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2)
엑스트라 빙의의 문제점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었다.
약간 마른 체형의 미남일 줄만 알았던 바일레온이 질 좋은 허벅지의 소유자라는 것은 차치해두자.
일에 너무 몰두하다가 다듬을 시기를 놓쳤는지 부드러운 아몬드 색 머리카락이 눈을 덮을 정도로 내려오는 사실도 잠깐 미뤄두자.
엷은 한숨을 내쉬며 그 머리카락을 쓸어올릴 때, 같은 색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순간도.
힘들겠지만 머릿속에서 지우자.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엑스트라 빙의의 문제점이 마리엔 디디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제3보좌관의 방이 원래 우리 집 욕실만 해……. 이게 보통인가?”
재상의 집무실이 그렇게나 컸는데. 오면서 힐끗 구경한 연회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였고, 복도는 아무리 걸어도 끝에 다다를 수 없을 만큼 길었는데.
“내 방 맞지?”
믿기지 않아서 문 옆을 다시 확인했다. 짙은 터콰이즈 블루의 벽지 위에 또렷이 자리한 이름과 소속이 마리엔의 의혹을 불식시켰다.
1인용 침대와 책상, 옷장 하나가 세간의 전부로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방에 큼직한 창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참, 여기 난방은 어떻게 하지.”
난방도 안 되는데 창이 크면 겨울에 얼어 죽을 것이다. 세계관엔 마법이 없었다. 마탑주도 없고 통신구도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난방장치가 없는걸.”
라디에이터 비슷한 장치라도 있기를 바랐지만 그저 통통한 꿈에 불과했다. 마리엔은 방구석에서 먼지 덮인 물주머니를 찾아냈다. 조심스럽게 먼지를 걷어내자 ‘안녕, 디디’라는 삐뚤빼뚤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딱 사람 품에 들어가는 크기에 마개가 달린 것으로 보아 이것이 제3보좌관의 유일한 난방도구인 모양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엔딩을 봐야 한다.”
느긋하게 굴 때가 아니었다. 갑자기 시간제한이 걸렸다. 마리엔은 얼른 책상 서랍을 털었다. 마리엔 디디에 대한 정보가 극히 부족했다. 이것이야말로 엑스트라 빙의의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아는 게 없다.
의 여주인공은 4황녀 오데트 로즈.
창백한 은발에 붉은 장밋빛 눈, 가냘픈 체구의 오데트는 황후 소생이 아니다. 오데트의 친모는 신분이 비밀에 부쳐진 채 죽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음습한 소문이 돌았다. 무희도 황제의 아이를 가지면 입궁하는 판에 왜 끝까지 비밀로 했겠냐고. 아무래도 친모의 신분은 수녀 정도가 아니겠냐고.
여기엔 황실 사람들만 아는 비밀이 있다. 황실 소속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는 것도 아니고 극히 일부만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다. 오데트가 제위에 오르려고 하는 이유와도 관계있다.
어쨌든 다른 이복형제자매가 황궁에서 멀쩡하게 자라는 동안, 병약한 오데트는 혼자 궁 밖의 별저에서 지냈다.
그때 오데트의 말벗이 되어준 상대가 바로 지금의 재상 바일레온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소녀의 소꿉친구. 쓸쓸한 미소. 누군가의 안에 조금씩 쌓여가는 마음.
“자, 이거 봐. 나는 남에 대해서는 줄줄 늘어놓을 수 있어. 오데트가 살구잼 올린 쿠키를 좋아하는 척하지만 실은 딸기잼을 더 선호한다는 사소한 정보까지 알고 있단 말이야.”
왜냐면 본문에 나왔기 때문이다. 오데트가 여주인공이니까, 작중에서 그녀의 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같은 의미로 철혈 공작 카인 블랙우드에 대해서도 많이 안다. 다정한 서브남 바일레온 비어스의 대사는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고 있다.
한데 마리엔 디디에 대해서는 뭘 알고 있는가.
“머리 색깔.”
그리고 또?
“직업.”
자문자답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생각난 김에 자기 얼굴 정도는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마리엔은 방 밖으로 나가 거울을 찾아 헤맸다. 쪽방엔 흔한 손거울 하나 없더니, 어떤 복도에 이르자 한쪽 벽 전체를 금장 프레임과 거울로 발라놨다.
“마리엔은 이렇게 생겼구나…….”
커다란 거울 속의 자신은 아담했다. 키는 160센티미터도 안 돼 보였다. 가지런히 내린 분홍빛 앞머리와 대조적인 눈 색깔이 인상적이었다.
“탁한 하늘색 눈동자. 예쁘긴 한데 어째 나 혼자 파스텔색 인간이네.”
좀 현실에서 동떨어진 색 조합이었다. 마리엔은 엑스트라 조형 따위에 크게 공들이지 않은 원작 작가님에 대해 생각했다.
“이거 로즈쿼츠랑 세레니티잖아요…….”
연재 시기를 떠올려보면 진짜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설정하셨나 보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마리엔 디디가 제법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란 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법’ 귀여운 정도가 아니다.
마리엔 디디는 풀 뜯는 토끼처럼 순진하고 깜찍해 보였다. 살짝 들려 올라간 앙증맞은 코끝, 도톰한 입술, 뽀얀 피부. 거기다 한 번 돌려서 묶어도 등 중간까지 내려오는 탐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
벌룬 소매의 회색 재킷도 마리엔이 입으니까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색깔 때문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쓰리피스 제복인데도 그랬다.
“하긴 넝마 조각을 걸쳐도 십 분 안에 성냥 다 팔고 집에 가겠어.”
머리 색, 눈 색 대충 배정한 엑스트라는 있어도 못생긴 엑스트라는 없는 세계관에 건배를! 썩 만족스러운 상태로 방에 돌아온 마리엔은 책상 위 잡동사니를 마주하고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거 생각보다 보통 일이 아니네.”
얘가 혹시 특정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으면 어쩌지? 단순히 내 최애 원작 남주 만들기 프로젝트라고만 생각했는데 나 자신의 생존부터 챙겨야겠다 싶었다.
마리엔은 본인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졌다. 신분증 확인 완료. 회의 기록부 확인 완료. 방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확인한 후엔 노트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깃펜의 끝을 잉크에 담갔다가 이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비어스 경.”
바일레온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수하를 맞았다. 회계 담당 젠이었다. 평소대로 보고를 하려는가 싶었는데 젠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상대가 먼저 운을 떼주길 바라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죠? 편히 말하세요.”
“네, 비어스 경. 그게…….”
젠은 영 편치 않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토록 조심스러워하는 걸까.
“디디 보좌관 말입니다.”
계속하란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혹시 요즘 사정이 어려워졌을까요? 비어스 경께선 알고 계신가 하여.”
“디디 보좌관의…… 사정이요?”
“모르시는 눈치군요.”
젠이 조용히 눈을 굴렸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뭔가 마음을 정한 후였다.
“실은 며칠 전부터 디디 보좌관이 좀 이상했습니다. 필 보좌관과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돈을 빌려달라더군요. 그러더니 그날 바로 제게 와서는 급료가 가불되냐고 물었고요.”
“그래서요?”
“규정을 알려줬죠. 최대 절반까지만 된다고요. 그러자 당장 그 자리에서 다음 달 급료 절반을 받아 갔습니다.”
바일레온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잠깐 고민했다. 급료 가불은 별문제가 없었다. 억지를 부려서 규정을 어겼다면 문제지만, 디디 보좌관은 규정에 맞는 금액을 받아 갔다.
하지만 동료에게 사적으로 돈을 꾸고 다니는 건 차후 문제의 소지가 될 만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제 방을 나가다 말고 묻더군요. 보좌관의 경비 처리가 어디까지 되느냐고요.”
경비 처리. 또 돈 문제다.
“새삼 설명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매뉴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젠 제게 영수증 한 묶음을 넘겨주더군요. 비어스 경, 제 말뜻은…… 디디 보좌관은 세 달 전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업무에 관해 물은 적이 없잖습니까. 먼저 관심을 보인 적도 없고요.”
“그랬죠.”
“솔직히 전 디디 보좌관이 경비 처리라는 용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그건 너무 상대를 얕잡아본 게 아닐까. 하나 바일레온은 말을 아꼈다. 재상부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젠이 보기엔 마리엔 디디의 행보가 썩 탐탁지 않았을 터였다.
“한데 디디 보좌관이 내고 간 영수증을 살펴보니까요. 죄다 요 며칠간 구입한 것이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제가 조금 신경 쓰인 것은…….”
젠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직접 보여주기로 했는지 서류 사이에 끼워둔 큼직한 종이를 빼 들었다. 바일레온 쪽으로 돌려 책상 위로 내밀었다.
“부인과 의사를 찾았더군요.”
바일레온의 눈에 종이 속 글자가 들어왔다.
“보시다시피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머리가 띵했다. 바일레온 비어스의 머리는 명석하기로 제국 최고였지만 눈앞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동료의 개인정보를 누출한 젠에게 주의를 줘야 하나?
하지만 디디 보좌관 본인이 경비 처리 목적으로 넘겼다는데. 영수증과 확인서를 제출한 이상 바일레온이 알고자 하면 언제든 알게 될 일이긴 했다.
아니, 그런데 임신 여부 확인에다 급전이 필요한 거면.
“제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젠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바라본 젠의 얼굴에는 미미한 우려가 떠올라 있었다.
디디 보좌관의 수동적 업무태도는 싫지만 이건 별개의 일이다. 같은 사람으로서, 소속으로서 걱정스럽다. 젠의 뜻이 전해졌다.
“결과는 여기 없습니까?”
“원래 확인서엔 진료 내역까지만 나옵니다만.”
“그, 렇죠.”
바보 같은 소리를 해버렸다. 바일레온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쨌든 마리엔 디디는 재상부 소속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비어스 경, 긴히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그녀를 보고 있으면 폭신한 분홍빛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어, 젠 관리자님도 계셨네요.”
마리엔이 방긋 웃었다. 젠이 어색한 미소를 되돌렸다. 방금 전까지 나누던 이야기 때문인지 바일레온과 젠의 눈길이 자연스레 마리엔의 배로 이동했다.
아니다.
따지고 보면 ‘자연스레’가 아니었다. 왜냐면 마리엔 본인이 배에 손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상담 가능할까요?”
마리엔이 의미심장하게도 배를 문질렀다. 바일레온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진료확인서를 젠에게 되돌려주었다. 젠은 얼른 상관의 뜻을 알아차리고 서류 사이에 확인서를 끼워 넣었다.
“네, 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세요.”
문으로 걸어가던 젠이 문득 몸을 돌렸다. 바일레온이 마리엔에게 물었다.
“혹시…… 젠 관리자가 동석하는 게 편하겠습니까?”
마리엔이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같은, 여성이기도 하고.”
마리엔은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다가 시원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렇게 사양하게 놔둬도 되나? 분명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챈 느낌이었는데.
“괜찮습니다. 저희끼리 얘기하는 게 비어스 경에게도 편하실 거예요.”
“……그런가요.”
묘한 뉘앙스였다. 젠이 상관의 눈짓을 기다렸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문을 닫기 전 안을 힐끔 쳐다보는 젠의 시선은 어째서인지 마리엔이 아닌 상관에게 꽂혀 있었다.
바일레온 비어스 나이 스물여섯. 제국의 젊디젊은 재상으로 유능함을 만방에 떨치는 중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좋을지 주저되었다.
“그거 안 드실 건가요?”
마리엔이 물었다. 시선을 따라가보니 다과 접시가 있었다. 너무나 맹목적인 눈빛이라 도저히 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들겠습니까? 레몬커드를 넣은 페이스트리라고 하더군요.”
“레몬커드! 새콤한 거 좋아요.”
마리엔이 얼른 접시를 넘겨받았다. 한 입 베어 물고는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입안의 것을 미처 넘기기도 전에 새로 베어 물었다.
“버터! 설탕! 너무 좋아.”
조그만 페이스트리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희 식사 때 나오는 호밀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네요. 물론 식사가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참, 비어스 경은 저희랑 다른 메뉴로 드시겠죠?”
“천천히 먹어요.”
“희한하단 말이죠. 양은 푸짐한데 돌아서면 배가 꺼지고 돌아서면 배가 또 고파요……. 단체식사란 게 원래 그런가.”
새콤한 것이 끌리고 먹어도 자꾸 배가 고프다. 부인과 진료확인서. 의미심장하게 배를 문지르던 것.
바일레온은 두 번째 페이스트리를 쓱싹 중인 보좌관에게 허브티 한 잔을 내밀었다.
“와, 감사합니다.”
결국 마리엔은 재상의 오후 간식으로 올라온 음식들을 모조리 해치웠다. 포만감에 미소를 짓는 두 볼이 발그레했다.
체온 상승.
바일레온은 침착하게 한 가지 증거를 더 추가했다.
“저, 비어스 경.”
드디어 본론인가. 마리엔은 올해 스물둘. 바일레온 자신이 알기로 교제하는 상대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불운하게도 하룻밤…….
“제가 진짜 고민을 엄청나게 많이 했거든요.”
고민을 했겠지. 당연히.
“머리 염색하실 생각 없으세요?”
“머리 염색…… 예?”
일단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차분하게 응해줄 참이었던 바일레온은 당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제 생각은 그래요. 역시 머리 색이 문제라면, 염색을 하면 되지 않을까.”
“…….”
“제가 방에 염색약 사다 놨거든요? 가발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좀 약할 것 같아서. 염색약 쓰시면 그것도 젠 관리자님께 영수증 넘길게요. 경비 처리할게요.”
“…….”
“어떠세요, 흑발? 제일 새까만 색으로 달랬어요.”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되지? 바일레온이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흑발 싫으시죠. 저도 그래요. 이렇게 예쁘신 갈색 머리카락을, 햇볕을 받으면 차르르 빛나는 아몬드 빛을 시꺼먼 색으로 바꿔야 하다니.”
마리엔이 괴롭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한 번쯤은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저기, 말하는 도중에 미안합니다만. 디디 보좌관.”
가만 놔두면 이야기가 어디까지 튈지 모르겠다. 바일레온이 손을 들어서 진정시켰다.
“갑자기 왜 내가 검은 머리로 염색해야 한다는 거죠?”
마리엔이 정말 모르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비어스 경의 오랜 짝사랑을 끝낼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이다음에 곧장 덧붙였다.
“4황녀 전하를 좋아하시잖아요. 조만간 카인 블랙우드 공작과 약혼할.”
보송보송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