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6)
‘동맹 결혼 세계관엔 왜 마법이 없을까.’
마리엔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사실 독자로서 개인적인 취향을 말하자면 마법 없이도 무난하게 굴러가는 이 좋았다. 좀 더 현실적인 정치 복수극 느낌이 난달까.
일단 마법적 요소가 들어가면 많은 문제가 마법도구나 신력으로 해결된다.
다른 대륙에 있는 사람과 수정구로 대화할 수 있겠지. 환영을 보이게 할 수도, 물건이나 사람을 순간이동 시킬 수도 있을 터.
그리고 눈엣가시 공작에게 탈모 주술을 걸 수도 있다.
카인 블랙우드 깐 달걀 만들기를 결심한 이후로 마리엔은 마법 부재 세계관이 아쉬워졌다.
탈모 주술. 참으로 매혹적인 네 글자가 아닐 수 없다.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상급 주술도 아니니까, 좀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마리엔 디디의 공무원 월급으로도 커버 가능한 정도였지 않을까 하는 말이다.
‘이제 와서 그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냐만.’
마리엔은 어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바일레온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는 입이 무거운 데다 오데트와 비등할 만큼 머리가 좋다. 여차하면 인정에 호소할 수도 있다.
한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최소한의 정보만 알려주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마리엔은 그의 질문 공세에 말려들어 이것저것 얘기하고 말았다.
“대체 공작의 머리카락에 뭘 바르려는 거예요?”
“독극물은 아니에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돼요.”
“그러고 보면 디디 보좌관은 공작의 검은 머리카락을 유난히 싫어했죠. 게다가 저번엔, 4황녀 전하의 흑발 취향을 언급하며 내게 염색을 권했고…….”
그는 순식간에 추리를 전개했다. 제3보좌관이 바르려는 물질이 제모제라는 결론에 금세 이를 듯했다.
안 그래도 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서 정신이 좀 혼미하던 차였는데, 차분한 말투로 하는 추궁이라니!
바일레온의 매력도가 +999 올라갑니다.
마리엔의 심박수가 +999 증가합니다.
마리엔의 이성이 ‘마비’됩니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마리엔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
“비어스 경! 여러 목숨 살린다 치고 방법을 생각해봐 주시면 안 될까요?”
마리엔 디디의 전매특허 ‘다짜고짜 무릎 꿇기 기술’을 시전하자 바일레온의 평정이 깨졌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블랙우드 공작 옆에 얼쩡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절대 위험한 크림 아니에요! 제 목숨을 걸고 약속드려요!”
회상은 여기까지. 마리엔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복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제법 흡족했다.
머리엔 갈색 가발을 썼고, 줄무늬 드레스에 흰 앞치마를 둘렀다. 앞치마의 주머니 안에는 제모제와 나무 주걱을 숨겼다.
오늘 자신은 황궁 시녀로 위장해서 북부 놈의 샴푸 용기에 제모제를 넣을 계획이었다.
‘천재적인 아이디어야. 역시 바일레온. 제국의 태양!’
바일레온이 알려준 해결책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크림에서 악취가 나는 게 아니라면 공작의 샴푸 용기에 넣는 게 가장 확실할 거란다.
제국 아카데미 시절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오 분이란 시간도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공작은 머리의 거품을 놔둔 채 면도를 하고 스펀지로 몸까지 문지르는 습관이 있다나.
그제야 마리엔은 두 사람이 제국 아카데미 선후배 관계임을 기억해냈다. 바일레온이 제공한 정보에 마리엔은 두 눈을 빛냈다.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놈은 아까 황태자궁에 불려갔지. 보통 방 주인이 자리 비운 동안 청소를 하니까…….’
마리엔은 눈처럼 흰 수건을 보란 듯이 팔에 걸쳤다.
‘기회는 지금이야!’
모퉁이를 돌아 카인이 묵는 방 앞에 다다랐다. 마리엔은 무성의한 노크 후에 방문을 열었다.
북부 놈은 황궁의 손님방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곳을 쓰는 중이었다. 단독서재, 휴게실, 접객실, 황금 수도꼭지가 달린 욕실까지 딸린 방이다.
마리엔은 등 뒤로 문을 닫은 다음 발뒤꿈치를 들었다. 멋들어진 그랜드피아노 옆을 총총 지나 욕실로 이동했다.
드디어 고지가 눈앞이었다. 마리엔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욕실의 기다란 문손잡이를 밀었다. 화려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샴푸 용기만 찾으면 돼. 보통 욕조 근처에 있겠지…….’
마리엔은 욕실 안으로 두 걸음을 내디뎠다. 공기가 이상할 만큼 촉촉하고 향기로웠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마리엔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분명 아까 카인 블랙우드가 황태자궁에 가는 모습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근데 왜 욕조에 저놈이……? 언제 돌아왔지? 어떻게 나보다 빨리 온 거야?’
마리엔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얼어붙었다.
‘치, 침착하자. 마리엔 디디. 아직 놈이 널 본 건 아니니까.’
하지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말까. 칠까. 말까. 칠까. 말까.
“거기, 너. 찬 공기가 들어오잖아. 문 닫아. 나가기 전에 찜질 수건 좀 바꾸고.”
카인이 눈을 덮고 있던 수건을 트레이에 내려놨다. 그는 욕조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젖힌 채 제 지시가 이행되기를 기다렸다.
직전까지 도망칠까 말까 여부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마리엔이다. 그녀는 북부 놈이 계속 눈을 감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방금 뭐랬더라. 찜질 수건을 바꾸라고 했던가.
‘내가 시녀인 줄 알아.’
욕조 밖으로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마리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빌어먹을 시꺼먼 머리카락. 저것만 없으면 다 되는데. 저거 하날 못 없애서 바일레온 눈에서 피눈물 흐르는 꼴은 못 보지.
‘설령 이게 네놈의 함정이라도 난 피하지 않겠어.’
결심이 섰다. 마리엔은 세면대 위에서 여분의 찜질 수건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놈의 사각지대로 갈 때까지 놈이 눈을 뜨지 않기만을 빌었다.
천천히. 침착하게.
마리엔은 카인의 등 뒤로 이동했다. 팔만 쭉 뻗어 뜨거운 물에 찜질 수건을 담갔다가 물기를 짜냈다.
수건 안주머니에 든 말린 허브가 물에 적셔지자 공기 중에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보통의 로판이라면 이쯤에서 카인 블랙우드의 나신 묘사가 시작될 거다. 넓은 어깨에 근육질 가슴이 어쩌고저쩌고. 전쟁이 남긴 상흔으로 가득한 등에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니 뭐니.
그러나 그건 이미 원작에서 지겹도록 읽었다. 마리엔의 관심사는 북부 놈의 겉가죽 따위가 아니었다.
‘샴푸 용기…… 여기 있다.’
진한 하늘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리엔은 머릿속으로 동선을 정리했다.
그때였다.
“동작이 꽤 굼뜨…….”
카인의 목소리에 슬며시 짜증의 기색이 비쳤다. 혹시라도 눈을 뜨지는 않을까. 마리엔은 즉시 찜질 수건으로 놈의 눈을 덮었다.
물기를 적당히 머금은 수건은 철썩, 차진 소리를 내며 카인의 안면을 강타했다.
“손힘은 꽤 좋군.”
이 미친놈이 얼굴 처맞고도 뭔 소리야.
“어깨를 좀 주물러라.”
내가 진짜 네놈 꼭 감방 보낸다.
마리엔은 시선을 샴푸 용기에 두고서는 카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맨살끼리 닿는 느낌이 징그러웠다.
최애 맨살도 아직 못 봤는데, 북부 놈 알몸을 만지다니 최악이다.
“오른쪽.”
놈은 가당찮게도 좀 더 집중해서 주무를 방향까지 지시했다.
“왼쪽.”
이 새끼 진짜 알고 이러는 거 아니야?
“주먹으로 두드려.”
마리엔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건 네놈이 먼저 시작한 거야, 카인 블랙우드. 마리엔은 아주 다 터트려 부술 기세로 어깨를 내리쳤다.
쇳덩이에다가 사람 가죽을 뒤집어씌웠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놈의 어깨는 단단했다. 얼마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마리엔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거 다 가짜 근육, 공갈빵 같은 근육이야. 머리카락만 없어지면 푸시시 꺼질걸!’
마리엔은 놈을 향한 증오를 주먹에 실었다.
“넌 조용하고 힘도 세군. 원래 오던 시녀보다 훨씬 나은데.”
빌어먹을 놈이 감히 평가까지 하고 있다. 마리엔은 분을 참으며 한 손으로 샴푸 용기를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여는 데까지 성공했다. 마리엔은 안에 든 샴푸 대부분을 욕실 바닥에 쏟아부었다. 제모제를 샴푸 용기 입구에 댈 때까지도, 카인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흰 제모제가 용기 안으로 쪼르륵 흘러 들어갔을 때였다.
“왜 갑자기 한 손으로만 하지?”
카인이 예고 없이 몸을 돌렸다. 이에 그의 눈을 덮고 있던 찜질 수건이 물속으로 떨어졌다.
비상! 증거를 은폐해야 한다.
순식간에 제모제를 앞치마 속으로, 샴푸 용기는 제자리에 돌려놓은 마리엔이 상대를 위협했다.
“꼼짝 마.”
마리엔의 손엔 커다란 가위가 들려 있었다. 앞치마의 다른 주머니에 넣어 온 물건이었다.
어떻게 손을 그렇게 빨리 움직였느냐고? 모르겠다. 아마 마지막 수단만은 들켜선 안 된다는 간절함에서 나온 초능력이 아닐까.
“움직이면 자른다.”
“……뭘 자르는데?”
“이거.”
싹둑.
마리엔은 움켜쥐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고는 냅다 튀었다.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카인 블랙우드가 상황을 파악하고 쫓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조금만 더 멍한 채로 있어라. 거리 좀 벌리게.’
마리엔이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였다. 손님방 쪽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마리엔은 맨몸에 바지만 꿰입은 카인과 눈이 마주쳤다. 시퍼런 살기가 그의 등 뒤에서 너울거렸다.
‘튀자.’
마리엔은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갔다. 온 힘을 다해 복도를 내달리면서 소리쳤다.
“이게 갖고 싶었어! 좀 봐주면 안 돼?”
미친놈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추격해왔다. 죽는다. 죽는다. 이번에야말로 목 부러진다. 없던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키는 기세에 마리엔은 소리를 질렀다.
“좋아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간직하는 건 오래된 풍습이라고!”
징그러운 놈. 그만 쫓아와. 계속되는 전력 질주에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어차피 쓸 충격요법이라면 차라리 키스로 무마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조금 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쪽이 더 끔찍하다.
“꺄아아아! 비어스 겨어어엉!”
마리엔은 결국 바일레온의 이름을 힘껏 외쳤다.
“살려주세요!”
마리엔이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민 사람들은 추격자가 블랙우드 공작임을 확인하고는 부리나케 문을 도로 닫았다.
‘이대로 재상부까지 달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놈이 얼마나 가까이 따라붙었는지 확인도 못 하겠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잡힐까 봐.
“비어스 겨어엉!”
사람은 다 죽는다. 그래도 마리엔 디디는 오늘 죽으면 안 된다. 최소한 북부 놈 머리통이 깐 달걀이 된 꼴을 보고 눈을 감아야겠다.
마리엔이 모퉁이를 돈 순간, 갑자기 벽에 걸린 그림이 움직였다. 비밀 통로를 개방한 이는 다름 아닌 바일레온이었다.
태초에 신께서 빛이 있으라 명하시니 바일레온 비어스가 태어났더라.
마리엔은 울먹이며 구원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비밀 통로 문이 닫힘과 동시에 카인 블랙우드가 모퉁이를 돌았다.
마리엔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