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25)
마리엔은 스리슬쩍 바일레온 옆에 섰다. 수하가 자릴 비운 이유를 알고 있는 그는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뗐다.
“십 분 전에 전하와 공작이 첫 댄스를 끝냈어요.”
원래 무도회의 첫 댄스는 그날의 주인공 몫이다. 귀빈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넓은 홀을 가로질렀을 두 사람을 떠올리자 즉각 거부감이 일었다.
마리엔은 ‘으에’ 비슷한 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예와 우웩의 중간에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부모님은 첫 댄스까지만 보고 돌아가셨고, 클로이즈는 댄스 신청을 받아서 홀에 나갔어요.”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뜻이다.
“어떻게 됐어요?”
“그게.”
마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방해꾼이 등장해서요.”
“누구죠?”
바일레온이 바로 고개를 돌려 마리엔을 살펴봤다. 아까보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 모양에 그의 눈길이 닿았다.
“어디 다친 덴 없어요?”
“안 다쳤어요. 걱정 마세요.”
“머리가…….”
“아, 이건 제가 난리 피우는 도중에 좀 흐트러진 거예요.”
마리엔은 다시 홀을 쳐다봤다. 아름답게 꾸민 귀족 남녀들이 쌍쌍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 너머로 은밀히 기회를 엿보는 영애들이 보였다. 다들 풀숲에 웅크린 맹수 같았다. 영애들의 목표물은 마리엔 옆에 있는 남자였다.
제국의 태양이자 젊고 수려한 재상, 바일레온.
‘참 안목이 뛰어난 처자들이란 말이지.’
마리엔은 자신과 고작 두세 살 차이 나는 영애들을 거듭 기특하게 여겼다.
‘얼굴 잘생겼어, 집안 좋아, 실력 좋아. 거기다 말도 다정하게 하는걸. 만일 댄스 신청을 거절당한대도, 바일레온은 절대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영애들이 그를 노리는 게 백번 이해됐다.
제국 사교계의 앞날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 이토록 많으니.
“디디 보좌관.”
“비어스 경은 춤 안 추세요?”
마리엔이 물었다.
“오늘 모처럼 예복을 입고 오셨잖아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막 반짝반짝 빛이 나시는데.”
“…….”
“이런 자태로 홀에 안 나가시는 건 아깝죠.”
“음,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바일레온이 잠깐 주저했다.
“디디 보좌관도…….”
“헉, 1시 방향에서 어떤 영애가 접근하고 있어요.”
마리엔은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 바일레온이 영애의 청에 응한다면, 자신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혼자 기다리게 된다. 클로이즈는 연달아 열 곡도 거뜬히 소화할 기세라 금방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설마 그 사이비가 여기까지 오진 않겠지?’
아무리 레슬리라도 사제가 무도회장에 출몰하는 광경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을 터.
마리엔은 전력 질주하는 자신을 내버려두던 그의 체면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창가 앞에 무리 지어 서 있는 2황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리엔은 제 눈을 의심했다. 흰 사제복을 입은 레슬리가 주군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저놈이 언제 따라왔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바일레온이 반응했다.
“누굴 보고 하는 말이에요?”
“저기, 저, 아나이스 사제요.”
바일레온이 2황자 무리를 일별했다.
“보좌관이 아나이스 사제를 어떻게 알죠?”
“아까 말한 방해꾼이 저 인간이거든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서 놀랐어요. 결국 방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마리엔은 설명을 이으며 조금씩 바일레온의 등 뒤로 움직였다.
“비어스 경, 저 잠깐만 뒤에 숨어 있을게요.”
공교롭게도 그때 1시 방향에서 돌진하던 영애가 바일레온 앞에 도착했다. 영애는 수줍은 목소리로 댄스를 신청했다.
바일레온은 북쪽에서 온 누구와 달리 세상 예의 바르고 다정한 어조로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다.
영애는 제안을 거절당한 순간엔 멈칫했지만, 이어진 부드러운 응대에 웃는 얼굴로 떠났다.
다시 둘만 남게 됐다.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등 뒤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했다.
“저 때문에 홀에도 못 나가시고 죄송해요.”
“디디 보좌관이 사과할 이유는 없어요. 나, 춤추러 온 거 아니니깐.”
기분 탓일까. 바일레온의 말투가 영애를 대할 때보다 다소 엄격해진 느낌이었다.
화났나?
“처음부터 찬찬히 말해봐요. 방해꾼이 뒤에서 나타난 순간부터 다시.”
“어…… 네.”
마리엔은 기억을 더듬어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바일레온의 등을 보고 얘기했기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레슬리가 손등 키스를 하려 했다는 대목에서 바일레온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검은 예복으로 감싼 상체가 팽창했다.
‘와, 체격 완전 커.’
체감상으로는 북부 놈이나 바일레온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키도 2센티미터밖에 차이 안 난다.
마리엔은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몸 좋은 걸로 어필하라면 바일레온도 빠지지 않지만, 오데트는 거기다 플러스 알파를 원한다니까 뭐.
“일단 디디 보좌관이 판단을 잘했어요. 아나이스 사제에게 빌미를 줘선 안 됩니다. 게다가 등장한 타이밍이 지나치게 교묘해요.”
바일레온이 조금 딱딱한 투로 말을 이었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겠죠. 아마 처음부터 작정하고 보좌관의 뒤를 밟았을 가능성이 커요.”
“하.”
“너무 낙심하지 말아요. 기회는 또 생길 거예요.”
“네, 저도 그러길 바라요.”
마리엔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달아 실패하니까 짜증도 짜증인데 진이 빠지려 했다.
레슬리 아나이스? 넌 또 왜 내 뒤를 밟은 거니. 너 원래 하던 일 있잖아. 황궁 내부인들 이간질하고, 귀부인이랑 비비적거리는 거. 그거나 계속해.
진짜 나 좀 가만히 놔두라고. 내가 하려는 일은 너희랑 아무 상관도 없거든? 잘못 짚은 거야.
제발 저놈 대머리 좀 만들자. 그래, 원작 남주를 대머리로 만드는 게 예삿일이 아니긴 해. 하지만 적군인 너까지 방해해야겠니?
끝에 가선 거의 애원조가 됐다. 바일레온은 레슬리가 홀을 등지고 서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에 마리엔은 조심스럽게 바일레온의 뒤에서 나왔다.
좋다. 사제는 등을 지고 있고, 북부 놈은 웬 남자랑 대화 중이다. 무도회 끝날 때까지 너희끼리 이야기만 하다가 해산하렴.
그때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마리엔의 앞에 멈춰 섰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선약이 없다면 저와 함께 춤추시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마리엔은 놀란 눈으로 청년을 쳐다봤다. 지금 날 지목한 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자 청년이 그렇다고 했다.
“아까부터 자꾸만 눈길이 머무르더군요. 비어스 경과 가까우신 걸 보니 친척분이신가요? 이런 자리에선 처음 뵙는 듯합니다만.”
“어, 그게…….”
“제 보좌관은 공무 수행 중입니다, 프란체티오 영식.”
바일레온이 온화한 어조로 대신 답했다.
“안타깝지만 자릴 비우는 건 어렵겠습니다.”
공무 수행 중? 아마 이게 바일레온이 오늘 밀기로 한 핑계인가 보다. 아까 영애를 돌려보낼 때도 똑같은 이유를 댔었다.
무엇보다 공무 수행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는 무게가 상당했다. 이유를 캐묻는 순간 질문하는 쪽이 실례를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무적의 핑계!
마리엔은 사소한 핑계까지 탁월한 것으로 고르는 바일레온에게 다시금 감탄했다.
“……비어스 경의 보좌관이셨군요.”
귀족 영애가 아니라 평민 출신 공무원이었다. 게다가 공무 수행 중이란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적당히 물러나야 맞았다.
“재상부의 공무라면 비어스 경이 여기 계시니까요. 한 곡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청년이 마리엔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보좌관분의 의견도 궁금하고요.”
오, 제법이야. 프란체티오 영식. 바일레온보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배짱이 두둑하잖아. 당사자 입으로 직접 답을 듣고 싶다고 은근히 돌려쳤어.
마리엔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박수를 보냈다. 칭찬할 부분은 칭찬해야 한다.
한편 바일레온은 조금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마리엔에게 말을 건넸다.
“하긴, 디디 보좌관의 뜻이 우선이죠. 대신 답해서 미안해요. 홀에 나갈래요? 어느 쪽이든 난 괜찮아요.”
“아, 아뇨. 저 사실은 춤을 못 춰서요. 죄송합니다.”
“그렇다네요.”
바일레온의 반응이 좀 묘하게 빨랐다.
“그럼 전 제 보좌관과 하던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군요……. 무척 아쉽지만 저는 그럼 이만.”
청년은 떠나는 순간까지 깍듯하게 예를 차렸다. 마리엔은 청년의 뒷모습을 보다가 바일레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응?’
이제껏 생명의 위협을 여러 차례 받고도 눈 깜짝 안 했던 마리엔이다. 뭐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그저 눈치가 꽝이라 못 알아차렸다.
그런 마리엔 자신에게도 슬슬 눈치라는 게 생기려는 걸까.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아차렸다. 입가의 미소는 경직되어 있고,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짐작 가는 이유가 몇 개 떠올랐다. 근데 하나같이 자의식 과잉인 것 같아서 입 밖으로 꺼내기가 민망했다.
“감사합니다.”
마리엔은 우선 이렇게 운을 뗐다.
“저 춤 못 추는 거 진짜거든요. 아예 댄스 교습을 받은 적이 없어요. 한데 공무 수행 중이라고 대신 거절해주시니까 얼마나 그럴듯한지.”
“……내가 왜 이러지.”
바일레온이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약간 혼란스러워 보였다.
같은 시각.
첫 곡 이후로 홀에 나가지 않은 오데트는 우연히 카인의 머리카락을 쳐다보게 됐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저게 뭐라고 그 난리를 피운담?’
자신은 바일레온의 안목을 줄곧 신뢰해왔다. 한데 이번엔 그가 틀린 것 같다. 그답지 않게 진짜 좀 이상한 인물을 재상부에 들였다.
‘그러고 보니 공작은 늘 긴 머리였다지.’
오데트는 머리카락 몇 가닥 좀 잘렸다고 반라로 뛰어나간 공작에 대한 의심을 지우려 애썼다.
물론 발끈할 만한 일이다. 오데트 자신도 다짜고짜 머리카락이 잘리면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반라로 질주?’
이후 보좌관 숙소까지 찾아가 방문을 부쉈다고 들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혹한 약혼자가 그토록 물불 안 가리고 화를 냈다니 뭔가 좀.
“황녀, 하실 말씀이라도?”
카인이 물었다. 너무 빤히 쳐다봤나. 오데트는 얼른 아무것도 아닌 척 눈을 내리깔았다.
“아뇨.”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던 건 눈치 못 챘겠지? 오데트는 괜히 나쁜 짓 하다 들킨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조금 억울했다. 자신은 그냥 약혼자의 머리카락을 좀 쳐다봤을 뿐인데!
‘아아, 또 머리카락 생각.’
이 단어를 머릿속에서 몰아낼 방법이 있긴 할까? 오데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직 정식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