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4)
처음은 의무감이었다.
“바일레온 비어스, 오늘부터 영애를 모시게 됐습니다. 매주 한 번씩 찾아뵙고 독서 토론을 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까마득히 높은 붉은 벽돌 담장. 담쟁이 넝쿨은 벽을 타고 오르지만, 저택의 주인은 담 너머로 고개도 내밀지 못한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표현이 틀렸다. 창가에 앉아 볕을 쬐고 있는 소녀는 이 저택에 살지만, 저택의 주인은 아니다. 서재의 책 한 권조차도 그녀의 소유가 아니다. 이 저택 안에서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건 없다.
오데트 로즈. 빈껍데기 황녀.
심지어 지금은 황제가 남들 눈을 피해 숨겨둔 처지이기에 황녀 전하라고 불릴 수도 없다.
황제가 정식으로 공표한 다음에야, 오데트는 저택 대문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수십 년 후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오데트를 황궁 밖 별저에 계속 머물게 하라. 황제가 이런 유지를 남기고 눈을 감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영원히 여기서 늙어갈 수밖에 없는 거다.
바일레온의 눈길이 두꺼운 무릎담요에 머물렀다.
날도 많이 풀렸고 오데트는 지금 햇볕도 쬐고 있는 상태인데 저렇게까지 두꺼운 겨울용 담요가 필요할까.
황녀가 병약하다는 귀띔은 사실이었나 보다.
“비어스 백작가의 후계자를 붙이시다니……. 그분도 참 정치놀음을 좋아하세요.”
바일레온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소녀가 픽, 웃었다. 가냘프고 유약한 목소리. 하지만 말투는 깨진 유리 조각만큼이나 날이 서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영식을 따로 부르시지 않던가요? 내 말동무로 배정되고 나서요.”
“바일레온이라 편히 부르셔도 됩니다.”
“어찌 감히 제가.”
오데트가 고개를 돌려 바일레온을 응시했다.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장미색 눈동자는 그녀가 황가의 직계혈통이라는 증거였다.
“명문귀족가의 촉망받는 후계자분을 이름으로 부르겠어요. 난 아직…… 아무것도 아닌데.”
“제가 청한다면요?”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비어스라고 부르죠.”
차갑고 도도하다는 말은 오데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위압적인 느낌이었다. 바일레온의 머릿속에 오만함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비어스.”
“네, 영애.”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요.”
바일레온은 오데트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황후 폐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후엔 차례로 제1황비, 2황비, 3황비께 불려갔고요.”
“그분들이 뭐라고 하셨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요. 내 동태에 대해 보고하라고 했겠죠. 자신의 남편이나 다른 부인에게는 알리지 말고.”
“네.”
“그대는 뭐라고 대답했어요?”
곧은 장밋빛 시선이 바일레온에게 날아들었다. 바일레온은 사실 그대로 답했다.
“방금 하신 말씀, 다른 분들도 똑같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요?”
“네.”
바일레온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같은 보고를 다섯 번이나 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리고 다들 잊으셨나 본데요. 제가 아무리 수석 입학생이라도 제국 아카데미 커리큘럼을 따라가기란 벅차답니다.”
“설마 그 말도 한 건…… 아니죠?”
“아, 당연히 이 말은 안 했죠.”
바일레온이 살짝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맡기신 일은 평민 아이들도 학교에서 으레 하는 독서 토론일 뿐입니다. 그러니 보고를 들으셔도 크게 흥미로운 점이 없으실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기껏해야 감상이나 들으시게 될 거라고요.”
오데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열두 살이다. 황제가 파견한 전문가의 판단에 따르면 당장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해도 우수한 성적을 낼 열두 살이다.
그리고 할머니 문병 가는 는 일곱 살 아이에게나 들려줄 법한 이야기였다.
바일레온은 굳이 를 언급함으로써 내궁 여자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오데트가 똑똑하건 말건 자기는 동화나 들려주며 시간을 때울 작정이라고.
황후를 비롯한 내궁 여자들은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란한 얼굴로, 바일레온을 일단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본인과 똑같은 생각을 한 서로를 견제하는 데 몰두했다.
내궁은 정확히 황제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견제와 감시.
오데트처럼 장밋빛 눈을 지닌 황제는 황태자 시절부터 주변 인물을 용의주도하게 조종해왔다. 황후와 황비 셋을 둘러싼 세력도 예외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국정 능력은 그럭저럭한 수준이다. 바일레온은 황제가 세력다툼에 몰두하는 것만큼이나 국정에도 관심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직 작위도 없는 열여섯 살이 하는 생각치고는 너무 건방진가?
하나 황제는 바일레온의 이런 면까지도 높게 평가하는 게 틀림없었다. 예상컨대 자신은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요직에 앉혀질 터다.
“비어스는 언변이 좋네요.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법을 아는군요.”
“감사합니다.”
“너무 티 없이 해사하게 생겼다 싶었는데 지금 보니 좀 여우 같기도 하고…….”
이보세요, 아가씨.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외모를 평가하면 쓰나요. 하지만 바일레온 자신도 오데트를 조용히 뜯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말랐다. 식사가 부실하지는 않을 텐데 입이 짧은 편인가?
“뭐, 방금 대답의 진위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자신은 오데트를 속일 이유가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아무 힘이 없으니까.
저택의 피고용인들은 황제의 동생이 직접 뽑은 이들로, 오데트의 식사와 잠자리만 봐줄 뿐이다.
애초에 그녀에게 세 마디 이상 건네지 못하는 규칙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오데트가 먹는 메뉴와 입는 옷,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해뒀다가 자신의 진짜 고용주에게 보고한다.
오데트가 아무리 명석함을 타고났더라도 이 저택에 발이 묶인 이상 황제 손바닥 위의 체스말에 불과했다.
“질문사항이 더 없으시다면 이제…… 토론을 해볼까요?”
바일레온은 품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정말 나랑 동화 이야기나 하려는 거야? 오데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자존심 상한 표정이다. 싫은 티를 내니까 그제야 보통의 열두 살 같았다.
그리고 표지에 제목이 없는 책을 펼친 오데트는 눈이 동그래졌다. 가까이서 본 장미색 눈동자는 바일레온이 알고 있는 황제의 다른 핏줄들보다 훨씬 또렷하고 맑았다.
“이걸, 정말로 이거……. 나보고 읽으라고?”
놀라긴 놀랐나 보다. 갑자기 말을 놓네.
“설마 덫이야?”
오데트가 대번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럴 만도 한 게, 바일레온이 건넨 것은 제왕학의 기초라 불리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황태자만이 이 책의 내용을 배울 수 있었다.
“그분의 뜻입니다.”
“…….”
바일레온은 그렇게 매주 한 번, 오데트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소녀는 놀라울 만큼 총명한 한편 어떤 면에서는 염려가 될 만큼 순진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 기본적으로 황제 폐하, 그러니까 어린 당신을 이곳에 가둔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에요.
나한테 그런 속내까지 드러내면 안 되잖아요. 좀 더 스스로를 지켜야죠.
방금처럼 짓궂게 웃으면 나도 웃게 된단 말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 들르는 말동무가 비 오는 날이라고 해서 안 오지는 않을까. 그렇게 가슴 졸이는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면 나도…….
“그대 생각만 하게 돼.”
의무감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하나 바일레온은 타고난 다정한 성품을 어찌하지 못하고, 자존심 센 황녀를 차츰 가슴 깊이 들이게 됐다.
“비어스 경, 혹시 댄스 연습 상대가 돼줄 수 있어?”
시간이 흘러 어느새 열여섯 살이 된 오데트가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물었다.
“댄스 선생이 내 턴(turn)이 엉망이래.”
황궁에서 흠 잡히고 싶지 않아. 바일레온의 귀엔 오데트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이 들렸다. 그녀는 일주일 후면 4황녀로서 황궁에 들어가게 된다.
고대하던 순간이 도래했음에도 오데트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전하는 바일레온을 보며 “잘됐네.” 한마디 했을 따름이었다.
그래놓고는 혼자 발이 부르트도록 연습을 한 거다.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나의 황녀 전하.
그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여 오데트의 연습을 도왔다. 상처 난 발을 내보이기 싫어할 상대를 위해, 밤늦게 다시 저택에 들러 연고를 건네주고 가기도 했다.
“열감을 식히는 데에 도움 될 겁니다. 이 시간에 혼자 말 타고 달려온 제 성의를 봐서라도 꼭 바르고 주무세요.”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나 발 안 아파.”
거짓말. 잠깐 쉬는 시간에 오데트가 구두를 벗었을 때, 실크스타킹 끝이 빨갛게 물든 것을 봤다. 지금쯤이면 물이 닿기만 해도 쓰라릴 터다.
“그럼 마사지 크림이라고 생각하고 바르시고요.”
“경이 주니까 받는다만……. 하여튼 경은 어미 새 같아. 내가 무리하는 시늉만 내도 마음이 쓰여서 어쩔 줄 모르잖아.”
자신이 건네준 것은 사실 황실의 중에서도 황제 부부만 담당하는 의사가 만든 특제연고였다.
바일레온 비어스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재상이기에 어렵사리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바일레온은 그토록 애써서 구한 연고를, 혹시 오데트가 자존심 때문에 안 받을까 봐 평범한 물건인 양 말한 것이다.
이에 돌아온 말이 어미 새였다.
바일레온은 남몰래 쓴웃음을 삼켰다.
어미 새라.
확실히 짝사랑하는 상대에게서 듣고 싶은 표현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미 새 같은 남자와 사랑을 속삭이지 않는다. 어미 새와 키스하지 않는다. 어미 새와 결혼을 할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일이 밀렸을 텐데 굳이 여기까지……. 이제 다시 궁으로 돌아가 야근해야 하는 거지? 앞으로는 이러지 마. 물론 앞으로는 나도 궁에 있겠지만…….”
그대는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괜히 투덜대곤 한다.
그 말을 못 하는 게 그대만의 잘못은 아니다. 애초에 오데트 로즈에겐 따스함을 나눌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대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눈이 가려진 채 끌려와 이 저택에 감금되었다.
주변인들이 그대에게 친절했다면, 그대도 좀 더 부담 없이 감사인사를 할 수 있었을 거야.
다만 염려가 된다.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늘어놔야 하는 곳이 황궁인데, 특유의 성정 때문에 힘든 일을 많이 겪을까 봐.
“전하.”
바일레온이 나직이 말했다.
“일주일 후엔 이렇게 불러드릴 수 있겠군요.”
“……그래. 드디어.”
“걱정하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재상부는 전하와 뜻을 같이할 테니까요.”
간절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착시 같은 거였을까. 순간 오데트의 눈이 일렁였다.
“어미 새.”
비록 오데트의 동요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네, 어미 새.”
바일레온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씁쓸하게 낙담하는 마음을 그렇게밖에 달랠 수 없었다.
친우. 조력자. 충신.
그대에게 바일레온 비어스는 그런 단어로 정의될 테지. 그거면 됐어. 나쁘지 않아.
오데트는 자신을 반려로 원치 않는데, 제 감정만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건 바일레온의 방식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바일레온은 궁금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느낌이란 어떨까 하고.
아마 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