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19)
다음 날.
마리엔은 하녀가 방으로 가져다준 맛있는 아침을 먹었다. 주름 하나 없이 싹 다려진 옷을 입은 뒤 1층으로 내려오자 바일레온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간밤에 편히 잤어요?”
거기 경비대죠? 신고합니다. 제 상관이 아침부터 햇살 머금은 나무처럼 치유의 기운을 쏘아대고 있는데요.
얼굴은 우수에 젖은 시인 같은데 가슴이 너무 커요.
죄송해요. 사실 이것도 신고가 아니라 자랑이에요. 잠깐 정신 놓고 한 말이니까 제발 저 잡아가지 마세요.
“네, 침대가 진짜 푹신푹신했어요.”
“푹신푹신했어요?”
바일레온이 웃는 얼굴로 마리엔의 말을 따라 했다.
“다행이네요.”
하, 위험하다. 위험해. 몸 좋은 미인과 아침부터 침대 이야기를 하다니. 게다가 이 미인은 본인 매력에 대한 자각이 없어.
출근길마저 너무 완벽한 나머지 마리엔은 황궁에 도착할 즈음이 돼서야 오늘의 할 일을 기억해냈다.
자신은 정오에 북부 놈의 방으로 가야 한다!
“어떡하죠?”
마리엔이 미간을 구겼다.
“안 가면 분명 재상부로 쳐들어올 텐데.”
“우리가 안 갈 이유가 없잖아요?”
그 와중에 우리라고 묶어서 말해주는 바일레온이 고마웠다. 마리엔은 두 손을 모으고 조그맣게 말했다.
“자꾸 폐를 끼쳐 죄송해요.”
“스물세 번째 사과예요.”
“전 최대한 비어스 경의 도움 없이 해내고 싶은데요. 그게 잘…… 안 돼요. 제 생각만큼 제가 유능하지 않은가 봐요.”
마리엔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비어스 경을 위한 일인데. 깜짝 선물처럼 짜잔, 놀라게 해드리고 싶은데. 오히려 경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디디 보좌관.”
바일레온이 온화한 목소리로 불렀다.
“혹시 내가 고맙다는 말을 했던가요?”
“네?”
마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누구한테요?”
“당신에게요.”
“비어스 경이 저한테…… 왜요?”
“고마우니까요.”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걸까. 멀쩡한 머리를 흑발로 염색시키는 등 온갖 헛짓은 다 했는데.
거기다 자신은 연이어 위기에 처해서 바일레온의 도움을 받았다.
가여운 바일레온.
그저 마리엔 디디의 최애라는 이유만으로 도와주고, 도와주고, 또 구해주는 업보의 굴레 속에 갇혀버렸다.
아마 자신은 책 빙의자 중에서도 특히나 손 많이 가는 인간일 거라고, 비관적인 생각도 해본 마리엔이다.
한데 고맙다니.
“디디 보좌관이 방금 스스로 말했잖아요. 이게 다 날 위한 일이라고. 내 외사랑이 어떻게든 이뤄지도록 하려고 애써주는데 내가 이 정도는 해야죠.”
“그렇지만.”
“내 도움을 받는 게 싫어요?”
그 말을 하는 바일레온의 목소리가 문득 슬프게 들렸다. 마리엔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잠깐 깜빡했다.
눈앞의 남자는 천성이 다정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다. 바일레온은 아끼는 사람에게 도움이 못 되는 순간을 제일 견디기 힘들어한다.
‘비어스 백작부인이 어제 그러셨지. 너 또 과보호가 시작됐구나, 하고.’
자신은 어느새 바일레온에게 ‘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신뢰를 얻었다.
과보호를 받게 된 것도 그래서다. 그의 도움을 거절하면 바일레온 입장에선 본인을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둘게요. 전 비어스 경의 도움이 싫지 않아요. 그냥 저 혼자도 잘 해내고 싶어서 그래요.”
마리엔이 얼른 물었다.
“둘이 별개인 거 이해하시죠?”
“……그럼요.”
바일레온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모르겠어요.”
“제 자존심 문제예요. 절대 비어스 경의 잘못이 아니라.”
또 저렇게 웃네. 마리엔은 말을 하다 말았다.
독자일 때는 하루가 멀다고 등장인물들을 보며 소리를 질렀었다.
제발 대화 좀 해! 입 뒀다 뭐 하냐! 딱 십 분만 서로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풀릴 오해를 몇 년씩 묵혀두는 인물들 때문에 죽을 것 같았건만.
‘막상 현실이 되니 또 다르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우린 지금 대화를 하고 있단 말이야? 근데 왜 말을 할수록 상황이 꼬이지? 내가 의미를 제대로 전달 못 하나?
“언젠가는요.”
마리엔이 비장하게 말했다.
“저도 경에게 확실한 도움이 되어드릴게요. 그때까지 부족한 저를 좀 잘…… 참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리엔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자신의 목표는 바일레온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럼 상대의 입장을 우선해야겠지.
바일레온은 지금 머리로는 마리엔의 말이 이해되는데, 마음은 왠지 서운한 상태다.
여기서 그를 더 이해시키려 했다간 바일레온의 속상함만 심해질 거다.
지금은 마리엔 디디의 자존심을 살짝 접어둘 타이밍이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디디 보좌관도 내게 마음껏 의지하는 거예요. 알았죠?”
“이미 엄청 의지하고 있는데요.”
“어쩔 수 없이 도움받고 있는 거잖아요. 계속 사과하면서.”
바일레온이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좀 더 편하게 받아줘요.”
마리엔은 입가를 샐룩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바일레온의 말에, 마리엔이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이러다 제가 정말 거금이라도 빌려달라고 하면 어쩌시려고요. 우린 편한 사이니까, 어? 뻔뻔하게 50년 무이자 대출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럼 우린 50년 동안 차용증으로 묶여 있는 거네요.”
바일레온이 한쪽 입꼬리를 부드럽게 밀어 올렸다.
“언제든 말만 해요. 이래 봬도 나, 돈 많아요.”
이래 봬도, 라니. 바일레온은 설마 본인이 수수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저기요, 그쪽은 한눈에도 돈이 많아 보이거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시거든요.
마리엔은 농담이었다며 적당히 넘어가려 했다. 이에 바일레온은 자기는 농담이 아니었다고 응수했다.
◇ ◆ ◇
정오가 됐다.
마리엔은 카인의 응접실에 발을 들인 후로 한마디도 안 하고 정면만 응시했다.
바일레온의 지시였다. 그는 대화는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아무리 대화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꾹 참으라고.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작에게 비밀 무기를 들키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지. 제모제.
그걸 샴푸 용기에 넣어서 놈을 민머리로 만들 계획만 안 들켜도 대성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리엔이 흥분해서는 안 됐다. 마리엔은 대의를 위해 잠깐의 굴욕을 참겠노라고 다짐했다.
“비어스 재상, 보기보다 비위가 좋군. 아무리 수하 목숨을 지키려고 해도 그렇지. 그런 헛소리를 이유랍시고 내놓다니.”
대의 좋다 이거야. 근데 이 망할 놈이 단단히 작정했네?
카인 블랙우드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마리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심기를 긁는 말만 골라서 했다.
네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시험해보겠다는 듯이.
“저게.”
일단 기본 호칭이 ‘저거’다. 북부 놈 눈에 마리엔 디디는 같은 인간으로도 안 보이나 보다.
“정말 날 좋아해서 그런 짓을 벌였을 것 같나?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안 믿겨도 그냥 믿겠다고 해. 어디 내 최애 말에 토를 달아.
“날 좋아한다니. 누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그딴 식으로 구애해. 지금도 보라고.”
카인이 마리엔을 턱짓했다.
“저 눈깔. 저 흐리멍덩한 하늘색 눈깔. 왜 날 똑바로 보지 못하고 정면만 보냐고.”
몰라서 물어? 왜냐면.
“아마 나와 눈이 마주치면 속내를 들키기 때문이겠지.”
잘 아네.
마리엔은 맞은편 벽지의 문양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바일레온은 제 보좌관보다 훨씬 연기에 능했다.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디디 보좌관은 보기보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서요.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줍음?”
카인이 냉소했다.
“혹시 내가 수도를 떠나 있는 사이, 수줍음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나?”
“알고 계시는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수줍음 많은 여자는 다 벗은 남자의 등을 밀어주지 않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군.”
내가 언제 네놈 등을 밀어줬지? 돌덩이 같은 어깨를 주먹으로 몇 번 두드렸을 뿐이야.
은근슬쩍 사실과 다른 얘기를 집어넣지 마!
마리엔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카인을 노려보려던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작은 기침 소리에 정신을 붙들었다.
“만일 재상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대들은 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일 테지.”
“어떤 제안 말씀이십니까?”
“재상의 덜떨어진 보좌관을 내 전담 시녀로 달라는 제안.”
마리엔과 바일레온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싫어요!”
“그건 안 됩니다.”
카인이 이거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양쪽에서 완강하게 거부하는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규칙에 위배됩니다. 제 보좌관은 재상부에 들어온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서이동은 최소 3년 차부터 가능하고요.”
“내 설명이 부족했군. 부서이동을 시키라는 게 아니야. 그냥 소속은 그대로 두고 내 시중만 들라는 거지.”
“그 역시 업무 외…….”
“아무튼 재상이 반대하는 이유는 알겠어. 그럼 당사자 말을 들어볼까?”
재수 없는 놈은 바일레온의 말을 싹둑 자른 뒤 마리엔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사실 처음부터 놈의 목적이 마리엔이긴 했다.
“좋아하는 이를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기회잖아.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리엔은 대답하기 전에 바일레온을 힐끗 보았다. 침착하게만 말해요. 그가 무언의 허락을 내렸다.
“전담 시녀가 하는 일은 제가 맡고 있는 업무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적응 기간이 필요하겠죠. 그동안 공작님께서 꽤 불편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마리엔은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말을 마쳤다. 이만하면 위기를 잘 넘긴 것 같다.
한데 카인이 마리엔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보니 멀쩡하게 말할 줄도 알잖아.”
“……감사합니다.”
“목숨을 구해줘도 못 들은 감사인사를 이제야 듣는군.”
카인이 픽 웃었다.
“솔직히 얼굴은 봐줄 만해. 입 다물고 있으면 제법 귀여운 인상이기도 하고.”
이런 개소리에까지 감사인사를 해야 되는 건 아니겠지.
마리엔은 입을 꼭 다물었다.
“외모는 반반하고 힘이 센 한편 머리는 잘 안 돌아가던데. 네가 재상부에서 하고 있는 일이 별로 중요할 것 같진 않단 말이지. 그냥 감사히 내 제안을 받아들여.”
“정중히 사양…….”
“역시 에둘러 말하는 건 귀찮군.”
미친놈이다. 자기가 언제 에둘러 말한 적이 있긴 하나? 그런데 새삼스럽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단다.
“카인 블랙우드의 벗은 몸을 본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러니 책임을 져줘야겠어.”
드디어 개소리의 정점을 찍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마리엔은 울컥했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닳았어.”
카인이 셔츠 목깃을 젖히는 시늉을 했다.
“넌 보기만 하지 않았잖아. 작정하고 주물러댄 거 기억 안 나나? 여기 네 손이 닿았던 어깨, 확실히 닳았거든.”
“돌았…….”
“그리고 내 머리카락도 잘랐지.”
순간 카인의 푸른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목숨 걸고 내 방에 잠입해서 머리카락을 잘라 간 이유가 뭘까.”
덫에 발을 들여선 안 된다.
마리엔은 욕을 퍼부으려고 열었던 입을 고대로 닫았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바일레온을 힐끔 쳐다봤다.
‘응?’
카인의 무례에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바일레온이다. 중간에 말이 잘려도 예의 사무적인 미소를 잃지 않았건만.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엄청…… 화난 것처럼 보이네.’
바일레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