내 들고는 자진하라며 제 앞에 던질까 두렵다는 듯이 말이다.
‘오데트가 네놈을 그리 쉽게 보내줄 것 같아?’
마리엔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 남자는 아직도 자기 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거기 밖에 누구…….”
“아무리 소리치셔도 근위대는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오데트가 황제의 말을 싹둑 잘랐다.
“지금 밖에 있는 근위병들은 제가 도착하기 직전에 앞 근무조와 교대한 이들로 전부 북부 출신이거든요. 네, 저들의 가족과 친구가 블랙우드 영지에 살고 있죠.”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냐?”
“글쎄요. 제가 폐하를 어떻게 할 것 같으세요?”
오데트는 일부러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황제의 머릿속에 온갖 비참한 상황이 떠오르다가 잿더미처럼 스러질 때까지 여유를 갖고 기다렸다.
“내게 치욕을 주려거든 차라리, 차라리…….”
황제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오데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죽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시겠나 봐요. 그렇게 죽음이 두려우신 분이 다른 사람은 잘도 죽였군요.”
오데트는 아까 황제가 바닥에 내던진 펜을 주워 그의 책상에 놓았다. 조서를 쓸 두꺼운 종이도 새로 꺼냈다. 혹시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가면서 하라고 유리잔에 물까지 따라서 옆에 놓아주었다.
사정 모르는 이가 보면 아버지를 살뜰히 챙기는 딸처럼 보일 것이다. 이 역시 오데트가 의도한 바였다.
과거에 그리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여기서 떨고 있지 않을 테고, 진심으로 아버지를 위하는 딸도 허상이 아닐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1황비에게 했던 약속을 폐하께도 똑같이 해드릴게요. 폐하를 절대 쉽게 보내드리지 않겠다고요.”
오데트가 서늘하게 웃으며 손끝으로 펜을 가리켰다.
“얼른 쓰세요.”
“어차피 네가 바라는 건 황위이니 그냥 황태자에게 양위한다는 말만 쓰면…….”
쾅!
황제의 옆에 서 있던 오데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황제는 말 그대로 숨이 멎을 만큼 기겁했다.
“이 상황이 되고도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시려고요? 두 번 말씀 안 드릴 테니 똑똑히 들으세요. 폐하께선 누가 듣든 얼굴을 찌푸릴 만큼 비열하고 잔인한 짓을 저지르셨어요. 돌이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죠. 그게 당신이 쓰실 조서에 들어갈 내용이에요. 저는 그 조서의 사본을 이웃 나라에 보낼 예정이고요. 하만 왕국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 아인펠 왕국까지 널리널리, 당신의 지난 악행이 퍼지도록 할 테니까.”
오데트가 몸을 숙여 황제와 시선을 맞췄다.
“제대로 써. 그러지 않으면 폐하께서는 플뢴베르츠의 작은 별장으로 요양하러 가시게 됩니다. 듣자 하니 제국에서 벼락이 가장 많이 치는 곳이라네요.”
“…….”
“달래드릴 1황비도 없는 그곳에서 긴긴밤을 어찌 보내시렵니까. 피눈물 흘리는 제 어머니의 망령만이 폐하와 함께할 텐데요.”
황제의 붉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았다. 한동안 말없이 펜만 움직이던 그가 어느 순간 입을 뗐다.
“넌 어떤 황제가 될 참이냐?”
중년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경외하는 황제가 되고 싶었다.”
“실패하셨네요.”
“……그래. 애초에 달성이 어려운 목표였지. 그래서 네게 묻는 거다.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너는 어떤 황제가 되려 함이냐고.”
“다음에 쓸 문장이 생각 안 나시면 그냥 입 다물고 고민하세요. 해보지도 않은 아버지 노릇 하려 들지 마시고요.”
오데트는 틈만 나면 감상에 빠지려는 황제를 단칼에 쳐냈다. 그러다가 벽에 걸린 제국의 국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 어머니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황제가 될 겁니다.”
구부정하게 앉아 책상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황제.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국기를 쳐다보는 오데트.
이를 지켜보던 마리엔의 옷 안쪽으로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전율과 희열의 정도로만 따지면 바일레온에게 고백을 들었을 때보다 더 짜릿했다.
‘앗, 이러면 최애가 바뀐 건가?’
마리엔은 흠칫했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최애가 바뀐 것은 아니다. 자신의 최애는 여전히 바일레온 비어스다. 그의 모든 점이 좋다. 사람들이 그의 단점이라고 일컫는 부분까지도 마리엔 제 취향이다.
반면 원작 여주님은 뭐랄까. 그녀의 모든 점을 좋아하기에는 오데트는 여전히 좀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람이 일단 내 편이니까 신나는 거지.
마리엔은 참담한 얼굴로 새 양위 조서를 적어 내려가는 황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이제 볼 거 다 봤다. 저는 다시 황태자궁으로 돌아가 흐트러진 머리나 빗고 귀엽게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로 오데트를 맞이할 예정이다.
내일 아침에 재상 바일레온이 각부 대신과 귀족들 앞에서 조서를 낭독하고 나면 오데트는 진짜 이 제국의 황제가 된다.
‘황제! 크으…….’
마리엔은 생각만 해도 짜릿해지는 두 글자에 주먹을 꼭 쥐었다. 제가 미는 주군이 황제가 되다니. 제가 키운 딸이 황제가 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뿌듯한지 모르겠다.
‘이따 백작저에 돌아가면 즉위식 때 입을 드레스나 골라야지. 어머, 이렇게 말하니까 꼭 내 즉위식 같네. 아하하, 오데트의 즉위식.’
마리엔은 어두운 비밀 통로를 걸으며 소리 죽여 웃었다. 빈방의 거울을 밀고 나오자 아까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참. 황태자궁의 내 집무실에 적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자리를 옮기게 생겼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새침한 표정으로 혼잣말하던 마리엔은 이내 은방울꽃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적응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마리엔은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