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26)
이른 저녁부터 비어스 가가 들썩거렸다. 바일레온과 둘째 클로이즈가 오데트의 초대로 오페라 하우스에 가게 됐기 때문이다.
4황녀와 블랙우드 공작의 약혼식 이후 첫 동반 외출이라는 점에서 오늘은 특별했다.
공연보다도 박스석을 자주 힐끔거릴 게 분명한 사람들 때문에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며칠 전부터 극장 주변에 암표상이 쫙 깔렸대.”
막내 데이지가 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1층 좌석은 원래 가격의 열 배를 줘도 못 구한다던데.”
“암표상한테 사봤자 안에 들어가면 쫓겨날걸. 왜냐면 암표상은 그걸 몇 사람에게나 팔았을 테니까.”
“언니네 자린 어디랬지?”
클로이즈는 입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활짝 웃었다.
“황녀 전하의 바로 옆 박스석.”
“목걸이 더 화려한 것으로 바꾸지 그래, 클로이즈 비어스. 오늘 밤 극장에서 수백 명의 부러움을 살 텐데 힘 제대로 줘야지.”
“아, 그럴까?”
클로이즈는 막내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외할머니께 물려받은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겠다며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에 막내가 입을 헤벌렸다. 맨날 책을 끼고 사는 언니가 제 말뜻을 못 알아들을 줄은 몰랐다.
“이미 노략질한 해적처럼 주렁주렁 걸고 있구먼. 외할머니의 사파이어 목걸이? 쳐다보기만 해도 목에 담 걸릴 것 같은 그걸 진짜로 찬다고?”
“……해적이요?”
마리엔이 주방 쪽에서 걸어 나오며 물었다. 데이지는 ‘보좌관님이 왜 거기서 나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마리엔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었다.
“보좌관님은 또 왜 이렇게 수수해요? 언니한테 보석 약탈당한 아가씨 같네.”
비어스 영애와 달리 저는 언제라도 전력 질주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어디서 뭘 하다가 누구에게 쫓길지는 저도 모르거든요.
마리엔은 속으로 대답했다. 프릴 장식 하나 달리지 않는 매끈한 단색 드레스에 주머니 달린 외투를 걸쳤다. 누군가에게 잡아 뜯길 염려가 있는 브로치는 달지 않았다.
누구한테 잡아 뜯기냐고? 그 역시 지금으로선 예측할 수가 없다. 아무튼 마리엔은 오늘에야말로 바일레온 보조를 제대로 해낼 작정이었다.
그때 셋째 가렛이 키우는 거대 앵무새가 복도를 날아가며 소리쳤다.
“꼴 좋다!”
“…….”
“디디 꼴 좋다!”
방금까지 의지로 활활 불탔던 마리엔은 께름칙한 표정이 되었다. 데이지에게 저거 칭찬이냐고 묻자, 그럴 리가 있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탐정의 사전엔 칭찬이 없어요.”
“전적으로 사전 제작자의 잘못이네요.”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데이지가 오빠 가렛이 있는 2층을 째려보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어마어마하게 알이 굵은 사파이어 목걸이를 착용한 클로이즈가 계단을 내려왔다. 마리엔과 클로이즈는 서로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좌관님!”
“조심해서 걸으세요, 영애. 자칫하면 목뼈가 부러지겠어요…….”
“이런 차림으로 대문을 나서실 순 없어요! 비어스 가가 손님을 홀대한다는 소문이 이웃 나라까지 퍼져버릴 거예요!”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은 바일레온 남매고, 마리엔은 어디까지나 동행인일 뿐인데도 클로이즈는 완강했다.
둘째는 마리엔이 드레스를 갈아입지 않으면 본인이 차고 있는 목걸이를 넘겨주겠다고 을러대기까지 했다.
“가, 가, 갈아입겠습니다!”
마리엔은 후다닥 2층으로 튀었다. 첫날 본 크리스털이 눈꽃 모양으로 박힌 연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내려갔다. 클로이즈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액세서리를 하나도 안 걸친 건 아쉽지만…… 보좌관님은 몸에 거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는 듯하니까요.”
무슨 말씀을.
저도 보석을 정말 좋아한답니다. 다만 도주하는 데에 방해가 될 뿐이지요.
마리엔은 혹시 이따 뛰는 일이 생긴다면, 제발 크리스털이 떨어지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하필 이걸 입어버렸네. 반짝이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마리엔 디디를 발견하게 생겼어.’
그래도 다행히 외투는 사수했다. 마리엔은 주머니 속의 작은 병을 손으로 굴리며 현관을 나섰다.
“클로이즈, 눈이 부시구나.”
바일레온이 마차에 오르는 여동생의 손을 잡아주었다. 클로이즈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보다 보좌관님이 훨씬 귀엽거든. 오늘 밤 비어스 가의 손님에게 반하는 남자가 꽤 많이 나올 거야.”
마리엔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무분별한 짝짓기에 열 올리는 클로이즈의 특성이야 이미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저런 소릴 당사자에게 다 들리도록 크게 말할 줄은 몰랐다.
딱히 자기 자랑을 할 의도는 아니지만, 이 마리엔 디디를 보라. 머릿속으로 온갖 추접스러운 상상을 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니 감쪽같지 않나.
‘아무도 내가 이만큼 돌아 있는지 모를걸.’
한데 바일레온이 조금 복잡한 얼굴로 마리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약혼식 당일 마리엔이 귀족 영식으로부터 댄스 신청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리엔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 사람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도 숨 막히게 잘생겼을까. 그저 늘 하던 대로 바일레온의 얼굴을 열심히 뜯어먹었다.
“디디 보좌관, 오늘…….”
목소리가 잠겼어. 미쳤어! 오싹해!
“발밑 조심해요.”
“앗, 넵.”
마리엔은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게 주의하며 마차에 올랐다. 바일레온이 여자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페라 하우스 박스석이라니. 흥분돼서 손이 떨려요. 보이시죠? 저 손 떨리는 거.”
클로이즈가 마리엔 눈 앞까지 손을 들어 보였다.
“후후, 거기에서 온갖 일이 다 일어난다고요…….”
“저 현실에서 후후, 라고 웃는 사람 본 건 영애가 처음이에요.”
“후후, 후후후.”
이 아가씨는 자기 오빠가 10년째 한 사람만 바라보는 중임을 인지하고 있겠지?
오늘 그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 박스석에 약혼자랑 앉는 4황녀가 외사랑 상대임을 모르지는 않겠지?
마리엔은 클로이즈를 빤히 쳐다봤다.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후후후.”
알지만 상관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클로이즈의 머릿속을 잠깐 열어보고 싶었다. 미친 사랑의 작대기는 대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
‘접점만 있다면 그만인 거야? 그럼 나랑 자기 오빠도 엮어먹을 수 있겠네.’
아하하하. 생각만으로도 웃겼다. 어떻게 제가 감히 오데트 님의 진정한 반려자를.
그러다가 마리엔은 아까 바일레온이 뭔가를 말하려 했음을 기억해냈다.
“비어스 경, 제가 마차 탈 때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 했나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가 엷은 미소를 띠었다.
“별말 아니에요.”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거리의 불빛이 수려한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나뭇가지를 닮은 갈색 머리카락이 따라 흔들렸다. 바일레온이 작게 기침을 두어 번 했다.
◇ ◆ ◇
마차에서 내린 후부터는 끝없이 인사를 해야 했다.
명문가 출신 재상 남매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이들이 공연장에 수두룩한 까닭이다.
동행한 마리엔도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마리엔이 재상의 친척이 아니라 부하직원이란 소개를 들은 자들의 반응이 퍽 흥미로웠다.
약혼식 날의 귀족 영식처럼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재상 남매와 가까운 평민을 어떻게 대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람도 많았다.
“클로이즈와 난 전하께 인사드리러 갈 겁니다. 혹시 디디 보좌관도 같이 가겠어요?”
“으, 그럼 그놈…… 공작 얼굴도 봐야 하잖아요. 전 여기서 기다릴래요.”
“알았어요.”
바일레온의 목소리는 출발 당시보다 조금 더 잠겨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마리엔과 같이 퇴근하면서부터 재상은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이 쌓이기 시작했다. 과중한 업무량을 성토해야 마땅한 문제건만, 바일레온은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바로 일감을 저택에 가져온 것이다.
그는 가족들과 화기애애하게 저녁식사를 한 다음, 자기 방에서 밤늦도록 일을 했다.
원작대로라면 바일레온은 오늘 밤부터 몸살감기를 앓을 예정이었다. 원인은 과로.
집에서 약 먹고 푹 쉬면 나을 테지만, 그가 오데트에게 당일 불참 통보를 날릴 리 만무하다.
집에서 출발할 당시만 해도 몸이 좀 무거운 정도기에 그는 묵묵히 참고 오페라 하우스에 간다.
그러나 건조한 공연장 환경에 바일레온의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된다. 머리도 몸도 무거운 탓에 평소라면 쉽게 해결했을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그럼 그 공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얼어 죽을 북부 놈의 차지가 된다.
‘애당초 바일레온이 왜 과로했는데?’
그는 오데트와 제국을 위해서 몸 바쳐 일했다. 그렇게 개미처럼 일하다가 아프니까, 여태 뒷짐 지고 있던 놈이 스르륵 나타나 좋은 기회를 채어 간 거다.
자신은 오늘 이 사건을 바로잡을 참이었다. 마리엔은 바일레온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아직 본인이 아픈 것도 자각 못 하는 상관에게 따끈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비어스 경, 목이 좀 간질간질하지 않으세요? 이거 드세요.”
“이게 어디서 나왔어요?”
마술처럼 뿅 등장한 찻잔에 바일레온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마리엔이 방긋 웃었다.
“과연 박스석은 좋네요. 복도에 급사가 있어서 뜨거운 물 부탁할 수도 있고.”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에서는 새콤한 레몬 냄새가 났다.
바일레온은 냉큼 받아 마시지 않고 제 보좌관에게 권했다. 예상대로였다. 마리엔은 이건 비어스 경의 몫이라며 어서 마시라고 재촉했다.
“오빠, 숙녀가 주는 거라면 그게 독이라도 흔쾌히 마셔야지.”
클로이즈 비어스. 광기 어린 짝짓기 중독자.
도와주는 건 좋지만 너무나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본인은 되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바일레온은 고마움을 표하며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약간 씁쓸…….”
그가 말을 끝맺지 못한 이유는 예의 바른 남자라서다. 마리엔이 일부러 수고롭게 준비해주었는데, 거기에 대고 차 맛이 어떻다고 품평해선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다. 새콤달콤한 레몬차의 뒷맛이 씁쓸한 이유는 거기에 가루약을 탔기 때문이다.
“조금 떫나요?”
마리엔은 모든 게 제 불찰이라는 듯이 눈썹을 끌어내렸다. 그러자 바일레온이 아니라며 뜨거운 레몬차를 말끔히 마셔 없앴다.
‘에휴, 착한 사람. 그게 감기약이라서 망정이죠. 당신 동생 말처럼 독이었으면 당장 죽었어요.’
공연장 특유의 어두운 조명이 찻잔 바닥에 남은 미량의 잔여물을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미션 클리어.
마리엔은 손가락으로 찻잔 바닥을 슥 훔친 다음, 복도의 급사에게 돌려주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마리엔이 자리에 앉자마자 모든 조명이 꺼지더니 무대의 커튼이 걷혔다.
이제 남은 일은 오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오데트의 귓불을 잘 감시하는 것이다.
오데트는 오늘 오페라 하우스에서 귀걸이 한쪽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보통 귀걸이가 아니다. 황제의 하사품이다.
마리엔은 바일레온이 귀걸이를 찾아서 직접 오데트 귀에 달아주는 장면을 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