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16)
마리엔에게
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건 지난 4년간 바뀌어 있던 우리 둘의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이겠지.
거기서 넌 을 읽었을까? 내 다른 출간작도 읽었을까? 읽었다면 내 취향이 뭔지 알겠구나.
난 서늘하고 강한 캐릭터가 좋아. 남들 눈에 어딘가 오싹하게 보이기까지 하면 최고지.
오데트처럼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면 아래서 조용히 칼을 갈며 살아온 황녀나 카인처럼 눈 깜짝 않고 적군을 도륙 내는 전장의 사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뭐 따로 있겠니?
그들은 내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캐릭터였어.
사실 주인공들뿐만이 아니야. 황제를 비롯한 로즈 황가 인간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험한 사제, 뛰어난 일급 스파이지만 사랑할 때만은 부나방 같았던 오데트의 어머니.
다들 위태로운 느낌이지. 정상인이 없어. 정상인의 평온한 이야기를 보고 싶으면 다른 데 가셔야 할 거예요. 난 언제나 이런 마인드로 글을 썼단다.
이쯤 되면 넌 손을 번쩍 들고 반박하고 싶겠구나.
바일레온은 오싹함과 거리가 먼데요? 바일레온은 서늘한 사람이 아닌데요?
응, 근데 위태롭긴 하잖니.
볕 좋은 오후의 나무 그늘 같은 미소 아래 득시글득시글득시글득시글한 불안감과 위험한 상황에서 본인의 안전은 뒷전인 점이 마냥 괜찮게만 보인다면 너도 참…….
아무튼 마리엔 넌, 내가 만들어낸 격정의 핏빛 이야기 속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어.
정말이지 몇 번이고 확인했단다. 이게 내가 쓴 속 세상이 맞는지. 제목만 같고 내용은 완전히 다른 소설에 들어온 건 아닌가 싶었지.
왜냐면 내가 쓴 건 격정의 복수물이자 계약결혼물이지 열여덟 살 소녀의 아카데미물이 아니니까!
한데 맞더라고.
그때부터 난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졌어. 하필 네 몸에 빙의한 이유가 있을 텐데, 네가 뭘 원하는지 짐작도 안 갔기 때문이야.
넌 그냥 마리엔 디디인데.
대충 외모와 직업만 정해놓은 엑스트라.
작가인 나도 그 이상은 몰라. 4년 후엔 바일레온의 보좌관이 될 인물이니까 그럼 얘의 소원은 공무원이 되는 건가?
그러다가 발견한 거야. 네가 기숙사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둔 젊은 재상의 초상화를.
액자의 유리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더라.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넌 그다지 야무지지 못한 편이라지.
근데 그 액자는 완벽하게 관리되어 있었어. 꼭 누군가가 매일 부드러운 천으로 정성스레 닦은 것처럼 말이야.
그 주 주말, 난 네 이모의 잡화점에 갔어.
미리 사과할게. 미안해.
네 방을 뒤지다가 네 일기장을 찾아냈거든. 사실 넌 절대 일기를 쓸 타입이 아니긴 해.
그렇지만 남몰래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는 소녀가 일기장에 속마음을 풀어내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네가 처음으로 일기를 쓴 날짜를 보니까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리더구나.
열두 살.
당시 오데트와 같은 나이. 그리고 나이만 빼면 오데트와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평범한 여자애.
그제야 난 내가 빙의‘당한’ 이유를 깨달았단다.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지.
난 스물두 살의 마리엔이 재상부 제3보좌관 직함을 달 수 있도록, 반드시 그 전 해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어.
문제는 말이야.
너도 돌머리지만 나도 너 못지않게 머리가 굳었거든?
간단한 수학 공식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스물여덟 살에게, 어렵기로 소문 자자한 황궁 공무원 특채 합격이 과제로 주어지다니.
진로상담시간에 네 담임에게 말하니까 그 사람이 그러더라. 좀 더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게 어떻겠냐고.
순간 10여 년 전의 내 담임이 떠오르면서 울컥했어.
네 담임은 내 담임보다 훨씬 좋은 사람인데도 그렇게 되더라고. 나도 모르게 “아저씨가 저에 대해 뭘 알아요?” 할 뻔했다니까.
여하튼 난 해냈어.
빌어먹게 힘들고 외로웠지만 해냈단다.
네가 이 편지를 다 읽고 내려놓을 즈음이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불완전한 기억들이 돌아와 있을 거야.
이윽고 넌 알게 되겠지.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넌 바일레온이 오데트를 바라보는 내내 그의 뒤에서 그를 바라봐왔어.
어릴 적 첫눈에 반한 상대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서는 그 대단하다는 제국 아카데미에 갔지.
난 시험공부를 하다가 힘들어질 때면 네 일기장을 펼치곤 했어.
어렵다. 하기 싫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내가 이렇게까지 바보인 줄 몰랐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눈물방울로 얼룩진 문장을 보고 있으면, 나도 괜히 눈이 시큰해지더구나.
빙의당하기 전, 그러니까 내가 쓰러지기 전에 들은 목소리가 기억나. 당시엔 환청인 줄 알았어. 왜냐면 그때 난 상당히 취한 상태였고, 집엔 나 혼자밖에 없었으니까.
“너무해요! 갈색 머리한테 원한이라도 있으세요? 이제 좀 행복하게 해주시면 안 되냐고요!”
그게 네 목소리임을 깨달은 건 빙의하고도 시간이 좀 지난 후였어.
아, 마리엔 디디.
바일레온밖에 모르는 이 집념의 화신아.
작가에게 의견을 전할 수 있게 됐잖아. 그럼 좋아하는 이랑 본인을 맺어달라고 부탁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오랜 시간을 열렬히 좋아했는데, 응?
한데 넌 모처럼 잡은 기회에도 일관되게 바일레온의 행복만을 외쳤어. 내 생각에 넌 네가 바일레온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아.
내일이면 난 황궁으로 떠나. 조만간 우린 각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겠지.
그러면 난 원고 파일을 열어서 몇 가지 설정을 바꿀 거야.
마리엔 디디는 제가 책에 빙의했다고 믿는다, 이후에 오데트의 신임을 얻는다, 새 황제 즉위식에서 공신 자격으로 맨 앞줄에 선다, 후작이 되어 신분이 상승한다, 다락방의 트렁크 속 편지를 읽기 전까지는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다 정도.
이로 인해 세부 전개가 어떻게 바뀔지는 나도 몰라. 나머지는 네게 달렸어. 그렇지만 난 네가 잘 해내리라 믿어.
한마디만 더 할까?
내가 바일레온이라면 널 놓치지 않을 거야. 살면서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한데 제 곁을 지키는 사람 중에 이미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바일레온 비어스의 복이지.
바라건대 우리의 똑똑한 재상이 하루빨리 가망 없는 외사랑을 접고 저만의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내 편지는 여기까지야.
안녕, 디디.
함께해서 즐거웠고 다신 보지 말자.
검은머리파뿌리가.
마리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폐하의 말투가 어디서 왔는지 알겠어…….”
알고 보니 원작자가 즐겨 쓰는 화법이었던 거다. 마리엔은 다시 편지로 시선을 떨궜다.
“무슨 말씀인진 알겠는데요. 득시글득시글을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도 바일레온의 위태로운 면에 대해 알고 있다. 그가 본인의 안전을 뒷전으로 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걸 아무렇지 않아 할 정도로 마리엔 디디가 생각이 없진 않다.
당신이 절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제게도 당신이 소중하니까 어디 가서 함부로 다치지 마세요.
혼자서 위험을 다 떠맡으려 하지도 말고요.
기회가 될 때마다 바일레온에게 신신당부할 예정이건만.
“‘너도 참’에 붙은 말줄임표는 뭐야?”
편지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큰 기대 없어 보이는 글투에 마리엔은 입술을 삐죽였다.
다시 읽기는 그 정도로 해두고 편지를 내려놓으려는데 ‘안녕, 디디.’라는 문장이 눈에 콕 박혔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이윽고 마리엔은 으로 돌아온 첫날을 떠올렸다.
그날 제가 좁디좁은 보좌관 숙소의 방구석에서 발견한 보온용 물주머니에도 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엔 올겨울 난방 걱정이 앞선 까닭에, 삐뚤빼뚤한 자수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혹시 그거…… 작가님이 직접 수놓은 거였으려나.”
마리엔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손재주 없는 사람끼리 통하는 동질감 때문이다.
편지를 바닥에 내려놓은 마리엔은 누렇게 색이 바랜 문제집 표지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편지를 읽고 나면 기억이 완전히 돌아와 있을 거라던 작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또렷이 기억난다. 트렁크를 가득 채운 이 많은 문제집은 다 제가 푼 것이다.
풀고, 틀리고, 풀고, 틀리길 되풀이했던 나날.
찍는 족족 틀렸다. 확률상 한두 개는 맞힐 법도 한데 답지를 확인해보면 어김없이 오답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것만은 맞힐 거라고 자신한 문제도 틀렸으며, 며칠 전에 비슷한 유형을 푼 기억이 있는 문제 역시 틀렸다.
“틀린 문제마다 빗금을 치다간 색연필이 너무 빨리 닳아버릴 듯했어. 그래서 한 여섯 권째까지는 동그라미만 쳤는데.”
마리엔은 픽 웃었다.
“그렇게 하니까 색연필을 아주 영원토록 쓸 수 있을 것 같았지 뭐야.”
이어서 마리엔은 제국 아카데미 교과서를 꺼냈다. 수업 중에 졸지 않으려고 제가 귀퉁이에 끄적인 낙서가 보였다.
비어스 선배는 게 자리. 게게게 자로 끝나는 말은? 집게, 참게, 부드럽게, 나 좀 봐주게.
“말 그대로 낙서네. 진짜 뜬금없다.”
마리엔은 제국 아카데미 교지 스크랩북으로 손을 뻗었다. 얼마나 두껍고 묵직한지. 별생각 없이 집어 들려다가 도로 내려놓을 뻔했다.
“아, 오랜만이다.”
스크랩북을 펼치자마자 8년 전의 입학식에서 바일레온이 낭독한 환영사가 눈에 들어왔다.
입학식 당시에 저는 단상 위의 바일레온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고개를 들었다가 행여 눈이 마주칠까 봐 겁났다. 심장은 또 어찌나 터질 듯이 쿵쾅대는지. 단상 위에 있는 그의 귀에도 들리진 않을까.
그야말로 마리엔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편으론 바일레온의 이름을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이 학교에 오길 잘했어. 마리엔 디디, 정말 잘했어. 이 생각만 계속하던 게 기억나.”
학생회장 바일레온은 교지에 종종 등장하곤 했다.
어떤 날엔 교외의 경진대회 수상자로서, 또 다른 날엔 특별 기고자로서, 기사로 다뤄지지 않은 날엔 삽화의 하단을 보면 거기서 바일레온의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새내기 마리엔은 다른 사람이 쓴 기사에 바일레온이 언급되기만 해도 죄다 오려서 스크랩북에 모았다.
참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더는 이름 모르는 제국 아카데미 남학생이 선물 사러 오는 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바일레온의 교실 주변을 서성이면 그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한번은 복도에서 바일레온과 일대일로 마주치기도 했다.
“누굴 찾니? 불러줄까?”
그날 저녁, 마리엔의 일기장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탄사가 등장했다.
마리엔은 검술 대련을 하고, 수건으로 땀을 닦고, 점심을 먹고, 그림 그리는 바일레온을 지켜볼 수 있는 게 꿈만 같았다.
하나 행복도 잠시.
햇살 같은 비어스 선배는 마리엔이 입학한 바로 다음 해에 졸업해버렸다. 그의 졸업식을 앞두고 얼마나 많은 여학생이 고백을 감행했는지 모른다.
“비어스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