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8)
‘그러니까 저분이 바일레온의 아버지, 비어스 백작이라는 거지?’
마리엔은 집 안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중년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신없이 식물을 들여다보던 백작은 마리엔과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굽실거렸다. 어서 들어가길 권하는 몸짓은 정말 나이 지긋한 일꾼 그 자체였다.
마리엔은 다소 혼란스러워졌다.
“백작님 취미가 연기라고 하셨죠. 그럼 오늘 캐릭터 설정이 정원사인 건가요?”
“아뇨, 저건 설정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실제로 식물 가꾸기를 좋아하세요.”
바일레온이 망설이다가 부연설명을 했다.
“무언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무슨무슨 광이라고 하잖아요. 전쟁광처럼요. 아버지께선…….”
“첫째가 아비 욕한다! 첫째가 아비 욕한다!”
푸드덕.
횃대에 앉은 커다란 흰 앵무새가 목소리를 높였다.
“집안 꼴 잘 돌아간다!”
마리엔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백작가에서 거대 앵무새와 맞닥뜨릴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리고 상대가 아무리 앵무새라도 비어스 저택 안에서 이토록 경박한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방금 저 새가 집안 꼴 잘 돌아간다고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푸드덕.
“아비가 죽으면 범인은 너! 범인은 너!”
누군가는 저 새에게 말을 가르쳤을 터다. 제국의 태양 바일레온 비어스를 배출한 집안에서 대체 누가?
혹시 겉으로는 온화한 척하지만 바일레온을 배척하는 흑막 이복형제가 있던가. 마리엔이 급기야 그런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였다.
“탐정아, 추리가 엉망이구나.”
버터색 머리를 틀어 올린 귀부인이 혀를 차며 등장했다. 동그란 안경을 쓴 그녀가 앵무새를 향해 말했다.
“단순히 욕을 했다고 부친살해범으로 몰다니. 비약이 심해.”
“어머니, 저 욕 안 했어요.”
“물론 안 했겠지.”
그녀가 웃자 두 사람이 모자간임이 분명해졌다. 부드럽게 웃는 인상이 똑 닮았다.
“난 라비니아 폰테 비어스. 황실 수사관으로 활약했던 폰테 후작의 증손녀이자 현재의 비어스 백작부인이에요. 우리 손님의 이름은?”
“마리엔 디디. 어…… 재상부 제3보좌관입니다.”
“이런. 기억하기 쉬운 성인 데다 머리 색까지 독특하네.”
백작부인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학교 다닐 때 주목 좀 받았겠어요.”
“아마 그랬겠죠?”
“특정되기가 너무 쉬워. 아가씨가 어떤 사건의 범인이기는 힘들겠는데……. 그런데도 블랙우드 공작의 노여움을 사서 살해위협을 받았다죠?”
백작부인은 키가 컸다. 아까 남편인 비어스 백작도 키가 컸었다. 키 큰 부부 사이에서 키 큰 장남이 나왔나 보다.
반면 굽 있는 부츠를 신고서야 가까스로 160센티미터가 되는 마리엔은, 아까부터 계속 거리를 좁혀오시는 백작부인 때문에 눈 둘 데를 찾는 중이었다.
“대담하기도 하지.”
백작부인은 거의 마리엔의 뺨에 뽀뽀하기 직전에서야 접근을 멈췄다. 풍성한 버터색 속눈썹이 팔락거렸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네에…….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바일레온이 마리엔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제 뒤로 숨겼다.
“디디 보좌관은 종일 위협에 시달리다가 백작저로 피신 온 거예요. 여기서만큼은 편히 쉴 수 있게 도와주세요.”
“너 또 슬슬 시작이구나.”
백작부인이 자세를 바로 하더니 안경을 쓱, 밀어 올렸다.
“과보호.”
“이게 뭐가 과보호라고 그러세요. 전 부하직원을 돕는 것뿐입니다.”
백작부인은 아들의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렸다. 몸을 쓰는 방식이 다분히 연극적이었다. 마리엔은 백작 부부가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탐정아. 새로운 표현을 가르쳐줄까? 이런 걸 두고 허울 좋은 핑계라고 한단다. 허울 좋은 핑계.”
푸드드드.
“따라 해보렴. 허울, 좋은, 핑계.”
푸드드.
“허울, 좋은, 핑계.”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앵무새가 일갈한 뒤 복도 저편으로 날아갔다.
다행히 마리엔의 정신이 여기서 더 빠지기 전에 손님방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개인 욕실이 딸린 방은 좁아터진 보좌관 숙소에 비하면 눈물 날 만큼 널찍하고 아름다웠다. 하녀는 옷장의 드레스를 포함한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쓰셔도 좋다고 말했다.
“짐 풀기를 도와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트렁크 하나가 전부라……. 그보다 식사시간은 언제인가요?”
“저녁식사는 7시입니다. 이따 1층으로 내려오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혼자 남은 마리엔은 옷장을 열어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요정의 날개로 지은 듯이 가볍고 매끄럽고 오묘한 광택이 나는 드레스가 옷장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 세 벌은 무도회용 드레스인지 다른 옷보다 눈에 띄게 화려했다.
마리엔은 수백 개의 크리스털을 하나하나 붙여 눈꽃을 표현한 연하늘색 드레스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당장 내일 입고 출근할까?”
제3보좌관이 무도회에 초대받을 일이나 있겠어? 출근할 때 아니면 영영 못 입을걸.
사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출근복으로 입을 생각은 없었다. 움직이다가 크리스털이 길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냥 방에서 기분만……. 세상에, 이것들 다 진짜 보석이겠지?”
화장대 서랍을 열어본 마리엔은 2차로 놀랐다. 서랍 한 칸 전체가 보석상의 진열대처럼 꾸며져 있었다.
검은 벨벳 위에 놓인 다양한 목걸이가 마리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틴 리본 끝에 달린 물방울 사파이어며, 세 줄짜리 진주 목걸이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는 다이아몬드까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손님한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그냥 걸라고 준다고?”
마리엔은 당황해하며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래, 어쩐지 목걸이만 있다고 했다. 이번엔 브로치와 팔찌가 나왔다. 양옆으로 열리는 서랍을 뒤늦게 발견해서 거기도 열어보자 머리 장식이 있었다.
마리엔은 페리도트가 박힌 금빛 티아라까지 본 후에 서랍을 닫았다. 조심스레 팔뚝을 꼬집어봤다. 너무 조심스러웠는지 느낌이 잘 오지 않았다. 어쩌면 꿈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토록 달콤한 꿈이면 무조건 지각 확정이다. 어서 깨어나라, 얍.
“아!”
세게 꼬집었더니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마리엔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제게 찾아온 행운이 믿기지 않았다.
‘나도 이제 욕조에 몸 담글 수 있어!’
이 순간만큼은 북부 놈을 향한 증오도 옅어졌다. 마리엔은 활짝 웃으며 개인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 ◆ ◇
백작가의 저녁식사 자리는 어떤 분위기일까.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식당으로 가는 동안 마리엔의 머릿속에선 막간극이 펼쳐졌다.
장르는 당연히 자극적인 신파다.
아까까지 함께 웃으며 대화했던 백작가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양 돌변할 것이다.
그쪽과 우린 신분이 엄연히 다르거늘 어떻게 같이 식사를 하겠어요? 디디 양, 상식적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실망이 크네요.
웬일인지 자신의 구원자 바일레온은 보이지가 않는다. 하녀는 신분 낮은 손님에게 어울리는 식사 장소로 마리엔을 데려갈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주방 구석의 낡은 탁자 위엔 묽은 감자 수프와 딱딱한 빵, 접시 위에 굴러다니는 콩, 식은 소시지 따위가 있기 마련이다.
‘이제 네 주제를 파악했겠지? 우리 아들과 헤어져! 하면서 수표를 내미시면 정말 흥미롭겠다.’
헤어지다뇨, 어머님. 애초에 사귄 적도 없습니다.
전 댁의 아드님을 차기 황제의 반려자로 만들고자 하는걸요. 하지만 어머님이 주신다니까 요건 활동비 조로 받아둘게요.
그리고 마리엔의 화려한 막간극은 식당에 들어선 순간 끝났다.
“디디 보좌관, 이쪽에 앉아요.”
“앗, 넵.”
바일레온이 직접 의자를 빼주었다. 마리엔은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식탁 양 끝으로 백작 부부가 앉고, 한쪽에는 바일레온과 마리엔, 다른 쪽에는 세 남매가 앉은 구도였다.
바일레온의 동생들 모두 갈색 머리였다. 각자 짙고 옅음의 차이가 있을 뿐 어쨌든 갈색이다.
이런 걸 바로 눈호강이라고 한다.
“얘들아, 얼른 먹자꾸나. 우리 손님도 많이 들어요.”
“네, 감사합니다.”
마리엔의 호강은 이제 시작이었다. 식사는 꿀맛이었다. 마리엔은 새로운 메뉴를 먹을 때마다 인상을 쓰며 감탄했다.
“황궁에서 먹는 것보다 열 배는 맛있어요……!”
“우리 집 주방장 솜씨가 괜찮긴 해요. 근데 황궁에서 대체 뭘 주는 거예요?”
이 집의 셋째이자 흰 앵무새의 주인인 가렛이 큰형을 쳐다봤다.
“재상님, 뭔가 조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직원 복지가 엉망인데요.”
“가렛 오빠, 말은 바로 해야지. 보좌관님이 큰오빠 밑에서 일하긴 하지만 일반상점가의 직원과는 다르다고.”
막내딸이자 검은 고양이의 주인인 데이지가 토를 달았다.
“아무리 큰오빠가 재상이라도 궁내 식당의 품질까지 관리할 순 없어.”
정작 말을 꺼낸 가렛은 그냥 해본 소리였다고 대꾸하는데, 데이지가 갈색 눈썹을 실룩이며 물었다.
“근데 정말 어떻게 조치 못 하나?”
올해 열네 살이라는 소녀는 퍽 진지한 표정이었다.
“먹는 건 중요하단 말이야.”
평소에도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지내면, 미식이 아닌 음식은 정말 먹고 싶지 않겠다.
마리엔은 풍미 진한 소스를 듬뿍 끼얹은 구운 닭고기를 꼭꼭 씹어 삼킨 뒤에 말했다.
“아니에요. 조치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하진 않아요. 수요일에는 특식도 나오는걸요. 그저 비어스 백작가의 수준이 뛰어난 것뿐이에요.”
“그렇담 다행이에요. 큰오빠는 지금도 일에 파묻혀서 집에 들어오질 않거든요.”
바일레온이 식당 메뉴까지 신경 써야 한다면 아마 자기는 30년 뒤에나 큰오빠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란다.
막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렛이 과장 좀 하지 말라고 핀잔주었다. 이 집은 셋째와 막내 사이가 특히 가까워 보였다.
이들이 키우는 큰 앵무새와 고양이의 관계도 주인들을 닮았다고 한다. 평소 아웅다웅하다가도 인간 몰래 사고 칠 땐 한편을 먹는다고.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비어스 가의 둘째 클로이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디디 보좌관님은 어쩌다 철혈 공작의 관심을 끌게 되신 거예요?”
다행히 황궁 밖까지 자신의 기행이 소문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마리엔은 씹고 있는 것만 삼키고 대답을 하려 했다.
“차디찬 북부의 만월!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그분이 이토록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에요. 제가 알기로는요.”
클로이즈의 뉘앙스가 묘했다. 격정적? 눈이 뒤집혀서는 반라로 복도를 질주하는 것도 어찌 보면 격정적이라고 할 수 있긴 한데.
“클로이즈, 적당히 해두렴. 네 오빠의 보좌관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우리 집으로 피신 온 거란다.”
무려 살해위협을 받았다고 강조하는 백작부인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어서 백작부인이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둘째는 푹 빠져 있는 장르가 나와 다르거든요.”
“영애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시나 봐요.”
“짝짓기에 미쳐 있죠.”
이 집 구성원이 되려면 어디에든 광적으로 몰입해야 하나 보다.
‘생각보다 독특하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집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황실과는 전혀 다르다. 마리엔은 이들을 대하기 조금 곤란해하면서도 싫어하지는 않을 오데트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생각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