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13)
“폐하.”
마리엔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말을 이었다.
“왜 한 번 정도는 발뺌해보지 그랬냐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말수가 적고 음침하다. 딱 그 문장에 꽂히셨다는 거죠.”
직감에만 의존해 판 함정이었다. 그 부분에 꽂히지 않았다면 밀서를 불태웠을 거라고 오데트도 말했지 않나.
“제가 좀, 섣불렀네요.”
“다음엔 한 번쯤 버텨보렴.”
“네, 그래야겠어요.”
“내 앞에서는 말고. 혹여 다른 사람에게 추궁당하게 되면 말이야.”
오데트는 제가 그리 말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난 이미 네 뒷조사를 마쳤으니까.”
“아하.”
마리엔이 방긋 웃었다.
“증거 수집을 마친 뒤의 추궁이네요. 그럼 그렇지. 냅다 자백한 제 판단이 옳았어요.”
“그렇게 단순하게 좋아할 일인지…….”
“좋고말고요. 제가 아는 폐하라면 심문 대상이 발뺌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간 수집한 증거를 여기 일광욕실에 갖다 놓으셨을 테니까요. 제게 낭독시키신 저 책처럼요.”
오데트가 입을 다물었다. 마리엔은 그저 해맑게 기뻐했다.
“폐하께선 이틀 전의 제 행적까지 아시겠네요. 하사하신 마차를 타고 제국 아카데미에 다녀온 거요. 사실 저 역시 원래 몸 주인에 관해 조사하던 중이랍니다. 근데 폐하께서 증거 수집을 마치셨다니!”
마리엔은 작게 손뼉을 쳤다.
“제가 이리저리 뛰어다녀봤자 폐하의 정보 수집력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그래서 말씀인데…….”
마리엔은 고이 모은 두 손을 턱 아래 갖다 대었다.
“수집하신 증거를 제게도 보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어요.”
말없이 마리엔을 응시하던 오데트가 몸을 움직였다. 마리엔은 자료를 둔 위치만 알려주면 제가 가져오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유, 절 시키시면 되죠. 귀한 옥체를…….”
“여기 의자 아래에 놔뒀거든.”
오데트는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의자 커버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마리엔은 “아아.” 하고 납득하며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데트가 끄집어낸 서류철은 척 보기에도 두꺼웠다. 마리엔은 분명 양질의 정보가 가득하리라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이자 무려 이 세계관의 여주인공인 오데트가 수집한 자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괜히 아카데미까지 가는 게 아니라 곧장 오데트를 찾아올 걸 그랬다.
‘의도치 않게 선생님들만 겁줬네.’
마리엔은 자료를 받아 들기 위해 두 손을 뻗었다. 순순히 건네주나 싶던 오데트가 돌연 마리엔을 흘겨봤다.
“후작은 내 행동 패턴을 꿰고 있군.”
“뭐가요? 아, 그보다도 저 아직 후작이에요?”
그럼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인가. 노역장 엔딩을 맞이하지 않고 사백사십만 골드를 실제로 만져볼 수 있으려나.
“내가 증거를 여기까지 갖고 왔다는 거 말이야.”
“네, 폐하께서 하실 법한 행동이죠. 근데 그게 왜요?”
나 아직 후작이다. 다행이다. 신난다.
그런 생각이 앞선 나머지 말갛게 되묻고 만 마리엔은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운 장밋빛 시선을 마주한 순간 얼른 현실로 돌아왔다.
“저한테 파악당해서 기분 나쁘시구나.”
“그리고 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는 고약한 녀석이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폐하.”
“누구 맘대로?”
마리엔은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되도록 웃었다.
“내가 비어스인 줄 아니? 웃으면 다 되게?”
“제 충직함만은 진짜랍니다. 그러니까 자료 좀 보여주세요, 폐하아. 저 팔 떨어지겠어요.”
오데트는 어디 팔이 진짜로 떨어지나 두고 보자며 서류철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새 제 팔이 아파졌는지 마리엔에게 떠넘기듯이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마리엔은 빙의 전 마리엔 디디의 행적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놀랍게도 오데트의 조사관들은 죽은 마리엔의 친부모에 대해서까지 상세히 조사했다.
무려 10여 년 전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당시의 이웃을 찾아가 증언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들은 마리엔의 이모, 모리츠 부부에게도 자연스럽게 접근해 정보를 빼냈다.
모리츠 부인의 말에 따르면,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하던 조카가 돌연 제국 아카데미를 가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렇게 결심한 이유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더란다.
그쯤 하여 마리엔은 혼자만의 비밀을 많이 만들곤 했는데, 사춘기가 시작됐다고 여겨 존중해주었단다.
마리엔 디디가 재상부 제3보좌관으로 채용되어 황궁으로 떠나기 전날 저녁에 남긴 당부: 다락방의 낡은 나무 트렁크를 절대 열지 말 것. 이후에 마리엔 본인이 찾아왔을 시만 전달할 것.
마리엔은 맨 마지막에 첨부된 자료까지 확인한 후에 황갈색 커버를 덮었다.
“왜 다락방의 트렁크 속 내용물에 관한 조사 결과는 없나요?”
“마리엔 본인이 찾아왔을 시에만 열어보랬다지 않니.”
“설마 진짜 그 이유 때문이에요?”
오데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언제든 너를 이모네 집으로 보내면 될 일이야. 며칠 빨리 알자고 민간인의 가택을 뒤지게 하는 건 황제로서 못 할 짓이지.”
“이상한 데서 도리 찾으시네요. 이모 부부한테서 뽑아낼 정보는 다 뽑아놓으시고…….”
오데트가 찌릿, 눈을 흘겼다. 마리엔은 제 입을 때려서 스스로 벌하는 시늉을 했다.
“여하튼 네가 원래 몸 주인이 아니라면 진짜 마리엔 디디는 다른 곳에 가 있겠구나.”
“그렇겠죠……?”
마리엔은 그다지 확신 없는 투로 덧붙였다.
“빙의 당시에, 전 의자에 앉아 머리 위로 책을 높이 들고 빙글빙글 돌던 중이었고요. 원래 몸 주인은 재상부 보좌관 회의에 참석한 상태였어요. 보통 빙의가 사고 아니면 죽음처럼 극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걸 생각해보면 좀 이상해요. 저흰 양쪽 다 안전한 상황이었단 말이에요.”
어쨌든 원래 몸 주인인 마리엔 디디의 영혼이 소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빙글빙글 돌고 있던 제 몸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책에 나온 샤블리드 지역 남녀처럼 서로 영혼이 뒤바뀐 게 아닐지.
마리엔이 제 추측을 말하자 오데트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어쩌면 육신을 장악한 네 영혼에게 밀려나 잠재의식으로 도피했을 수도.”
“육신을 장악하다뇨. 제가 무슨 악당도 아니고. 저도 잘 살고 있다가 갑자기 빙의‘당한’ 거예요.”
오데트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럼 ‘잘 살고 있던’ 네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겠네?”
처음엔 그랬다. 한데 바일레온의 고백을 받아들이면서부터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와 연인으로서 함께하는 매 순간이 즐거웠다. 바일레온의 가족과는 정이 담뿍 들어버렸고 말이다.
드디어 황위에 오른 오데트가 어떤 선정을 펼칠지도 궁금했다. 그걸 제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정한다. 언젠가부터 마리엔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왔다.
그리고 오데트는 즉각 대답하지 않는 마리엔을 보고 확신했다.
“너…… 여기 사람이 아니구나?”
마리엔은 질문이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오데트는 그게 거짓말임을 단번에 파악했다.
“제가 여기 사람이 아니면 뭐, 지도엔 없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그냥 제 원래 모습이 마리엔 디디처럼 귀엽지 않아서일 수도 있잖아요. 그 모습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서…….”
“빙의 사실을 얘기해주면 비어스는 혼란스러워하겠지. 그래도 결국엔 ‘진짜 너’를 택할 거야. 게다가 제국의 황제인 내가 널 돕는다는데 뭐가 주저되니?”
작위나 재산은 문제가 안 된다. 마리엔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면, 리셰른 후작에 준하는 작위를 내리면 되니까.
제국의 반대편에 살고 있다 해도 괜찮다. 오데트는 신원정보만 알려주면 함선을 보내서라도 널 제국 땅에 무사히 데려오겠노라 말했다.
“한데 넌 계속 마리엔 디디의 몸에 남아 있고 싶어 해. 그 말은 즉, 네 진짜 몸은 인력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뜻이겠지.”
“…….”
“어머니가 아직 하만 왕국에 살던 시절, 그런 사람을 봤다고 말해주셨어. 그 사람의 원래 몸은 독살당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고.”
“책 속에서도 빙의가 일어나는구나. 이야기 속의 이야기 같은 건가…….”
“응, 뭐라고 그랬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늘 그렇듯 헛소리였어요.”
마리엔은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오데트는 동요하지 않고 눈앞의 마리엔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넌 누구지?”
“아, 그건요.”
말문이 막혔다. 책 밖에 있을 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말하면 오데트가 믿어줄까?
너무 가물거린 나머지 제 원래 이름조차 생각이 안 난다고.
‘내가 듣기에도 어이없네.’
4년 전 4월 둘째 주. 쾌활하고 튼튼하던 마리엔 디디가 갑자기 두통을 호소한 게 그쯤이라고 했다.
마리엔은 흐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4년 전의 이 시기에 저는 뭘 하고 있었을까.
‘마리엔 디디가 두통 때문에 주말 내내 죽은 듯이 잘 동안…….’
무의식중에 옆머리로 손이 올라갔다.
‘그때 나도 머리가 아팠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까 병원이었다. 저를 제일 먼저 반긴 이가 언니였는지 동생이었는지 아니면 친구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의료진을 호출했다.
“환자분, 왜 여기 오게 됐는지 혹시 기억나세요?”
“아뇨…….”
“……씨는 자택에서 과음하신 후에 급히 몸을 일으키다가 넘어지셨어요. 그 과정에서 머리를 부딪치면서 정신을 잃으셨고요.”
“과음?”
“네, 술을 꽤 드셨더라고요. 그것도 양주랑 이것저것 섞어서.”
“저는 미성년인데 제가 술을 마셨다고요? 누가 제게 술을 팔았죠?”
“……환자분, 혹시 본인 나이 기억하세요?”
“네.”
“지금 몇 살이시죠?”
“열여덟 살요.”
제가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지인이 기막혀하는 소리를 냈다.
“야, 머리 부딪쳤다가 정신 차리고는 기껏 한다는 농담이……. 선생님, 혹시 쟤 잘못된 건가요?”
“음, 일시적인 증상일 수 있습니다. 일단 CT 검사상으로는 이상이 안 보이고요. 자, 그럼 환자분 오늘 날짜 말해보세요.”
“4월 8일 아닌가요?”
“그건 환자분이 쓰러진 날이에요. 지금은 4월 11일 오전 10시입니다. 날짜는 기억하시네요. 이름과 직업까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다음에 제가 뭐라고 대답했기에 지인이 표정을 일그러뜨렸을까? 아, 생각났다.
“이름은 마리엔이고 직업은 아직 없어요. 학생인데요.”
“마리엔 같은 소리 하네……. 얘가 글이 너무 안 풀려서 회까닥했나. 선생님, 어떡하죠?”
“친구분부터 진정하시고요. 말씀드렸듯이 뇌진탕 후유증일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기억상실, 어지럼증, 두통 같은 증세…….”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까부터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오늘이 11일이라고 하셨죠? 그럼 이따 퇴원할 때 확인증? 진단서? 아무튼 서류 한 장 떼주실 수 있나요? 담임 선생님한테 제출하려고요.”
“음, 환자분 성함은 ……입니다. 만 27세, 친구분 말에 따르면 직업은 전업 작가라는군요.”
차분히 설명을 이어가는 의사와 달리 ‘친구분’이라는 사람은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리엔에게 다가서며 살짝 다그치듯이 물었다.
“설마 네 필명도 잊어버렸어? 네가 처음 알려줬을 때 내가 필명을 왜 그렇게 지었냐면서 깔깔 웃었잖아. 검은머리파뿌리!”
그 순간 거센 깨달음의 충격이 마리엔을 덮쳤다.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헉,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