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33)
후궁 선발 이틀째.
후보들이 시험장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교적인 이들은 그새 말동무를 만든 모양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19번처럼 혼자 조용히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마리엔은 제게 예를 갖추는 후보들에게 눈인사로 답했다.
“시험장에서는 얼굴 가리개를 벗으세요.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갈 때 다시 착용하면 됩니다.”
넓은 시험장에는 행과 열을 맞추어 1인석을 배치해두었다. 책상마다 하단에 압인이 찍힌 백지 두 장과 필기구가 놓여 있었다.
“착석.”
마리엔의 말에 다들 본인의 번호가 적힌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여러분의 지혜를 시험할 예정이에요.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책상 위를 보고 이미 알아챈 사람도 있겠죠.”
마리엔은 후보들을 슥 둘러보았다.
“이제 내가 모종의 상황을 제시할 텐데요. 본인이라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세요.”
마리엔은 길게 늘어진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커튼처럼 두꺼운 천이 벗겨지면서 오늘의 시험 문제가 드러났다.
‘나’는 황제의 후궁으로 지난 2년간 그럭저럭 아낌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나’의 지위를 박탈하고 내궁에서 쫓아내라는 황명이 내려왔다.
‘나’는 왜 쫓겨나게 되었는가? 각자 이유를 추측한 후에 황제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편지를 쓰시오.
글자는 맨 뒷자리에서도 잘 보일 만큼 크고 또렷했다.
‘표정들이 어둡네.’
마리엔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어제의 경험으로 후보들의 머릿속에는 리셰른 후작이 호색꾼이라는 정보가 새겨졌을 것이다.
한데 오늘은 갑자기 지혜를 시험하겠다면서 진짜 필기시험을 치게 하다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릴 만도 하지.’
마리엔은 백지 하나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거나 초안을 작성하는 용도로 쓰고, 나머지 백지에 편지를 쓰면 된다고 설명했다.
“제한 시간은 팔십 분. 시험지를 일찍 제출해도 퇴실할 순 없어요. 본인 자리에서 기다리다가 시험 종료 후 다 같이 나가도록 합니다.”
이건 뭐, 남의 답안을 베낄 수도 없다.
시험장 곳곳에 깔린 감독관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답지를 본들 ‘아, 그렇구나.’ 하고 참고만 가능할 뿐, 결국엔 본인의 생각을 써야 한다.
“시작!”
후보들은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초안을 끄적였다.
글쓰기엔 영 자신이 없는지 시계와 백지를 번갈아 보며 한숨부터 내쉬는 자도 있었다.
후궁 선발이라기보다 공무원 시험이나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가까운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장본인인 리셰른 후작은 연단에서 뒷짐을 지고 후보들을 내려다보았다.
“마리엔, 좀 더…….”
“좀 더, 뭐요?”
“하…….”
“나 듣고 있어요, 바일레온.”
“빠르게.”
“여기서 더 어떻게…… 응? 아, 앗, 자, 잠깐……. 나 떨어져요……!”
내가 당신을 떨어뜨릴 리 없지 않냐고 속삭이며, 제 허리를 붙들던 바일레온의 손길이 떠올랐다.
달뜬 녹색 눈.
그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밀려서 의자 다리 주변에 주름진 카펫.
마찰열.
옷을 입고 있는데도 존재감이 너무 뚜렷한 나머지 이러다가 바지가 뚫리겠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어쩌다가 딴생각이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이어졌지.’
원래는 훌륭한 시험 문제를 출제해낸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려 했는데 말이다.
‘하긴 바일레온과 그러고 나서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니까.’
공식적으로는, 그와 떨어져 지낸 지 이틀째.
마리엔은 벌써 키스를 야하게 하는 다정한 연인이 그리웠다.
◇ ◆ ◇
그날 밤.
자기엔 이른 시간이나 후보 대부분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방에서 혼자 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몇몇 후보의 침실 문 아래로 흰 봉투가 스르륵 들어왔다.
안에는 카드가 있었다.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이따 몇 시에 다음 장소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에서 오전에 본 시험 문제의 서체가 떠올랐다.
카드는 리셰른 후작의 서명으로 끝났다.
‘내 이름이 적혀 있긴 해. 한데 내게만 보낸 건가?’
‘이게 함정이 아님을 어떻게 믿지? 만약 이 자리에 나간 즉시 탈락하는 거면.’
‘거절하면 리셰른 후작이 앙심을 품진 않을까?’
‘야심한 시각에 남녀가 단둘이……. 달리 생각하려 해도 한 가지 의미로밖에 안 읽히는데.’
밀회.
그것도 후궁 후보와 선발을 맡은 총책임자의 만남이다.
애당초 카드를 보낸 이가 진짜 리셰른 후작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선택은 오롯이 후보 본인에게 달려 있었다.
누군가는 고민 끝에 나갈 채비를 했다.
누군가는 카드 귀퉁이를 촛불에 갖다 대고 태웠다.
누군가는 어둠을 틈타 약속 장소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늘 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가.
카드를 보낸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 ◆ ◇
마리엔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13번을 보았다. 잠옷이나 사복 차림이 아니었다. 그는 후보 전원에게 지급한 진줏빛 옷을 입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참고로 그의 쌍둥이 형에게는 동생보다 이십 분 이른 시각에 옆방으로 오라고 통지했다.
그리고 12번 후보는 시간이 됐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리엔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카드에 적었다.
과연 쌍둥이는 비밀을 공유했을까?
확실히 형제는 다른 후보들에 비해 이런 점에서 유리하다.
무엇이 정답이고 무엇이 오답인지 불확실한 상황.
형제는 비밀을 지켰다고 잡아떼기로 말을 맞춘다. 한 명은 마리엔을 만나러 나가고, 다른 한 명은 방에 남는다.
이러면 만일 어느 한쪽의 선택이 틀렸더라도 다른 쪽은 통과할 테니까.
“우리 둘만 있을 땐 가리개를 벗었으면 해요.”
우리 둘.
의미심장한 단어 선택에도 13번은 의연했다.
“네, 후작님.”
“더 가까이 와요.”
“네.”
그는 마리엔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랐다. 마리엔은 제가 여기서 선을 더 넘어도 그가 담담히 따를지 궁금했다.
예를 들어 폐하의 후궁이 아닌 제 정부가 되라고 제안하면 어떨까.
혹은 후궁으로 뽑아줄 테니 앞으로도 내궁에서 저와 긴밀한 유대를 이어가자며 지그시 손을 잡으면?
13번은 그때도 “네, 후작님.” 하고 답하면서 마리엔의 손을 마주 잡을까?
사십 분 전에 이 방으로 찾아온 한 후보는 마리엔이 은밀한 제안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후작님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며 손등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잘생겼는데 아깝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어둠 속에 잠복하고 있던 휴고가 눈짓했다.
움직일까요?
마리엔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역시 눈짓으로 대답했다.
겨우 손등에 키스했다고 휴고가 나설 필요는 없어요. 이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
‘오늘 밤, 아까운 후보를 그렇게 둘이나 잃었지. 우리 쌍둥이 동생분은 어떠려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교교한 달빛이 한 폭의 유화 같은 청년의 얼굴을 비추었다.
“안경을 끼고 머리를 뒤로 넘긴 건 형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선가요?”
“머리는 그런 면이 없지 않죠. 하나 안경은 정말 시력이 안 좋아서 착용한 거랍니다.”
13번이 안경을 벗더니 마리엔에게 건넸다.
“보시겠어요? 도수가 꽤 높습니다. 눈 좋은 사람이 쓰면 조금 어지러울 거예요.”
마리엔은 안경을 제 눈앞에 대어봤다.
“으응, 그러네.”
안경을 주인에게 돌려주기 전, 그의 얼굴을 슬쩍 확인했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12번과 13번의 용모는 놀라울 만큼 일치했다.
하다못해 얼굴에 점이라도 있으면 그걸로 분간하련만.
“등에 문신을 새겼댔죠.”
“네, 후작님.”
“크기는 어느 정도예요? 한 뼘?”
“네, 아마도.”
“아팠을 텐데.”
안경을 돌려받은 13번이 입꼬리를 올렸다.
“새길 당시엔 좀 아팠죠. 한데 벌써 몇 년 전이라…….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통증을 잘 참는 편이에요?”
13번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귀를 뚫을 생각은 없고요?”
“폐하의 취향이신가요?”
“아뇨, 내 취향이에요.”
13번이 마리엔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리엔은 진의를 파악하려는 침착한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후작님께선 왜 제게 묻지 않으십니까?”
“뭘요?”
“제가 후작님의 카드를 받은 사실을 형에게 말하지 않았는지를요.”
“……말했나요?”
“안 했습니다.”
그가 덧붙였다.
“방을 나설 때도 옆방의 후보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기척을 최소한으로 줄였죠.”
“음.”
“궁금하긴 하더군요. 형의 방 앞을 지날 땐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형도 같은 내용의 카드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끝까지 입을 다문 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오늘 마리엔이 절 불러내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비밀 엄수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대신 오라고 하신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했습니다.”
뜻밖의 전개에 마리엔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복도가 어둡더군요. 어지간히 밤눈이 밝아도 커튼 뒤에 숨은 절 알아채긴 어려울 것 같았죠. 그래서 말씀하신 시간이 될 때까지 거기서 기다렸어요.”
“아.”
“정확히 이십 분 간격으로 손님이 찾아오던데요. 신기한 건 후작님께선 방에서 나오지 않는데, 손님들은 두 방을 번갈아 이용하더군요. 지금 제가 있는 이곳과 옆방 말입니다. 그래서 알았죠. 안쪽에 샛문이 있다는 사실을요.”
“거기까지 간파했다…….”
“제 앞 차례 사람이 오지 않았던데요. 혹시 그게 제 형인가요?”
마리엔은 13번의 초콜릿 색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짧게 까닥였다.
사실 난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당신의 수법을 꿰뚫고 있었지. 그렇게 우쭐거리는 티가 묻어났다면 좀 별로였을 텐데.
총기 넘치되 자만하지 않는 느낌이 썩 괜찮았다. 본디 담백한 성정인 듯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형은 그런 사람이거든요.”
13번은 옷소매를 들추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워낙 시계가 작은 까닭에 마리엔은 그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도 지금에야 깨달았다.
“이십 분이 다 되어가네요. 제 다음 사람을 위해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리엔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13번은 얼굴 가리개를 착용한 후에 깍듯이 예를 갖췄다.
“참.”
그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근데 저, 탈락인가요?”
“비밀은 지키면서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아냈잖아요. 내가 당신이라면 고비를 잘 넘겼다고 기뻐할 텐데요.”
마리엔은 장난스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요? 다 알고도 내 정부가 되게요?”
“평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후작님.”
13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마무리까지 산뜻하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어둠 속에서 휴고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바라던 대로 2조의 네 명을 다 건지셨네요.”
“내가 웃고 있나요, 휴고?”
“쏟아지는 달빛보다 눈부시게요.”
가슴이 뿌듯함으로 벅차올랐다. 마리엔은 기지개를 켜며 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푹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