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15)
마차가 구시가지 상점가로 진입할 때부터 바일레온은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묘한 기분은 마차에서 내린 후, 마리엔과 나란히 벽돌길을 걷는 동안 점점 강렬해졌다.
“다 왔어요.”
마리엔이 철제 간판을 가리켰다.
“여기예요.”
바일레온은 자연스럽게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가능할까? 케스타냐 지구에 잡화점이 여기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닌데.
“비어스 경,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하세요?”
“…….”
“바일레온?”
“……여기가 이모님의 가게였어요?”
“네, 어서 들어오세요.”
“마리엔, 여긴…….”
바일레온은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여긴 열여섯 살의 제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가게다.
매주 한 번, 거의 1년 넘도록 드나들었으니 한때 바일레온 비어스의 단골 가게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데트가 갇혀 있던 별저에 가기 전에 항상 여길 들렀는데.’
다른 잡화점보다 귀엽고 신기한 물건이 월등히 많은 가게였다. 새 물건을 들여놓는 주인 부부의 안목 또한 괜찮았다.
‘한데 여기가 마리엔의 집이었다고?’
1층은 가게, 2층과 3층은 가정집, 다락방은 창고 용도란다.
부모님이 가게를 운영하면 보통 그 집 아이는 가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계산대 옆에서 숙제를 하든, 잔심부름을 돕든지 하면서 말이다.
모리츠 부부의 집처럼 가정집 바로 밑에 가게가 있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어째서 저는 한 번도 어린 마리엔과 마주치지 못한 걸까.
바일레온은 그런 의문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현실로 돌아왔다.
마리엔이 다락방에 올라가 있는 동안, 그는 2층 주방에서 모리츠 부부에게 차를 대접받았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이는 손님 바일레온이었다.
누가 물어도 상관없는 무난한 화제로 대화가 이어지던 가운데, 모리츠 부인이 불쑥 말했다.
“저희 마리엔은 착한 아이랍니다.”
바일레온은 저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바일레온의 미소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모리츠 부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마리엔은 씩씩하고 명랑한 성격 덕분에 늘 친구가 많았어요. 여기 케스타냐 지구의 골목대장이었지요. 어릴 적엔 지금보다 훨씬 쪼끄맸는데도, 저보다 덩치 큰 남자애와 치고받고 싸우기 일쑤였답니다.”
옆에서 아내의 말을 듣던 모리츠의 입가에 미소가 슬그머니 번져나갔다. 모리츠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 아이는 물러서는 법을 모르는 싸움꾼이었어요. 마리엔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었다면, 싸운 남자애는 거기다 추가로 팔까지 빠진 상태였으니까요.”
“왜 싸웠냐고 물어보면 마리엔의 대답은 늘 비슷했어요. 저 녀석은 여자애가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놀렸다, 혹은 누구의 인형을 빼앗아서 하수구에 던졌다, 여자애가 싫다는데도 나중에 자기 부인이 되라면서 못살게 굴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더군요. 모리츠 네 조카딸은 다 좋은데, 오지랖이 너무 심하다고요.”
“입이 너무 가볍다고도 했죠.”
“마리엔의 입이 너무 험하다고도 했어요.”
바일레온은 번갈아가며 말하는 모리츠 부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에 시퍼런 멍이 들어 돌아온 조카 얘기를 할 때, 부부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카를 흉보던 몇몇 어른 얘기로 넘어가자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어이없으면 눈을 굴리곤 하는 마리엔의 습관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부모들이 영 틀린 소릴 한 건 아니에요.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마리엔과 지내다 보면 아실 거예요. 저 애는 남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법을 안답니다. 얼핏 눈치가 없어 보여도.”
모리츠 부인이 말을 하다 말고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상대의 변화를 세세하게 캐치해요. 그 사람이 평소 좋아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주려 하고요. 당사자보다 제가 더 분해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죠.”
바일레온은 마리엔이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데트의 귀걸이를 찾아왔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마리엔은 제 공을 고스란히 바일레온에게 넘겨주려 했다. 아무 대가 없이. 오로지 바일레온의 외사랑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저, 지하에서 이거 찾았어요. 두 시간 넘게 먼지 구덩이에서 굴렀어요. 이번에야말로 비어스 경을 돕고 싶어서.”
그 전까지 바일레온은 제가 누군가로부터 그런 애정과 헌신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헌신은 온전히 바일레온 비어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주는 것에서만 기쁨을 느끼자. 기대하지 말자. 이번 생에서 내가 돌려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저도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을 애써 외면하며 지내왔다.
한데 마리엔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의 머리 색처럼 포근하고 뺨처럼 부드럽고 하늘빛 눈동자처럼 맑고 곧은 마음을 와르르 안겨주었다.
비어스 경, 줄곧 이런 순간을 기다려오셨죠? 자, 여기 제가 왔어요.
마리엔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바일레온 제게 그리 느껴졌다는 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밝게 웃던 마리엔.
그녀가 찾아온 건 귀걸이였지만, 바일레온이 건네받은 것은 오랜 시간 애타게 기다려왔던 사랑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저도 부인의 조카따님에게서 그런 유의 응원을 많이 받았거든요.”
“어머, 그렇다면 재상님은 틀림없이 좋은 분이겠군요.”
모리츠 부인이 웃었다.
“마리엔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답니다. 이모, 난 이유 없이는 안 싸워. 좋은 사람에겐 나도 좋게 대하거든?”
어릴 땐 애를 가르쳐야 하니까 좋고 나쁜 사람의 기준을 네 맘대로 정하지 말라고 하긴 했단다.
“여하튼 재상님은 마리엔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셨나 봐요.”
“……네, 다행히도요.”
대답이 약간 늦어졌다. 마리엔의 권유에 머리를 검게 염색했는데도 오데트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친절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건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디디 보좌관 역시 좋은 사람이란 뜻이니까.”
제가 오데트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려고 매주 들렀던 잡화점은 마리엔의 이모네 가게였다.
2년 뒤,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한 마리엔은 환영사를 낭독하는 학생회장 바일레온을 보았을 것이다.
어떤 용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1학년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반 앞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이후 수년이 흘렀고 두 사람은 재상부에서 재회했다.
그러나 초봄의 어느 날, 마리엔이 대뜸 염색약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 바일레온에게 그녀는 조용한 부하직원 1일 뿐이었다.
서로 알아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어긋난 시간들.
바일레온은 이처럼 제가 다른 사람을 보는 동안 놓쳐버린 마리엔의 지난날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일찍 연인이 되었다면…….’
마리엔의 졸업 무도회 파트너는 누구였을까?
바일레온은 돌아갈 수 없는 그날, 아카데미 졸업식 날의 마리엔에게 화사한 꽃다발을 전하고 싶었다.
마리엔의 같은 반 친구들에게 선물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던진 짓궂은 질문에 대답 대신 미소를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비어스 경은 마리엔이랑 언제 결혼하실 생각이에요, 같은 질문 말이지.’
지금 안타까워해봤자 소용없는 거 안다. 아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그렇다.
“조카따님의 졸업 무도회 파트너는 누구였죠?”
바일레온 비어스, 결국 저지르고 말았구나.
바일레온은 말을 뱉기 무섭게 도로 주워 담고 싶어졌다.
‘이제 와서 알면 뭐 하게? 멱살 잡으러 가려고? 어떻게 생긴 남자인지 두 눈으로 확인이라도 해?’
모리츠 부부가 이웃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재상이 사람은 나쁘지 않은 듯한데, 별별 것에 다 질투를 하더라며.
“편하게 마리엔이라고 부르세요. 아까 가게에서는 걜 이름으로 부르시던데요.”
“아, 네.”
“정말 예의 바르시네요. 저희 마리엔과는 정말 딴판……. 어머, 근데 저희가 재상님 보고 예의 운운을 해선 안 되죠?”
바일레온이 괜찮다고 대답하려는데 남편 모리츠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난 예의 운운한 적 없어. 저희라면서 슬쩍 날 엮지 말라고.”
모리츠 부인이 웃으며 식탁 아래로 손을 뻗었다. 비트는 각도를 보아하니 남편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어 응징한 듯싶었다.
바일레온은 입가에 번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20년쯤 지나면, 마리엔도 제 이모처럼 남편의 허벅지를 꼬집으려나.
“마리엔은 졸업 무도회에 혼자 갔어요.”
“예?”
모리츠 부인은 조카가 아카데미 5학년이 되자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고 말했다.
졸업 후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마찬가지였단다. 마리엔은 아침부터 묵묵히 가게 일을 돕다가 오후가 되면 제 방에 올라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고.
다른 사람과의 다툼을 최대한 피하려는 게 보였다며, 모리츠 부인이 말을 이었다.
“한데 그러다가도 저나 남편이 진상을 부리는 손님에게 걸려서 곤혹스러워하면 마리엔이 해결해주었답니다. 예전처럼 상황에 휘말려서 흥분하지도 않고 어찌나 딱딱, 잘 끊어내던지요…….”
남들은 드디어 조카가 철들었나 보다고 했지만, 모리츠 부부는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작년까지 마리엔은 좀 가라앉아 보였달까요. 아카데미 입학 준비를 하면서도 그렇게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하더니 또……. 어쨌든 특채에 합격하고 나니까 애 얼굴이 밝아지더군요.”
“수험기간의 고됨은 실제로 준비해본 사람만이 안다고들 하죠.”
바일레온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마리엔은 재상부 업무에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상관으로서 전 마리엔이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웠어요……. 과거형이네요. 혹시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뜻인지요?”
모리츠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모리츠 부인은 허벅지를 방어하고 있던 남편의 손등을 꼬집었다.
“여전히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더는 마리엔의 상관이 아니라서요. 조카분은 폐하의 신임을 얻어 황실 수석보좌관으로 승진했답니다.”
“맞아. 게다가 또 뭐라더라. 그 내궁…….”
“총책임자도 겸하고 있죠.”
모리츠 부부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 부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어릴 때부터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긴 했어요.”
“유명했지…….”
“당신 기억나? 10년 전인가. 우리 가게에 매주 왔던 남학생.”
“그 제국 아카데미 교복?”
“어어어, 그 학생. 키도 아주 컸잖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저절로 눈길이 갔는데. 손님들도 다 그 학생을 쳐다보고 말이야.”
바일레온은 부부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차를 마셨다.
뭔가 간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모리츠 부부는 아직 10년 전의 단골 남학생과 눈앞의 재상이 동일인물인 줄 모르는 눈치다.
‘그거 접니다.’
고백은 일단 보류다.
“그 남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