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21)
이러시는 이유가 뭐냐는 클로이즈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을 결박할 필요까진 없지 않느냐는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구나.’
그걸 깨닫고 나니 대화로 어떻게든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기대가 사라졌다.
이후 클로이즈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제게 알려주지 않았으나 남자가 이러는 데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다.
저로서는 그가 목적한 바를 이룰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근데 그때가 언젠데? 어차피 난 도망치지도 못하는데 이렇게까지……. 읏, 손목.’
손발이 자유로울 때도 저항 한번 못 하고 제압당했다.
지금처럼 침대의 철제 헤드에 손목이 묶인 상태로는 숨쉬기 빼곤 아무것도 못 한다.
아, 이건 다른 이야기이지만 클로이즈는 남자가 아까 가운의 허리끈을 묶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됐다.
제 손목을 묶는 데에 쓰려고 따로 빼둔 거였다.
‘세심하기도 하셔라.’
어쨌든 힘으로는 눈앞의 남자를 이길 수 없다.
그래도 마리엔이라면 기회를 엿봐서 주먹 한 방은 먹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곱게 자란 귀족 영애의 보드라운 손과 근육 없이 나긋한 몸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저도 마리엔의 경호원에게 호신술을 좀 배울 걸 그랬다.
‘무사히 돌아가게 되면 제일 먼저 후작님께 이를 테야. 그런 다음에 하녀에게 후추 스프레이를 사 오라고 해야겠어.’
호신술을 익히는 데엔 시간이 걸릴 터다. 그동안 오늘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어떡하나.
그땐 상대의 눈에 고통스러운 최루액이라도 뿌려야겠다.
뿌린 후에 제때 도망칠 수 있을지는 클로이즈에게 중요치 않았다.
원하는 건 오직 상대의 고통뿐.
‘오늘 일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으리란 것만 알아두세요. 어떻게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나처럼! 섬약한! 아가씨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지!’
남자를 노려보는 클로이즈의 눈빛이 갈수록 매서워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숨 막히는 대치 상태가 오 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보기보다 상황 판단력이 뛰어나군, 비어스 영애.”
드디어 남자가 입을 열었다. 클로이즈는 ‘보기보다’라는 표현을 물고 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보기보다 뛰어나다니?
달리 말하면 제가 상황 판단력이 떨어지게 생겼다는 뜻이 아닌가.
클로이즈 비어스의 21년 인생을 걸고 말하건대, 살면서 이런 모욕은 또 처음이었다.
오빠 바일레온이 워낙에 독보적인 인재라서 그렇지.
저 또한 어디 가서 부족하다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거늘.
‘나와 몇 번이나 마주치고도 몰랐단 말이야? 침착하게 빛나는 이 두 눈에서 영민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눈이 장식으로 달리셨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클로이즈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처음엔 비명을 지르려기에 재갈을 물려야 하나 싶었거든.”
“아까 같은 상황이면 누구든 비명을 지르려 할걸요.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갑자기 열린 문 사이로 시커먼 팔이 나와서 사람을 끌고 들어갔으니까요. 전 어릴 때 읽은 동화책 속 괴물이 튀어나온 줄 알았답니다.”
“지금 날 괴물이라고 욕하는 건가?”
“설마요. 그저 비유를 든 것뿐이랍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속이 좁다고 욕하기까지.”
그래도 본인 욕은 다 알아듣는구나. 공작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썩 즐기지 않기에, 면전에서 돌려 까는 사교계 식 화법도 눈치 못 채려나 싶었다.
“카인 블랙우드 공작님.”
클로이즈는 눈앞의 남자에게 말했다.
“전혀 신사답지 못한 방식으로 숙녀를 다룬 행동에 대해 사과할 기회를 드릴게요.”
“아까 내가 한 말을 취소해야겠군. 영애에게 분별력이란 게 있다면 지금 내게 사과를 요구할 처지가 아님을 알 텐데.”
“제가 아는 것이라곤 공작님의 모든 언행이 연애 시장에서 도태되기 딱 좋다는 것뿐이에요.”
카인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보기보다 혀가 날카롭군, 영애.”
“도대체 절 여태 어떻게 보신 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사람을 볼 때 좀 더 신경 쓰시는 게 좋겠어요, 공작님.”
클로이즈는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관찰력이라고 부른답니다.”
“아.”
카인이 나직이 감탄사를 뱉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이지. 방금 그렇게 웃으니까 정말 비어스 재상과 닮았어.”
카인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만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바일레온이었다면 깊은 고민에 빠진 상태로 보였을 것이다.
어떤 사안을 생각하면서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움직인다고 여겼을 터다.
그러나 지금 클로이즈의 앞에 더없이 오만한 태도로 앉아 있는 남자는 카인 블랙우드였다.
카인이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일 때마다 클로이즈는 그가 머릿속으로 제 오빠의 목을 조르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웃는 얼굴이 ‘정말’ 바일레온과 닮은 그의 여동생 목을 조르거나.
‘설마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 공작이라지만 여자 목을 조르진 않겠지. 그건 완전히 다른 얘기잖아.’
다음 순간, 클로이즈는 마리엔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카인과의 첫 만남.
마리엔은 그때 제가 다소 충동적이었음을 인정했다.
당시만 해도 바일레온의 짝사랑을 이뤄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에 뵈는 게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블랙우드임을 깨닫자마자 욕을 했죠. 그랬더니 공작이 제 목을 왁! 조르더라고요. 높이 들어올려서는 이리저리 흔들어대는데…….”
마리엔은 그때 제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바일레온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거라고도 했다.
‘이미 여자 목을 조른 전적이 있구나…….’
클로이즈는 마른침을 삼켰다. 카인이 제 사슴 같은 목을 보고 바일레온을 떠올리지 않기만을 빌었다.
한편으로 다짐했다.
최고급 화장수, 에센스, 오일, 정기적인 마사지로 정성껏 관리한 제 목에 손톱만 한 흠집이라도 낸다면 상대가 냉혹하기로 유명한 철혈 공작이라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클로이즈 비어스가 미의 여신의 이름으로 단죄할 것이다.
반드시.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은, 영애의 혀보다 더 날카로운 것에 혀가 잘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거였어.”
카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의 차리는 척하면서 욕하는 점도 영애의 오빠를 떠올리게 하는군.”
공작님은 조실부모한 외아들이라 모르시나 본데요.
한 지붕 아래 20년을 넘게 살면 애당초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도 서로 닮아갈 수밖에 없답니다.
생긋생긋 웃으며 이렇게 맞받아치고 싶었다.
그러나 클로이즈에겐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가족은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저만의 규칙이 있었다.
누구와 달리 상식인이랄까.
“대화에 진척이 없네요. 한담이나 나누려고 절 납치하신 건 아닐 테고.”
클로이즈는 허리를 곧게 폈다. 비록 숱한 커플이 밀회를 나눈 철제 침대에 묶여 있으나 움츠린 자세로 있기 싫었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요. 블랙우드 공작님, 절 납치 감금하신 이유를 듣고 싶군요. 그만 알려주시겠어요?”
◇ ◆ ◇
선황제 시절, 바일레온은 황제가 오라는 곳으로 가서 국정 보고를 해야 했다.
장소는 매일 달라졌다.
그저께엔 크리켓 경기장, 어제는 일광욕실, 오늘은 장미정원인 식이었다.
황제는 제 생각에 보고가 너무 길어지는 듯하면 남은 건 내일 말하라며 바일레온을 물렸다.
몇 번을 그렇게 미루면 재가가 필요한 안건이 누적되기 마련이다.
각 부서에서는 황제의 최종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니 애타는 마음에 재상부를 찾는다.
그럼 바일레온은 욕먹을 준비를 하고는 대신들과 함께 황제를 찾아갔다.
“넌 어떻게 단 하루도 날 가만히 두는 법이 없느냐?”
재상에 임명된 후로 제가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아닐까.
어쨌든 황제가 많은 권한을 부여해준 덕분에 바일레온은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데트가 새 황제가 된 지금, 바일레온은 정해진 시간에 쏘른 홀로 가면 됐다.
국정 보고 시간은 국정 회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급한 일이라면 담당자의 직급에 상관없이 재상 바일레온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오데트를 만나는 것도 가능해졌다.
황궁의 모든 공무원이 바일레온만 쳐다보는 상황이 해결된 거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바일레온에게도 드디어 여가란 게 생겼다. 더는 퇴근 후에 남은 일감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됐다.
바일레온은 그 소중한 시간을 연인과의 데이트에 할애했다.
어제는 모리츠 잡화점의 마감 청소를 돕고, 마리엔의 이모 부부와 저녁을 먹었다.
그러다가 저번에 제가 넘어질 뻔했던 다락의 계단을 보자 새삼 떠오른 것이다.
비어스 경은 진짜 혼전순결주의자냐고 말간 얼굴로 묻던 마리엔.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득했다. 순간 너무 당황하기도 했고.
그래서 마리엔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남한테 들은 말이면 그가 누군지 정도만 묻고 어물쩍 넘겨버렸다.
“제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하셨어요. 정말 신혼 첫날밤까지 순결을 지키실 거예요?”
“네?”
“방금 뒤에 붙은 게 느낌표예요, 아니면 물음표예요? 살짝 애매한데.”
“저기, 마리엔……. 목소리를 조금만 작게.”
“네, 아니요.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하세요.”
집요한 토끼 아가씨는 끝끝내 궁금해하던 답을 듣긴 했지만.
‘그러니까 출처가 폐하라는 거지.’
사실 마리엔에게 듣기 전까지 그는 클로이즈를 유력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비어스 가의 둘째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닌가 말이다.
“폐하.”
“아직 얘기할 게 남았나?”
“국정에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여쭐 것이 있어서요.”
오데트가 말해보라 눈짓했다.
“폐하께서 리셰른 후작에게 말씀하셨다면서요. 제가 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어쩌다가 이 단어를 오데트 앞에서 꺼내게 됐을까.
바로 오데트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제 성격상 모른 척 넘어가기란 불가능하다. 바일레온은 마음을 다잡았다.
“제가 혼전…… 순…….”
“혼전순결주의자.”
오데트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 말 하기가 그리 어려워?”
“잡담처럼 아무렇지 않게 꺼낼 화제도 아니죠.”
“이상하네.”
오데트가 말을 이었다.
“경의 연인은 아무렇지 않아 하던데. 오히려 내게 몇 번이나 되물었어. 비어스 경이 진짜 혼전순결주의자가 맞냐고. 본인 생각엔 아닌 것 같대. 그럴 리가 없대.”
바일레온은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근데 평정심 그게 뭐더라?
“디디가 눈깔사탕이라도 되는 양 아주 쪽쪽 빤다며?”
“폐하, 체통을 잃으셔선 안 됩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근위대가……. 눈깔사탕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비유입니까?”
“달잖아.”
이 이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