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14)
바일레온은 소포의 포장지를 다시 살폈다.
보낸 사람은 마리엔 디디. 이름 아래엔 케스타냐 구에 사는 이모의 잡화점 주소가 적혀 있었다.
“글씨체가 묘하게 달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저 역시 마리엔이 썼다고 여겼을 터다.
바일레온은 즉시 우편물 담당을 호출했다. 재상부에 도착한 모든 우편물을 열어서 위험 여부를 확인한 후,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게 그녀의 주요 업무였다.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어요. 우체부로부터 이 소포를 직접 건네받았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황궁 내부인이 이미 도착해 있는 우편물더미에 슬며시 끼워 넣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죠?”
“없습니다. 늘 이 시간에 오는 우체부로부터 제가 직접 수령했어요. 혹시 필요할까 해서 우편물 기록부를 가져왔는데 보시겠습니까?”
바일레온은 기록부를 확인했다. 발신인, 수취인, 양쪽의 주소, 수령 시각, 내용물 기록 옆에 우편물 담당과 우체부의 서명이 있다.
사실 포장지에 우편 날짜 도장이 찍혀 있긴 하다.
그래도 도장 자체를 위조하지 않았을까 싶어 담당을 호출했는데, 이렇게 되면 제 가설을 버릴 수밖에 없다.
이건 외부인이 케스타냐 지구 우체국에서 부친 소포가 확실하다.
보낸 이가 왜 마리엔의 이름을 사용했는지, 왜 마리엔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따라 했는지, 어떻게 그녀의 본가 주소를 알고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제가 알아내야 한다.
“일 처리가 꼼꼼하군요. 확인차 물어본 거예요. 이제 돌아가도 좋습니다.”
우편물 담당이 나갔다. 혼자 남은 바일레온은 생각에 잠겼다.
저는 마리엔과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퇴근길에 마리엔에게 넌지시 운을 떼봐야겠다. 혹시 머리를 염색하거나 가발을 쓰고 다닌 적이 있냐고.
연인의 반응을 상상하기.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마리엔은 하루아침에 평민 출신 공무원에서 부유한 후작이 됐지.’
새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그녀가 시샘과 위협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일레온은 초상화 하단의 문구에 주목했다.
케스타냐 상점가의 자랑.
보통 이런 문구는 상인회에서 제작한 축하 현수막 같은 데에 넣는다.
바일레온은 상인회의 주도하에 완성된 초상화가 마리엔의 이모네 가게 벽에 자랑스레 걸리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마리엔과 얘기해봐야겠어. 지금 당장.’
바일레온은 집무실 문을 열었다가 마침 노크하려던 마리엔과 마주쳤다.
“와, 이제는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제 기척을 알아차리시는 거예요?”
“마리엔…….”
바일레온은 일단 연인을 끌어안았다. 마리엔의 몸은 따끈했고 햇볕 냄새가 났다.
“으읏, 안는 건 괜찮지만 키스는 안 돼요.”
“키스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저번이랑 똑같네요. 그래놓고 절 비밀 통로로 끌고 들어간 거, 기억나세요?”
마리엔이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꼼지락거렸다. 이대로 안겨 있으면 또 집무실로 끌려 들어갈 것 같았나 보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쉽지만 포옹을 풀어야 할 때였다. 바일레온은 마리엔을 놓아주었다.
“비어스 경,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요. 저랑 이모네 가게에 가보지 않으실래요?”
“…….”
“시간 되세요?”
“언제요……?”
“지금요.”
바일레온은 무의식중에 제 옷차림을 확인했다. 머리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나? 문득 너무 신경이 쓰였다.
“바쁘세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할 일 없어요.”
자타공인 황궁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마리엔, 이모님은 뭘 좋아하세요?”
“네?”
“미안해요. 미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뵐 줄은 몰랐어요.”
“선물 사시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오늘은 제가 급히 확인할 게 있어서 가는 거예요. 말 그대로 잠깐 들르는 거라.”
미안하지만 바일레온의 귀에는 연인의 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잡화점까지 걸리는 시간은? 도착 전까지 선물을 준비할 수 있을까? 갈아입을 옷이 집무실에 있던가?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마디로 고장 났다.
긴급상황에서도 침착하기로 유명한 바일레온 비어스가 말이다.
“내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었나 보군요. 아무래도 먹을 것 선물이 덜 부담스럽겠죠?”
“어, 실은 그게요.”
마리엔이 우물쭈물했다. 표정에서 난처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래서 바일레온은 그녀가 이모의 기호를 모른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하나 다음 순간, 마리엔은 불현듯 하늘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오렌지.”
바일레온은 연인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오렌지를 좋아하세요?”
“네, 신선한 오렌지요. 오렌지 철이면 온 집 안에 오렌지 향기가 가득했던 게 기억나요. 까놓은 껍질에서 나는 그 새큼하고 달콤한 냄새 있잖아요…….”
말하다 보니 입에 침이 고이는지 마리엔이 입맛을 다셨다.
“한데 비어스 경, 지금은 초겨울인데 어디서 오렌지를 구하시려고요.”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빈손으로 가고, 오렌지 철이 되면 이모에게 갖다주시라.
아마 이게 마리엔의 의도였을 터다.
“구할 수 있어요.”
“네?”
“이모부님이 좋아하시는 건 뭔가요?”
마리엔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모부는 이모가 주는 대로 먹었던 것 같아요.”
“그건 우리 아버지와 같군요. 잠시만요.”
바일레온은 다른 층에서 일하는 조사관을 직접 찾아갔다. 제가 마리엔에게 미식을 공수해다 바칠 때 활약한 이다.
몇 분 후, 조사관은 상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신속히 재상부 건물을 나섰다.
바일레온은 옷을 갈아입으려던 생각을 접었다. 여전히 복도에 서서 저를 기다리는 마리엔이 눈에 들어와서다.
“마리엔, 다리 아프지는 않아요?”
“완전 금방 오셨는데요? 삼 분쯤 걸렸나? 근데 어딜 그리 급히 다녀오셨어요?”
“이모님 가게에 도착하면 알게 될 거예요.”
바일레온이 알기로 마리엔은 한참 동안 가족을 보러 가지 않았다. 아마 재상부에 들어온 후로 첫 방문일 것이다.
제 선물은 마리엔의 이모뿐 아니라 오랜만에 집에 들른 마리엔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 ◆ ◇
짤랑.
잡화점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가게 안에 가득한 오렌지 냄새가 마리엔을 맞아주었다.
“여보, 왔어. 왔어.”
“우움?”
“얼른 삼켜.”
신나게 오렌지를 우물거리던 모리츠 부인은 얼른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비어스 경,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하세요?”
“…….”
“바일레온?”
“……여기가 이모님의 가게였어요?”
“네, 어서 들어오세요.”
“마리엔, 여긴…….”
바일레온은 어째서인지 말을 잇지 못하다가 천천히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나저나 진짜 구하셨네요. 이 계절에 어디서 오렌지를 이만큼이나 팔던가요? 와…….”
마리엔은 쟁반에 수북이 쌓인 오렌지 껍질을 포착했다.
“그리고 우리 이모는 그새 이만큼이나 먹었네. 맛이 들긴 들었어?”
“응? 으응, 그, 그래.”
“하긴……. 맛있으니까 벌써 몇 개나 까먹었겠지.”
뒤늦게 아차, 싶었다. 저도 모르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버린 것이다.
‘아직 기억도 다 안 돌아왔는데.’
마리엔 디디는 제 이모와 허물없이 지냈을까?
의문을 품기 무섭게 오렌지 향기를 닮은 기억이 떠올랐다.
“일어나기 싫어어. 오 분만, 아, 오 분마안.”
“이모, 난 장차 잡화점 주인이 될 텐데 규칙변화와 불규칙변화 같은 걸 반드시 배워야 할까?”
“난 빵점을 맞을지언정 커닝은 안 해. 왜냐? 사람이 정직하거든.”
“이모부, 좀 더 활기찬 표정으로 반겨줘야지. 난 케스타냐 상점가의 자랑이잖아.”
오렌지 향기 어쩌고는 취소다. 과거의 저는 그런 문학적 표현으로 감싸주기엔 너무 까불이였다.
오늘은 또 어떤 장난을 칠까, 궁리할 때만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녀석.
‘나, 아주 한결같은 인생을 살아왔구나.’
다만 지난 4년간 제가 검은머리파뿌리 작가와 영혼이 바뀐 상태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모 부부에게도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뜻이다.
‘지나친 발랄함 금지.’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는 장담 불가다. 아무튼 마리엔은 이모 부부에게 신경을 쓰느라, 어느 순간부터 바일레온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렌지 감사합니다, 재상님. 그리고 마리엔 너는 다락방의 트렁크 가지러 온 거지?”
“어어, 그렇긴 한데…….”
마리엔 디디가 트렁크 보관을 부탁한 것은 작년 연말이다. 그간 시간이 꽤 지났다. 한데 모리츠 부인은 마치 그저께의 일인 것처럼 조카를 보자마자 조카의 부탁을 기억해냈다.
‘이십 대인 저보다도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여하튼 트렁크를 돌려받는 과정이 순조로워서 다행이다.
◇ ◆ ◇
모리츠 부부는 ‘외출 중’ 안내판을 가게 문에 걸었다.
바일레온이 저는 아래층에서 기다릴 테니, 마리엔 혼자 다락에 다녀오라고 말했다.
어른들에게 했다는 당부를 들어보니 아마도 중요한 물건인 듯하다며. 그렇다면 마리엔 혼자 조용히 확인하는 게 좋겠다고.
“자, 여기 열쇠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면서 왜 우리한테 열쇠를 맡기고 갔는지 모르겠다만……. 그럼 안에 든 거 확인하고 천천히 내려오렴.”
모리츠가 다락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구나, 마리엔.”
조카가 거의 1년 만에 집에 왔으니, 모리츠가 그리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나 마리엔은 그 안에 숨겨진 뜻까지 알아차렸다.
밝고, 스스럼없고, 엉뚱한 마리엔의 귀환.
빙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리츠 부부는 장장 5년 만에 ‘원래의’ 조카를 마주한 기분일 것이다.
마리엔은 이모부를 향해 생긋 웃었다.
“이제부터 자주 올게.”
“그래.”
모리츠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마리엔은 다시 낡은 나무 트렁크에 시선을 주었다.
“휴.”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젠 책 밖에서 보낸 4년간의 기억마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오데트 앞에서 기억해낸, 빙의 직후에 병원에서 눈뜬 일. 책장에 가득하던 로판들. 똑같은 책이 열 부씩 꽂혀 있던 것 정도만 기억난다.
그리고 제가 으로 돌아오기 전에 무슨 글을 쓰던 중인 것 같았는데.
이 이상은 안개처럼 아득하다.
“엉망진창이네.”
그렇다고 열여덟 살 전에 이 세계에서 살던 기억이 되살아났냐면 그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어느 쪽도 똑바로 기억나는 게 없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제 기억은 언제쯤 완전해질까.
어쨌든 제가 처음부터 마리엔 디디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안에 기억이 돌아오는 물약이라도 넣어두셨으려나?”
마리엔은 심호흡했다. 솔직히 말할까? 트렁크 안에 든 게 저주 인형만 아니면 다행이라는 생각 중이다.
“검은머리파뿌리 작가님은 성인이셔. 검은머리파뿌리 작가님은 오만한 흑발을 좋아하셔. 필명을 봐. 각이 나오잖아? 근데 눈떠보니 흑발과 뜨거운 밤을 보내는 여주인공도 아니고 엑스트라, 심지어 본문에서도 안 나오는 열여덟 살 마리엔 디디의 몸에 빙의했어.”
인마는 뭐 말간 얼굴 빼고는 제대로 된 능력치도 없냐며 분노할 만하다.
“제발 원한만 품지 않으셨으면. 제발, 제발, 제발…….”
진실을 알게 된 지금,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바일레온과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니 제발 이 트렁크를 열고도 제가 무사하기를.
마리엔은 자물쇠를 열고 묵직한 트렁크 뚜껑을 들어올렸다.
“아…….”
몸을 쪼그리면 마리엔도 들어갈 만큼 큰 트렁크 안에는 물약도, 저주 인형도 없었다.
대신 수많은 문제집과 문제집, 또 다른 문제집, 오답 노트, 제국 아카데미 교지 스크랩,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마리엔은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여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