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7)
비밀 통로 끝에는 웬 방이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공간인 듯 가구 위에 흰 천을 씌워놓았다.
“비어스 경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어두운 통로를 지나오는 동안에는 혹시라도 카인 놈이 쫓아올까 입도 벙긋 못 했다. 바일레온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걷기만 했을 따름이다. 밝은 곳으로 나온 마리엔은 그제야 바일레온에게 인사를 했다.
“아, 이제 손 놓으셔도 돼요.”
완전 아쉽지만.
몇 초라도 더 잡고 있으면 나야 좋지만.
마리엔은 제 자그만 손을 잡고 있는 바일레온의 손을 내려다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곧게 뻗은 긴 손가락, 그 끝에 가지런히 다듬어진 손톱, 대미를 장식하는 손등의 핏줄.
‘역시 남자의 매력은 손이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시 남자는 가슴으로 말해야지, 하던 자신이었다. 한마디로 마리엔 디디가 꼽는 남자의 매력 기준은 그날의 바일레온에 의해 좌우됐다.
이러다 바일레온의 허리에 매달리는 일이라도 생기면 마리엔은 금세 생각을 바꿀 게 분명했다.
역시 허리를 빼고 남자의 미를 논할 수 없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우리 비어스 경이 제일이야, 하고.
“한데 비어스 경, 어쩌다 절 구해주신 거예요? 지금은 집무실에 계셔야 할 시간 아닌가요?”
마리엔은 조금 놀란 듯이 떨어져 나가는 최애의 손을 보며 물었다.
‘내가 말 안 했으면 계속 잡고 있을 수도 있었겠는데.’
역시 아쉬웠다.
“아침에 출근할 때 디디 보좌관이 웬 꾸러미를 들고 왔잖아요. 그러더니 시녀 분장하고 재상부를 나가기에 오늘이 디데이구나 싶었어요.”
마리엔은 나름대로 남들 시선을 피해서 준비했건만, 바일레온은 모든 것을 훤히 꿰고 있었다.
벽에도 비어스 재상의 눈과 귀가 있다.
마리엔은 궁중에 떠도는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처음 들었을 땐 단순히 재상 쪽 소식통이 많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근데 그 벽이 진짜 벽일 수도 있었던 거다.
“그놈…… 공작은 비밀 통로를 모르나 봐요.”
“그런 게 있다는 사실만 알죠.”
바일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블랙우드 공작이 가진 힘이라면 비밀 통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하긴.
마리엔은 수긍했다.
힘이 세면 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긴 하다. 꽤 많은 일이 그렇다.
마리엔 자신만 해도 힘이 부족해서 바일레온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나. 제게 카인을 능가하는 힘이 있었으면 일찌감치 끝났을 문제였다.
한 손으로 놈의 멱살을 잡고는 다른 손으로 머리에 제모제를 치덕치덕 발랐겠지. 직접 밀어주는 손맛도 끝내줬을 텐데.
“결국 머리카락을 자른 거예요?”
그는 마리엔이 들고 있는 흑발 한 줌을 보며 물었다.
“네, 근데 이건 주의를 돌리려고 한 짓이에요. 제모제 넣던 도중에 발각당할 뻔했거든요. 비장의 무기만은 안 들키고 싶어서.”
“주의 돌리는 용도라기엔 좀…….”
“많이 잘랐죠?”
“그러네요.”
무의식중에 원한이 발현됐나 보다. 마리엔은 처치 곤란인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다음 순간, 바일레온이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디디 보좌관만 괜찮다면 한동안 우리 집에서 묵는 건 어떤가요? 아무리 블랙우드 공작이라도 비어스 백작저에 난입할 순 없거든요.”
마리엔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출퇴근도 같이 해요. 같은 마차로.”
“저, 비어스 경. 뜻은 감사하지만 절 위해 그렇게까지는.”
“불안하잖아요.”
바일레온이 말했다.
“아까 살려달라고 외치던 디디 보좌관 목소리가 어땠는지 알아요? 그렇게 절박한 목소리는 처음이었어요. 혹시 내가 타이밍을 못 맞출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제가 황궁 복도가 떠나가라 소리치긴 했다. 한데 그때는 그때고 이젠 상황이 종료되었지 않나.
추태를 보였다는 생각에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마리엔은 거듭 사양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바일레온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어제 보좌관의 부탁대로 더는 캐묻지 않고 해결책을 알려줬죠. 그러니 이번엔 내 말에 따라요. 사양하지 말고 백작저에 머무는 겁니다. 알겠어요?”
상관과 같이 출퇴근이라. 여기가 다른 직장이었다면 상상만으로도 혈압이 치솟을 거다.
하나 마리엔의 직장은 재상부고, 이런 제안을 한 상대는 바일레온이었다.
‘배려심 깊기도 하지.’
사실 마리엔 입장에서야 고맙기만 한 권유였다. 아까는 최후의 무기를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만 앞서서 놈의 머리카락을 썩둑 잘랐다.
당연히 카인 블랙우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터.
이따 자신이 업무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면 놈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다음 단계는 마리엔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진행됐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바일레온이 직접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숨 고르기뿐이었다.
한편 마리엔 대신 방에 가서 짐을 싸 온 경호원이 말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방문은 이미 박살 난 상태였다고. 그리고 뻥 뚫린 문 앞에서 블랙우드 공작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고 말이다.
“방에 불을 지르진 않았던가요?”
마리엔은 낡은 트렁크를 얼른 열어보며 경호원에게 물었다.
“아뇨, 불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내 비싸고 소중한 침구……. 칼로 매트리스를 막 그어놓지는 않았고요?”
“아뇨, 침대는 멀쩡했습니다.”
일지, 노트, 필기구, 제모제 두 통, 몇 벌 안 되는 옷가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경호원은 심지어 마리엔이 서랍에서 종종 꺼내 보곤 하는 재상의 초상화까지 야무지게 챙겨 왔다.
“흡.”
마리엔은 급히 초상화를 뒤집어 내려놨다.
안 들켰겠지? 바일레온은 매너를 지키느라 숙녀의 짐꾸러미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어. 그리고 나 방금 손놀림 되게 빨랐어.
마리엔은 조심스레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경악한 당사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면 최악인데.’
다행히도 바일레온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마리엔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경호원에게 물었다.
“그럼 문만 박살 내놓고 방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예, 제가 보기론 그랬습니다.”
경호원이 한 박자 늦게 본인의 말을 정정했다.
“옷장 경첩 하나가 떨어지긴 했더군요.”
“황당하네.”
마리엔이 기가 막힌 소리를 냈다.
“내가 옷장에 숨기라도 했을까 봐?”
놈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 물건은 얼추 다 가져온 것 같다. 마리엔은 트렁크를 잠그다 말고 경호원을 올려다봤다.
“근데 방금 블랙우드 공작이 문 앞을 지키는 동안 짐을 싸 오신 거예요?”
듣다 보니까 너무 이상했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경호원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제 지위나 무력은 공작 각하에 댈 바가 아니지만 언변은 쓸 만합니다.”
옆에서 바일레온이 특출 난 언변을 보고 뽑은 경호원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무슨 경호원을 말재주로 뽑아요. 정말 바일레온 비어스다운 결정이네.
바일레온의 뒤에 밀착한 채로 재상부에 돌아갔더니 과연 분위기가 흉흉했다. 블랙우드 공작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 갔단다.
내일 정오, 본인의 응접실에서 하는 오찬 모임에 재상은 제3보좌관을 데리고 참석하라고.
“놈의 목표물은 전데 왜 저 혼자 오라고 안 했을까요?”
마리엔이 검은 머리카락 한 줌을 내려다보며 의아해했다.
“어차피 내가 디디 보좌관 혼자 안 보낼 걸 아니까요.”
바일레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제3보좌관의 책상을 재상 집무실로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유는 ‘안전상의 문제’였다.
원래 바일레온은 본인 책상 근처에 보좌관 책상을 두라고 했다. 그러나 마리엔의 극구반대로 책상은 출입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우아한 파티션이 바일레온과 마리엔을 분리하는 유일한 도구가 됐다.
상관과 이 정도로 밀착 생활을 해야 하다니. 자유시간 끝. 괴상한 혼잣말 끝.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갑갑해야 하는 게 맞는데.
‘역시 재상부 복지가 최고야…….’
마리엔은 파티션 너머로 수려한 바일레온을 훔쳐보며 한숨을 쉬었다.
◇ ◆ ◇
“저 때문에 비어스 경이 번거롭게 됐네요. 죄송해요.”
“스물두 번째 사과인 거 알아요?”
바일레온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아요. 그리고 애초에 내가 제안했으니, 디디 보좌관이 사과할 일도 아니고.”
“하지만 저 때문에 일찍 퇴근하셨잖아요.”
“맞아요.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가겠죠. 가족들이 좋아하겠어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마리엔은 괜히 창밖을 내다보는 척했다.
‘어감이 좀, 뭐랄까.’
상대는 그런 뜻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는데도 아주 야릇하게 들렸다.
가족들이 좋아하겠어요?
‘꼭 백작가에 인사드리러 가는 것 같잖아.’
꺄, 마리엔 디디 미쳤나 봐. 못 하는 생각이 없지. 하지만 상상은 죄가 아니니까?
혼자 얼굴을 붉혔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가 옷을 갈아입을 걸 그랬나 후회했다가. 백작저까지 가는 동안 마리엔은 조금도 지루할 새가 없었다.
그러고는 마차가 멈췄다.
‘드디어……!’
마리엔의 기대감이 최고치에 다다랐다. 원작에는 백작가에 대한 묘사가 적었다. 마리엔 또한 바일레온의 집에 가본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원작에 없는 내용인 거다. 책 속에 들어온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
바일레온이 마차 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봤다.
“참, 미리 말하는 걸 깜빡했군요.”
“뭘요?”
“우리 가족은 약간…… 이상해요. 다른 귀족가와 분위기가 꽤 다를 거예요. 가족들의 호의가 부담스러우면 언제든 거절해도 돼요.”
“어차피 전 다른 귀족 저택에 방문해본 적이 없어서요. 근데 뭐가 어떻게 이상한데요?”
“그게…… 겪어보면 알아요.”
도대체 가족들이 어떻기에 바일레온이 경고까지 하는 거지.
마리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일레온이 어디 보통 인물인가 말이다. 그가 못 품는 사람은 없는 줄 알았다.
“발밑 조심하고.”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주었다. 마리엔은 감사를 표한 뒤,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기교를 부려 다듬은 정원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곳은 귀족가의 정원이라기보다 수목원 같았다. 공기 중에도 싱그러운 풀냄새와 흙냄새가 떠다녔다.
마차가 들어올 때부터 정원 구석에서 일하던 중년남이 밀짚모자를 벗고는 마리엔에게 다가왔다.
“비어스 백작가에 오심을 환영합니다요, 아씨.”
“앗,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마리엔은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했다.
“비어스 경의 제3보좌관으로 재상부에서 일하는 마리엔 디디입니다.”
“디디 아씨였구먼요.”
“편하게 마리엔이라고 부르세요.”
“상냥하기두 하시지.”
걷어 올린 소매며 군데군데 흙이 묻은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백작가의 정원사 같았다. 아마 바일레온 도련님의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인물일 것이다. 그러니까 첫째 도련님의 손님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는 거겠고.
“실례지만 제가 손이 이래서요. 손님께 악수를 청하기가 좀 그렇구먼요.”
중년남이 흙투성이 손을 내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마리엔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실례가 아니라고 화답했다.
환영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아직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이지만, 백작가의 따스한 분위기에 입가가 저절로 누그러졌다.
이윽고 중년남이 바일레온을 쳐다보며 말했다.
“왔느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바일레온이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
“기별은 들었다. 이 아가씨가 블랙우드의 노여움을 샀다고.”
“네.”
“블랙우드가 아니라 블랙우드의 죽은 할아비라도 함부로 내 정원에 발 들이는 건 용납 못 하지. 내 손님을 해치는 건 더더욱 안 되고.”
중년남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은 후에, 일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마리엔은 뭔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옆 사람을 쳐다봤다.
“연기가 취미세요. 내 동기들도 모두 속았죠.”
바일레온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