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24)
“제가 너무 놀래드렸나 보군요.”
기분 나쁘게 잘생긴 사제가 말을 이었다.
“안심하세요. 보시다시피 전 신을 섬기는 몸이랍니다. 황궁 지리에도 익숙하죠.”
그건 이 사이비 종교인이 신전보다 황궁을 더 자주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마리엔은 레슬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것이며, 희고 매끄러운 그 이마 위로 적갈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흘러내린 디테일까지.
역시 신을 섬기는 사제보다는 귀부인들이 은밀히 방문하는 비밀 살롱의 호스트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나이스 사제가 고해성사실에 들어간 날에는 유난히 부인들 흐느끼는 소리가 밖까지 새어나온다고 하지.’
레슬리 본인도 제게 따라붙는 소문을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하긴 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이라면 애초부터 행실을 바로 하고 다닐 터다. 한데 레슬리는 어떤가.
‘무슨 사제가 이렇게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어.’
게다가 일렬로 쪼르르 달린 작은 단추는 가까이서 보니 월장석으로 만든 거였다. 문스톤이라고도 불리는 보석이다.
종교인은 무조건 수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신에게 인생을 바쳤지만, 동시에 진귀하고 예쁜 물건을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이라면 바람 숭숭 들어오는 낡은 구두보다, 장인이 만든 질 좋은 구두를 신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레슬리는 척 보기에도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권력과 결탁한 사이비.’
마리엔의 눈에 경계심이 스멀스멀 깃들었다.
“겁이 많은 자매님이군요.”
레슬리가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한데 자매님, 우리가 구면이던가요?”
“아뇨.”
“그런데 왜 저는 자매님이 이토록 친근하게 느껴질까요.”
그건 네놈이 호색한이어서야. 마리엔은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제가 남자였으면 놈이 쳐다도 안 보고 지나갔을 거라는 데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전 아나이스 사제입니다.”
레슬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리엔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여태 귀족 영애도 아닌 마리엔의 손등에 입을 맞추려는 남자는 없었다. 책 속에 떨어진 후로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순간 마리엔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러다가 레슬리의 입술이 제 손등에 닿기 직전에야 후다닥 손을 뺐다.
“이게 미쳤나…….”
“네?”
레슬리가 되물었다. 아무래도 그의 위치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반응 때문일 터다.
그러든가 말든가. 마리엔은 손등을 드레스 자락에 문질러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입술이 닿지는 않았지만, 닿을 뻔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마리엔은 상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직급만 일반 사제일 뿐. 레슬리의 한마디면 당장 내일이라도 대신관이 바뀔 수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레슬리 아나이스의 인맥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레슬리 본인부터가 고위귀족 출신인 데다 이모는 황후의 수석시녀다. 친누나는 이웃 나라의 왕자비이며, 여동생은 대륙에서 제일 유명한 거상과 결혼했다.
‘근데 또 본인은 2황자 옆에 붙었단 말이야.’
아둔한 황태자나 교활한 2황자나 어차피 오데트 손에 처리될 운명이지만, 뭐.
중요한 건 그들이 퇴장한 후에도 레슬리는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데트는 레슬리를 회유해서 4황녀 지지 세력을 늘리는 데에 이용한다. 이때 다른 황자나 황녀를 위해 일했던 자들이 대거 오데트 손아귀에 들어온다.
황실에 복수하되, 살려둘 때의 가치가 더 큰 인물은 살려서 쓴다.
한마디로 레슬리 아나이스는 후반부 오데트의 정치 감각을 보여주는 장치로써 쓰이는 인물이었다.
‘읽을 때 조금 찜찜하긴 해도 오데트의 결정이니까 그러려니 넘겼지.’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놈. 하지만 우리 여주님은 얘 같은 종자도 살려두고 요긴하게 쓰신단다.
서브남인 바일레온에 비해 비중이 낮은 레슬리. 당연히 드러난 서사도 없고, 그저 잊을 만하면 등장해서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간이다. 그의 기능은 딱 거기까지다.
‘얠 뭐라고 부르지. 서서브남? 써드남? 아무튼…….’
마리엔은 생각했다.
‘역시 오데트는 적폐를 청산했어야 됐어.’
글로 읽을 때랑 직접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레슬리 놈은 얼굴 반반한 사이비 종교인 수준이 아니다. 거의 걸어다니는 페로몬이다.
보고만 있어도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든달까?
만일 신분이 낮았다면 동네 여자 다 홀린다고 해서 화형대에 올랐을 상이었다.
이쯤 되니까 오데트가 이놈을 회유한 게 아니라, 실은 이놈이 오데트를 꼬셨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우리의 여주님은 의외로 육체파 취향이시란 말이지. 이놈이 그 점을 파악하고 들이댄 거 아닐까.’
생각할수록 점점 합리적 의심 같았다.
그리고 이런 인간이 활개 치는 황궁이라면 동물의 왕국이 부럽잖았을 거다.
이 방에서 어흥! 저 방에서 어흥! 성실한 재상 바일레온은 그런 혼돈 속에서도 꿋꿋하게 할 일을 했을 테고.
하여튼 마리엔은 이로써 다시 한번 검은머리파뿌리 작가님의 이름을 외치게 되었다.
왜 이렇게 재수 없는 놈들까지 지독한 미남으로 만들어놓으신 건데요, 하고.
“우리 자매님은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군요.”
레슬리는 뭐든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리엔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다짜고짜 손등에 키스하려는데 누가 좋아해요?”
“키스라뇨. 제가 자매님께 키스하려 했단 말인가요?”
레슬리가 제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맹세컨대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뭐래. 방금 자기가 한 짓도 기억 못 해요?”
“이름 모르는 자매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하려던 것은 정중한 인사죠. 키스가 아니라.”
레슬리의 잿빛 눈동자가 마리엔을 오롯이 담았다.
“제가 만약 자매님께 정말 키스를 하려 했다면…….”
마치 비밀 이야기를 나누듯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두 다리로 서 있으시지 못할 텐데요.”
이 음란한 사제가 나한테까지 막 기술을 쓰네.
마리엔은 경악해 상대를 쳐다봤다.
정신 차려, 사이비야. 네가 아무리 사이비여도 최소한 십자가 목걸이 걸고 있는 동안에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거 아냐?
눈치 보는 기색이라곤 없잖아. 아주 대놓고 막 나가자는 거야 이거?
그때 레슬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장난이 지나쳤죠.”
그가 덧붙였다.
“자매님의 반응이 귀여워서 그만.”
“……하?”
“황궁에선 처음 뵙는 분인데요. 혹시 4황녀 전하의 약혼식에 참석하러 오셨는지?”
레슬리는 방향을 알려주는 척하면서 마리엔에게 좀 더 다가섰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가 오데트를 몸으로 구워삶았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일단 황궁에서 이 인간처럼 달라붙는 옷 입는 남자가 없어!
“약혼식장이라면 돌아서 남쪽 건물로 가야 한답니다.”
“…….”
“그런데 여긴 약혼식장에서 꽤 멀죠. 블랙우드 공작의 방이 저 앞에 보일 정도니까요. 자매님은 아마…… 시녀들에게 묻지 않고 무작정 걸으신 것 같은데.”
화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리엔 떠보기로 넘어갔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그 말에 마리엔은 드레스 아래 숨긴 열쇠와 제모제를 떠올렸다.
번민이 찾아왔다.
비어 있는 방, 행사가 끝난 후에 목욕할 게 분명한 카인, 제 속치마 주머니에 들어 있는 열쇠.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속내를 알 수 없는 사이비에게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작전을 수행할 것인가.
“자매님은 아실까 모르겠지만 이 황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답니다.”
레슬리는 마리엔의 마음을 확실히 잡으려고 이런 말을 했을 터다.
그러나 낯선 유혹자의 음성은 오히려 마리엔의 이성을 일깨우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선악과 따 먹으라고 구슬리는 뱀이 떠오른댔더니, 진짜 그 뱀처럼 사람을 홀리고 있네.’
마리엔은 얼른 정신을 붙들어 맸다. 상대는 오데트의 정적 2황자 쪽 브레인이다.
교활하고 의심 많은 2황자를 끔뻑 넘어가게끔 만든 수완을 허투루 봐선 안 됐다.
‘중요한 정보를 넘길 순 없어.’
물론 자신은 카인 놈을 깐 달걀로 만들고 싶긴 하다.
얼마나 간절히 원하냐고?
마리엔 디디가 머리를 밀어서 카인 블랙우드를 깐 달걀로 만들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제모제를 제 머리에 펴 바를 만큼 간절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데트와 제국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북부 놈은 대머리가 돼야 해. 그렇지만 적들이 놈의 비밀을 알아서도 안 돼.’
아직 바일레온에게도 카인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상식적인 그가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면 결사반대할 게 분명하니까.
바일레온한테도 함구했는데 하물며 오데트의 적들에게야.
‘카인 블랙우드……. 분하지만 네놈이 이 책의 남주가 맞긴 하구나. 온 세상이 너의 대머리 변신을 막고 있어.’
이제 남은 과제는 하나뿐이다. 어떻게 레슬리에게 원래 계획을 안 들키고 돌아갈 수 있을까.
그건 간단하다.
북부 놈 샴푸 용기에 제모제 넣는 것과 비교하면 백만 배는 쉬운 일이다.
‘멋대로 남의 정신을 빼놓는 놈에겐 똑같은 벌을 줘야지.’
마리엔은 퇴로를 확보했다. 그런 다음 레슬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귀가 축 처진 토끼처럼 순진한 얼굴로.
“아나이스 사제님. 혹시, 혹시…….”
“편히 말해도 돼요.”
“혹시 제가 누군지 아세요?”
레슬리가 답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오늘 처음 뵙는 자매님이라고.”
“아차, 그랬지.”
다음 순간 마리엔은 레슬리의 뒤를 쳐다보며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말벌이에요. 조심하세요!”
마리엔은 손수건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있지도 않은 벌을 쫓겠답시고 레슬리의 얼굴에다 대고 손수건을 마구 후려쳐댔다.
“꺄아, 벌이다. 꺅, 사제님의 귀에! 꺅, 꺄, 아악! 무슨 벌이 이렇게 크지. 안 돼! 눈 감아요!”
마리엔은 손수건 너머로 주먹을 내질렀다. 정확히 레슬리의 눈두덩을 타격한 다음, 그대로 돌아서 복도를 질주했다.
“말벌이 절 쫓아와요!”
달리는 동안 드레스 자락이 다리에 휘감겼다. 설마 오늘도 냅다 뛰어야 할 일이 있을까. 혹시 몰라서 클로이즈가 권하는 장신구를 사양했던 건데 그러길 잘했다.
다행히 레슬리는 북부 놈처럼 추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제복 차림으로 헐레벌떡 뛰는 건 좀 모양이 빠지지.
잠깐, 그럼 사제복 차림으로 정말 키스했으면 두 다리로 못 서니 마니 하는 말장난을 치는 건 괜찮고?
“하아……. 아무튼 우리 비어스 경 말고는 다 탈락감이야. 무조건 탈락.”
말세다. 조신한 남자의 씨가 말랐다. 머리 검은 놈은 무례하고, 머리 빨간 놈은 문란하니, 해답은 오로지 따스한 갈색 머리에만 있을지라.
마리엔은 혀를 차며 약혼식장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본식은 끝났고, 2부인 무도회가 진행 중이었다.
한편 카인에게 조용히 접근해 귓속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이야기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