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38)
그림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꽤 큰데요.”
스케치하고 칠하고 물감을 말리는 데만도 시간이 제법 걸렸겠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바일레온은 다른 그림도 제가 그렸다고 조용히 말했다.
“다른 그림? 어, 그러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그림만 마리엔을 모델로 삼은 게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있는 풍경화인 줄만 알았던 다른 그림에도 분홍색 머리의 마리엔이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계단을 올라가는 마리엔.
구름다리가 있는 연못가에 앉아 갈색 머리 청년을 올려다보는 마리엔.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소녀들을 잡으려고 두 팔을 뻗은 마리엔.
“우리가 같이 있었던 순간이네요.”
마리엔은 웃는 얼굴로 세 번째 그림의 구석을 가리켰다.
그림 속 갈색 머리 청년은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빛이며 미소가 무척이나 따스한 느낌이었다.
“언제 이걸 다 그렸어요?”
마리엔은 액자를 세었다. 크고 작은 그림이 무려 열두 점이나 되었다.
“짬 날 때마다 틈틈이요.”
“바일레온,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혹시 마법이 걸린 시계라도 갖고 있어요? 다른 사람의 하루는 스물네 시간인데 바일레온만 마흔여덟 시간을 쓸 수 있나 해서요.”
재상부 업무에 저와 연애까지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니.
“이 집에 어떤 벽지를 바르고 무슨 가구를 넣을지까지 바일레온이 정했잖아요.”
“마리엔이 골치 아파하기에 좀 거든 것뿐인걸요.”
“그건 ‘좀’ 거든 정도가 아니었어요.”
다른 귀족가였다면 안주인이 내장 공사를 진두지휘했을 것이다. 리셰른 후작가에서는 바일레온이 그 역할을 맡았다.
처음엔 마리엔이 하려고 했다.
그러나 단순히 새집 꾸미기 정도로만 여기던 그녀에게 대저택 인테리어는 실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일단 건드리지 않을 곳과 수리할 곳을 정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공사감독과 바일레온의 도움을 받아가며 겨우 해결했더니, 샘플을 보고 고르실 차례라며 온갖 업자가 들이닥쳤다.
벽지의 색감을 고르니까 패턴을 고르라고 하고, 패턴을 골랐더니 소재를 묻는 식이었다.
마리엔 눈엔 다 비슷한 민트색 벽지인데 가격은 서너 배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했다.
“재미없어요…….”
그냥 대충 청소만 해서 살면 안 되냐고 묻는 마리엔은 완연히 지친 기색이었다.
“난 천장에서 물 새는 곳 없고, 벽에 곰팡이 안 피었고, 쥐랑 바퀴벌레만 안 나오면 돼요…….”
“갑자기 소박해졌네요, 마리엔. 처음엔 저택의 뼈대만 남기고 다 바꿀 기세더니.”
“흑.”
“당신만 괜찮으면 내가 할까요? 마리엔은 나중에 승인만 하면 되게.”
당시 마리엔은 끝없이 이어지는 ‘고르기’에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냐면 오데트에게 그냥 후작저를 반납할까 고민했을 정도다.
한데 바일레온 본인이 다 알아서 진행해도 되냐고 묻다니.
마리엔은 연인의 제안이 고맙기만 했다. 기꺼이 그에게 전권을 넘겼다. 그런 다음, 제가 진짜로 집중하고 싶은 일에 몰두했다.
빙의에 얽힌 의문점 해결이나 후궁 선발 준비 같은 것 말이다.
“바쁜 틈틈이 내 일까지 떠맡아줘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바일레온이 웃었다.
“자꾸 선의로만 포장되니까 양심이 찔리는데요. 내게 결정권을 달라고 한 건, 마리엔을 돕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어서예요. 이 집이 빨리 완성돼야…….”
그가 말끝을 흐렸다.
“빨리 완성돼야, 뭐요?”
마리엔은 뒷말을 재촉했다. 이에 바일레온은 속으로 대답했다.
‘빨리 완성돼야 분가를 하죠. 근데 분가를 하려면 결혼부터 해야 하니까.’
요컨대 어서 결혼하고 싶어서 열심히 신혼집을 단장한 것이라 하겠다.
“음, 계단을 올라온 김에 2층으로 가볼까요?”
“뭐야. 방금 말 돌렸어. 뭔데요? 바일레온, 응? 다른 이유가 뭐예요?”
마리엔이 재잘거리며 그를 뒤따랐다. 조용한 대저택 복도에 두 사람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울렸다.
2층 구경이 끝나갈 무렵, 두 사람은 부부침실에 도착했다.
희한하게도 바일레온은 하늘하늘한 휘장을 늘어뜨린 침대를 보고도 마리엔에게 키스하지 않았다.
부부침실에 들어선 순간, 오늘에야말로 끝까지 가겠구나 하고 직감한 마리엔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마리엔.”
그때 바일레온이 나직이 연인을 불렀다.
‘그렇지!’
마리엔은 웃음을 꾹 참았다. 예상 타이밍이 다소 어긋났을 뿐, 바일레온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왜요?”
“저기 발코니 보이죠?”
마리엔의 하늘색 눈이 그가 가리키는 발코니로 향했다.
‘설마…… 침대를 놔두고 저기서?’
바일레온이 말을 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볼래요?”
“바, 발코니로요?”
“네.”
“앞에는…….”
“저택의 후원이에요.”
마리엔은 주저했다. 옆집이 보이는 게 아니라 나무 빽빽한 후원이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만.
“아직 대낮인데.”
“……그렇죠.”
바일레온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물었다.
“낮은 별론가요? 밤이 더…… 좋아요?”
어째서인지 바일레온 또한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밤에는 잘 안 보일 텐데…….”
마리엔은 짧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드디어 이 남자가 결혼을 앞두고 봉인이 해제되었나 싶었다.
‘바일레온, 그런 취향이었어요?’
마리엔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싫지는 않아요.”
기겁할 정도로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결혼 10주년 맞이 특별 이벤트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 사유지, 그것도 어디 숲속 오두막에서라면 모를까.
수도 한복판의 저택에서 감행하기엔 몸이 사려지는 일이었다.
하나 바일레온은 재차 밖으로 나가길 권했다.
“발코니에 나가서 아래를 내려다봐요, 마리엔.”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마리엔은 일단 바일레온의 말에 따라보기로 했다.
“……아.”
후원에는 활짝 핀 해바라기가 금빛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순간, 마리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해바라기 한 송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해바라기는 원작에서 바일레온의 한결같은 사랑을 뜻하는 꽃이었다.
오데트에게 전하려다 우연히 카인과 키스하는 그녀를 목격하고는 절망에 빠진 그가 손에서 놓친 꽃이기도 하다.
원작에서는 쓸쓸히 바닥에 버려져야 했던 해바라기가, 지금은 마리엔의 후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뒤에서 바일레온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리엔은 원작과 달리 사랑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바일레온을 돌아보았다.
그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바일레온은 마리엔이 내궁에서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물었다.
“결혼반지부터 받고 청혼하는 남자는 어때요?”
마리엔은 웃음을 터뜨렸다. 둘만 아는 농담을 주고받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바일레온이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작은 다이아몬드에 둘러싸인 짙은 위스키 빛깔의 임페리얼 토파즈가 황홀한 광채를 뿜어냈다.
마리엔은 어찌 보면 꿀을 굳힌 것도 같고, 다른 각도에서는 불을 가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번에 이모님 댁에서 마리엔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었을 때요. 당신에게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기뻐 견딜 수 없었어요.”
바일레온은 기쁜 동시에 미안했다고 덧붙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을 위해 살아갈게요. 내가 마리엔의 옆에서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그는 제 귀걸이와 똑같은 보석을 연인에게 내밀었다.
“나와 결혼해주겠어요?”
마리엔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으면 눈물을 떨구고 말 것이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볼썽사납게 흐느낄 게 분명했다.
“네.”
마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 대답은 같아요. 네, 바일레온. 첫눈에 반한 열두 살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걸요.”
어쩌면 바일레온이 먼저 눈물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마리엔의 약지에서 결혼반지를 빼고, 그 자리에 청혼 반지를 끼워주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후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현관을 나섰다.
마리엔은 약지에서 빛나는 예쁜 반지를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물었다.
“오늘 청혼한 이야기도 블랙우드 공작에게 빠짐없이 전달할 테죠?”
그 말에 바일레온이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더니, 절 일깨워줘서 고맙다고 했다.
“하마터면 시기를 놓칠 뻔했군요. 청첩장은 받게 해야 하는데. 얼른 공작을 영지로 보내야겠어요.”
듣고 있으려니 뭔가 이상했다.
“공작을 영지로…… 보낸다니요? 블랙우드는 지금 영지에 있잖아요?”
카인은 작년 12월에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2월이다.
블랙우드 공작성의 벽을 짚은 후에 그대로 말을 돌려 수도로 오는 것도 가능할 시간인데.
“혹시 바일레온이 놈을 가뒀나요?”
“내가 그렇게 폭력적인 방법을 쓸 리 없잖아요. 블랙우드도 아니고.”
바일레온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인이 볼일 때문에 다른 지역에 장기체류 중이라고 설명했다.
“근데 마리엔, 아까 발코니에 나가기 직전의 상황이요.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우리 둘의 대화가 묘하게 엇갈렸던 것 같아요.”
바일레온이 물었다.
“무슨 뜻으로 아직 대낮이라는 말을 한 거예요? 사실 난 그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발코니 아래 해바라기를 보여주고 반지를 꺼내 청혼한다.
이 순서대로 잘할 수 있을까.
말도 꺼내기 전에 마리엔이 대뜸 바깥 풍경이 궁금하다며 발코니로 달려가면 어쩌지.
며칠을 고민해서 다듬은 문구는 유치하게 들리지 않으려나.
그는 속으로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였다고 했다.
온 신경이 청혼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마리엔의 모든 말도 그것과 연관 지어 해석해버렸다고.
“선선히 나갈 줄 알았던 당신이 주저하니까 얼마나 안달 나던지. 왜냐면 우리가 2층에 올라오고 나면, 그때부터 고용인들이 얼른 해바라기 화분을 옮기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고용인들이 저택에 있었어요? 왜 난 전혀 눈치를 못 챘지?”
“마리엔이 눈치 못 채게 숨어 있었으니까요.”
“그럼 지금도 다들 안에 있는 거예요?”
“아마도요. 온실에서 잘 지내다가 갑자기 겨울바람을 쐰 해바라기를 다시 안에 들여놓고 퇴근하겠죠.”
바일레온은 다시 원래 화제로 돌아왔다.
아직 대낮이라는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거냐고 물었다.
“달밤의 프러포즈가 더 좋다는 뜻은 아니고요?”
“어, 네. 그건 아니에요.”
“그럼요?”
마리엔은 말없이 웃었다. 정말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둘러댈 말이 없어서 웃는 거기 때문에 눈웃음에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나중에 알려줄게요.”
“나중에 언제요?”
“글쎄요. 결혼 1주년 기념일쯤?”
“나 기억력 좋아요.”
꼭 기억해뒀다가 그때 물어보겠단다.
그즈음이면 부부로서 여러 경험이 쌓였을 테니, 지금보다 뻔뻔하게 고백할 수 있겠지.
어차피 1년 뒤에나 닥칠 일이다. 마리엔은 당장 위기를 넘긴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한편, 나갈 때는 없었던 반지가 마리엔의 손에 끼워진 것을 보고 비어스 가 사람들은 난리법석을 떨었다.
“후작님은 분명 행복하실 거예요! 어머, 어떡하지! 내일 당장 웨딩드레스 사냥을 나갈까요?”
그 난리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