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11)
“제 학생기록부를 좀 볼 수 있을까 해서요.”
“후, 후작님의 학새, 생기록부를요.”
교감은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는 데에 실패했다. 누가 들어도 티 나게 말을 더듬어버린 것이다.
상사의 실수에 교무처장이 어깨를 움찔했다. 여자기숙사 사감은 애써 못 들은 척 넘기려 했다. 5학년 주임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까지는 미처 보지 못했다.
마리엔은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은 마음에 설명을 덧붙였다.
“네, 5년 치 기록 전부요. 재상부에 제출한 자료에 제 성적은 다 기재되어 있는데 담임 평가는 1학년 때 기록밖에 없더군요.”
“아아, 담임 평가는 본인에게 유리한 기록만 낼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5학년 주임이 교감 대신 대답했다. 지도하는 학생 중에 재상부 공무원을 목표로 하는 이가 많아서 알고 있단다. 마리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요. 아무튼 제 기록을 좀 열람해도 될까요? 가능하다면 1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뵙고 싶어요.”
“다, 담임을요.”
교감이 또다시 말을 더듬었다.
“네, 여쭤볼 게 있어요.”
“1학년 때 담임만 필요로 하십니까?”
“어…….”
마리엔은 말끝을 흐렸다. 일단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왔는데, 다른 사람은 만날 필요가 없냐고 물으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우선 담임 평가를 다 보고요. 의문점이 생기면 해당하는 분을 뵙도록 하죠.”
5학년 주임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마리엔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놀랐다.
“많이 더우신가요?”
“예? 아, 아뇨. 아닙니다. 제가 원래 땀이 많은 체질이라 겨울에도 땀을 흠뻑 흘리곤 한답니다. 예에.”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시는데요.”
“정말 괜찮습니다.”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마리엔은 자기가 직접 기록부를 가져오겠다며 일어서는 교무처장에게 눈길을 주었다.
내키지 않는 저 표정을 보면 그녀가 온전한 기록부를 가지고 올지 의심스러웠다.
“교무처장님, 기록부 위에 실수로 잉크를 쏟거나 하진 않으실 거죠?”
순간 교무처장의 스텝이 꼬였다.
“아하하, 그럴 리가요.”
“그쵸.”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교무처장이 귀빈실을 나갔다. 그러자 여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휴고가 마리엔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남몰래 전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마리엔은 제게 쏟아지는 불안한 시선들을 뒤로한 채 휴고에게 다가갔다. 그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교무처장을 제외한 세 명 모두 후작님을 어느 정도 아는 인물입니다. 아마 재학 당시 인연이겠죠. 후작님께선 저들이 기억 안 나십니까?”
휴고 본인 입으로 위장잠입 임무를 여러 번 수행했다더니 행동 분석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이야.
그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한 지 3년도 더 지났잖아요. 가물가물해요.”
“……그 나이에 벌써 가물가물하시면 어떡합니까.”
마리엔 저는 올해 초봄에 빙의했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소파에 앉아 있는 저들과는 초면이다.
그러나 솔직히 털어놓을 순 없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핑계를 댔는데, 희한하게도 그 말을 뱉은 순간 단편적인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집에 별고는 없고? 듣자 하니 요즘은 집엘 통 안 간다더구나. 2주에 한 번씩은 주말마다 집에 갔었잖니. 가만 보자……. 이모네가 케스타냐 구에 사신댔지?”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 들러라. 내게 털어놓기 좀 그러면 우리 아카데미는 외부 전문가 상담도 지원하니까, 응?”
“성적이 떨어져서 혼내려는 게 아니야. 네 성적은 꾸준히 낮……. 크흠, 그냥 확인차 불렀다. 갑자기 애가 말수도 줄고 학급에서도 겉돌고. 물론 5학년이 힘든 시기긴 하다만…….”
또 이러네.
다른 사람과 대화 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에도 마리엔은 더는 당황하지 않게 됐다.
마리엔 디디 하면 적응력 아니겠나. 혼란스러워하는 건 두세 번이면 족하다. 이러는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 제국 아카데미에 온 것이기도 하고.
오히려 제대로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휴고, 질문.”
“말씀하세요.”
“나쁜 사람들은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왜 저렇게 긴장할까요? 졸업생이 증명서 떼러 찾아오는 일은 흔하잖아요.”
“글쎄요.”
휴고가 턱을 문질렀다.
“쉽게 생각하면…… 1학년 이후의 담임 평가란이 형편없나 보죠. 문제가 많은 학생입니다,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회에 진출한 후가 심히 우려됩니다.”
마리엔이 휴고를 찌릿, 흘겨봤다.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예시를 늘어놓는 게 아닌지.
“그래서 내가 보복이라도 할까 봐?”
“후작님께선 본인이 얼마나 높은 자리에 계신지 아직 실감이 안 나세요?”
휴고가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의 최측근이시잖아요. 후작님의 한마디에 한 가문이나 조직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마리엔이 반박했다.
“폐하께서 날 총애하긴 하셔도 사리 판단이 누구보다 분명하시거든요? 막, 함부로 멸문시키는 폭군이 아니라고요.”
“방금 말씀은, 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휴고가 두 손을 들고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여하튼 예전에도 느꼈지만, 표현 하나하나가 정말…… 과감하세요.”
“뭐가요. 폭군이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나 보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흠칫했다.
“아니면 멸문?”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학생기록부 가져왔습니다.”
교무처장이 품에 서류철을 안고 들어왔다.
“어머, 자료 왔다.”
마리엔은 발랄한 걸음으로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마리엔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담임 평가를 읽는 동안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갔다.
“흠.”
마리엔이 보기에 4학년 때까지는 평가가 일관적이었다. 명랑, 쾌활, 사교적, 다소 산만한 주의력.
문제는 5학년 때였다. 생각이 많음, 음울함, 조용함, 때때로 놀라울 만큼 어른스러움, 속내를 숨기는 성향.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온 휴고가 마리엔의 어깨 너머로 평가란을 읽었다.
“이 정도면 거의 다른 인격이라 봐도 무방한데요.”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주임이 말 한번 잘했다는 양 휴고를 가리켰다. 그러자 휴고가 대꾸했다.
“보아하니 주임님이 이 평가를 작성한 당사자 같군요. 리셰른 후작님께선 오늘 보복하러 오신 게 아닙니다. 하니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시죠.”
주임의 얼굴에 순간 괜히 끼어들었다는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안타깝게도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디디는…… 아, 후작님께선 새 학년 새 학기 적응을 순식간에 끝냈거든요. 학급에 밝고 쾌활한 학생이 있으면 담임으로서도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월하게 3월이 지나갔는데요.”
마리엔이 이상해진 것은 4월 둘째 주쯤이라고 했다.
“룸메이트의 말에 의하면 머리가 아프다며 주말 내내 잤다더군요. 식사도 거르고 죽은 듯이 잤답니다. 한데 월요일 아침이 되어도 못 일어나기에 룸메이트는 여기 사감 선생을 부르러 갔지요.”
여자기숙사 사감이 말을 이어받았다.
“제가 후작님을 4년간 봐왔거든요. 아주 살갑고 귀엽고, 그리고 튼튼한 학생이었지요. 그런데 눈을 뜬 후작님은 절 기억 못 하시더라고요. 저만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선생과 친구들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셨어요.”
“당혹한 사감 선생이 교감실로 들어서던 게 기억납니다.”
교감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후작님께서 계속 이건 꿈이야, 꿈이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말이 돼? 이 말만 반복하신다면서…….”
“갑자기 죄송하지만요, 후작님. 오늘 뵌 후작님은 다시 새내기 시절로 돌아간 듯하십니다. 아아, 물론 좋은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밝아진 모습이 훨씬 보기 좋으세요.”
◇ ◆ ◇
이후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사가 진행됐다.
그래서일까. 협조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떠나려는 마리엔을 교감이 붙잡았다.
그는 모처럼의 모교 방문이니 시간만 괜찮으면 교정을 거닐다 가라고 권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후작님께선 비어스 재상님과 가까이 지내신다면서요.”
교감은 마침 5학년들이 저기서 검술 수업을 받고 있다며 그쪽으로 마리엔을 끌었다.
“재상님은 우리 아카데미가 배출한 최고의 인재이시지만.”
교감이 한숨을 작게 쉬었다.
“졸업 후로 한 번도 모교를 찾으신 적이 없답니다. 물론 재상의 책임이 막중하시니 저도 이해합니다만 뭐랄까. 그래도 한 번쯤은 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재학생들 앞에서 내심 자랑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뜻이다.
그에 반해 마리엔은 새 황제 밑에서 초고속으로 승진하자마자 아카데미를 찾아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내궁 총책임자라니. 폐하의 후사가 우리 후작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습니까.”
마리엔을 가리키는 호칭은 어느새 ‘우리 후작님’으로 바뀌었다.
“하하, 너무 거창하게 말씀하시네요.”
“사실인걸요. 중요도로 따지면 재상님 못지않은 자리입니다.”
교감은 검술 수련장의 학생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말인데 저 남학생들 참, 건장하지 않습니까? 용모도 아주 준수하고 가문도 좋고 재능 또한 넘친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익숙한 흐름이다. 마리엔은 교감이 저를 붙잡은 이유를 깨달았다.
“교감선생님.”
“예, 후작님.”
“쟤들 아직 미성년이잖아요.”
“……그, 그렇습니다만.”
“선생님은 이 아카데미의 교감이시고요.”
“저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잖습니까. 폐하와는 겨우 네 살 차이입니다. 부부의 연을 맺기 가장 좋은 나이 차가 네 살이라는 말도 있는데…….”
“두 달이 남았든 하루가 남았든 애들은 애들이죠? 제가 미남을 꽤, 상당히, 많이 밝히긴 해도! 애들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압니다.”
마리엔은 생긋생긋 웃으면서 도주로를 확보했다. 눈치 빠른 휴고는 벌써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여하튼 즐거운 산책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 어어, 어, 후, 후작님! 후작님!”
“내년에 다시 얘기하자고요오!”
마리엔의 모교 방문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 ◆ ◇
“디디.”
원칙상 리셰른이나 후작이라고 불러야 맞으나 오데트는 황제다. 뭐라고 부르든 오데트 마음이다.
설령 그녀가 저를 똥강아지라고 불러도 마리엔은 냉큼 대답해야 했다. 어차피 일광욕실 안에는 오데트와 마리엔 둘뿐이었다.
“넵.”
“책을 낭독해주렴.”
“네, 알겠습니다.”
마리엔은 눈두덩에 올려둔 오이 조각을 접시에 내려놨다. 테이블 위엔 오데트가 가져온 책 네 권이 있었다.
“폐하, 어느 책을 읽어드릴까요?”
“하만 왕국의 은밀한 전승 의식.”
“제목 좋네요. 은밀한.”
이에 오데트가 물었다.
“비어스 재상 앞에서도 그러니?”
“야한 거 좋아하는 취향 안 감추냐고요? 당연하죠. 솔직함이 제 매력이랍니다.”
오데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역시 오데트도 동의하는 것이다. 마리엔은 저 좋을 대로 생각했다.
하만 왕국에는 어떤 은밀함이 있으려나. 흥미 가득한 얼굴로 책을 펴는 마리엔의 귀에 오데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비어스가 좀 괴롭겠구나.”
“……어째서요?”
“토끼 같은 연인이 야한 소리를 해대는 상황에서 신념을 지키기란 힘들 테니까.”
마리엔은 말갛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신념이요?”
“비어스가 말 안 하던가?”
오데트는 대답 대신 또 혼잣말했다.
“말을 안 했다면 그새 마음을 바꾼 거려나…….”
오늘 폐하는 다소 심술궂으시네. 뭐 언제는 안 그런 날이 있었냐만.
오데트가 바일레온의 옛사랑으로서 슬쩍 흘리는 ‘너 이건 모르지?’ 유의 정보에 마리엔은 입술을 꾹 오므렸다.
참으면 된다.
실컷 놀리고 나면 얘기해줄 거다. 오데트는 늘 그랬다.
“내가 알기로 비어스 재상은.”
저거 봐라. 결국엔 알려주지 않나. 마리엔은 뚱하니 오데트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혼전순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