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28)
화병이 없다.
마리엔은 숙녀 휴게실보다 훨씬 좋은 오데트의 개인 휴게실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봤자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람.”
마리엔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휴게실 바닥을 기어다녔다.
가구가 바닥이랑 붙어 있으면 화병 대신 거기에나마 기대를 걸어볼 텐데. 무게가 좀 나가겠다 싶은 가구마다 다리가 달려 있었다.
전개가 원작이랑 달라져서 골이 나는 경우는 또 새롭다.
귀걸이는 지금 범인이 갖고 있더라도 급사가 두고 갔다는 화병은 있어야 할 게 아닌지.
“이렇게 되면 또 저놈을 벗길 수밖에 없는데.”
북부 놈의 뻔뻔한 면상이 떠올랐다. 그저 바일레온의 몫이 아니라 아쉽기만 했던 귀걸이 분실 건이 북부 놈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니까 열이 뻗쳤다.
“아랫사람들 고생은 있는 대로 시켜놓고. 지금 동원된 인원만 몇이야? 이러고서는 오데트의 신임은 자기가 가져간다 이거지?”
불현듯 머릿속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이래서 책 소개에 계략남 키워드가 있었구나! 머리는 오데트가 계속 쓰고, 북부 놈은 시종일관 몸만 쓰는데 왜 인마가 계략남인가 했지.
마리엔은 뒤늦게 탄식했다. 동시에 분노했다.
‘여주를 지키려고 계략을 짜도 모자랄 판에, 어? 네놈이 판 구덩이에 밀어넣었다가 네놈이 구해줘?’
그게 뭔 계략남이야. 정의부터 잘못됐어.
마리엔 디디의 세계에서는 그런 놈을 빌런이라 부른다.
“머리털도 속도 시커먼 새끼…….”
마리엔은 분연히 휴게실 문을 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고, 악마의 이름을 부르면 놈이 나타난다더니 과연 그러했다.
혼자 북부 놈을 좀 씹었을 뿐인데 놈이 출입문 너머 떡하니 서 있었다.
“미친 토끼, 우리 얘기 좀 할까?”
◇ ◆ ◇
카인 놈은 일부러 제 뒤를 밟은 모양이다. 마리엔이 그렇게 추측하는 까닭은 문이 열렸을 때 놈의 표정 때문이었다.
카인 블랙우드는 지루해하고 있었다. 흡사 안에 있는 사람이 언제 문을 열고 나올까 기다리다가 지겨워진 인간처럼.
“여긴 오페라 하우스 측이 제공한 4황녀의 개인 휴게실임을 알고 있겠지.”
카인이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왔다. 마리엔은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놈의 가슴팍에 코가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러자 예의 그 싸늘한 북쪽 바람과 눈밭과 부러진 나뭇가지의 냄새가 났다.
‘이, 이…… 지긋지긋한 클리셰! 눈밭 냄새를 내가 어떻게 알아! 태어나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어. 근데 왜 눈밭 냄새라고 인식해!’
마리엔은 분에 가득 찬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그 상태로 뒤로 쭉쭉 밀렸다.
당연하다. 놈은 짐마차도 맨몸으로 막아내는 괴물이다. 마리엔 디디의 쪼끄만 몸쯤은 새끼손가락으로도 돌릴 수 있을 거다.
“내 약혼녀가 아직 박스석에 있는 건 너도 알 텐데. 왜 재상의 제3보좌관이 황녀의 빈 휴게실에서 나오는지, 이유를 듣고 싶군.”
카인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찰칵, 하고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귀걸이를 수색 중이죠.”
마리엔은 한 발 더 물러나는 대신 고개를 최대한 젖혀 놈을 올려다봤다.
“우리 모두가 귀걸이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었나요, 블랙우드 공작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처음부터 제대로 된 존대를 하는군.”
“오늘은 아침부터 남동풍이 불더라고요.”
마리엔은 돌연 놈에게서 떨어져 부채를 펼쳐 들었다. 클로이즈가 하듯이 우아하게 살랑거리는 게 아니라, 상대를 부채 바람으로 날려버릴 기세였다.
“전 대답을 했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여쭐 차례네요. 약혼녀가 있는 공작님께선 왜 제 앞을 가로막고 문을 잠그셨나요?”
마리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수색 인원이 많을수록 좋은 상황인데요.”
“……비어스 가에서 똑똑해지는 약이라도 제조해주던가?”
카인이 입매를 비틀었다.
“갑자기 내 약혼녀처럼 말하는군.”
“제가 어찌 감히 고결하고 영민하신 황녀 전하께.”
“댈 바는 아니지.”
카인이 말을 싹둑 잘랐다.
“오데트 로즈는 미친 토끼 너보다 만 배는 명석하니까.”
열 배도 아니고 만 배라니 말이 좀 심하네. 나는 뭐 삼엽충이야?
마리엔은 입술을 꼭 오므렸다. 이렇게라도 쌍욕이 튀어나가는 걸 참아야 했다.
“피차 궁금한 게 있는 상황이야. 공연히 시간 끌지 말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고.”
카인은 마리엔더러 원래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먼저 질문을 해보라고 덧붙였다. 자기는 마리엔의 질문을 듣고 난 다음에 말하겠다나.
짜증 나지만 놈의 말이 맞았다.
놈은 작정하고 마리엔 뒤를 밟았다. 그리고 마리엔은 귀걸이의 소재부터 명확히 하고 싶었다.
“네놈이 귀걸이 숨겼지?”
“…….”
“네 차례야.”
“…….”
“입이 들러붙기라도 했어?”
“……내 머리카락의 비밀을 알고 있나?”
질문 맞교환이 끝났다. 마리엔은 이번엔 너부터 대답하라고 했다. 카인 놈이 가차 없이 쳐냈다.
“아니, 너부터.”
역시 재수 없는 놈이었다.
“넌 날 없애고 싶어 해. 그런데 약혼식 날 아나이스 사제에게 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어. 왜지?”
카인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리고 내 비밀을 어떻게 아는 거지?”
아나이스 사제와 마주친 것까지 알다니. 마리엔의 부채질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놈은 그때부터 이미 제 행적을 보고받고 있었다.
짜증이 팍 났다.
오데트는 원작 여주고, 오데트가 내리는 판단엔 합당한 이유가 있으며, 그녀는 바일레온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리엔 자신이 오데트에게 휘둘리는 것은 괜찮았다. 어차피 제국 사람들 전부가 오데트의 체스말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카인 놈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면 말이 달라진다.
“내가 없애고 싶은 건 네가 아니라 네 머리카락뿐이거든.”
“그게…….”
“카인 블랙우드가 죽으면 북부는 누가 지켜? 게다가 레슬리 아나이스는 2황자의 측근이잖아. 내가 네놈 비밀을 왜 그쪽에 흘리겠어? 오데트를 칠 약점을 쥐여주는 것도 아니고.”
카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진짜 태어나서 혼란을 겪는 게 처음인가 보다.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으면, 얼음 심장을 지녔다는 북부 놈도 저런 표정을 하게 되는구나. 마리엔은 뜻하지 않게 견식을 넓혔다.
“어쨌든 넌 내 약혼녀를 지지한다는 거군.”
“그거라도 알아들었으니 다행이네.”
“내가 당장이라도 머리를 밀면, 날 귀찮게 하는 짓을 그만두겠다는 뜻이기도 한가?”
“응.”
“넌…… 대체.”
카인이 혼잣말이라기엔 너무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공무원 시험은 커닝으로 통과했나?”
이야기가 왜 거기로 튄담. 마리엔은 인상을 찡그렸다.
“내 비밀을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해봐.”
“카인 블랙우드가 가진 괴력의 원천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다. 짧게 자를수록 힘이 사라진다. 됐어?”
“정말 알고 있군. 내가 잘도 널 살려둘 거라고…….”
“그만.”
마리엔이 부채를 세워 카인의 입을 때렸다. 비장하게 대사를 읊느라 바빴는지, 놈은 부채를 막지 못했다.
“양심도 없는 놈. 너 혼자 정보 빼 가기야? 이제 내 질문에 답할 차례야.”
마리엔이 카인을 노려봤다.
“4황녀의 귀걸이, 네가 숨겼지?”
카인은 이채가 도는 눈으로 마리엔을 마주 봤다.
“어째서 넌 그것까지 알고 있는 건데?”
“하.”
잡았다, 요놈.
마리엔은 피곤한 기색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비어스 영애도 진상을 알고 있어. 내가 제때 안 돌아가면 영애가 비어스 경과 함께 올 거야. 수행원들이 네 몸을 뒤지기 전에 알아서 내놔.”
“주면?”
“주면, 뭐?”
“어쩌려고?”
얘가 계략남이라더니 머리가 돌아가다가 말았나. 마리엔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대꾸했다.
“당연히 주인에게 돌려줘야지.”
“그럼 굳이 네 손을 거칠 필요 없이 내가 직접 황녀에게 주면 되지 않나.”
“안 돼.”
마리엔이 잘라 말했다.
“4황녀에게 마음의 빚을 지우려고 벌인 자작극이잖아. 근데 네가 직접 황녀에게 전달해? 그건 원래 네 뜻대로 되는 건데.”
“자작극이라고 실토하지.”
“그래도 안 돼! 아무튼 안 돼. 나한테 넘겨. 아니면…….”
카인이 이어질 말을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양 고갯짓했다.
“비어스 경에게 넘기든가.”
카인은 말없이 마리엔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돌연 이상하게 웃었다.
“미친 토끼 네가 이러는 게 다…… 비어스 재상 좋으라고 하는 거였군. 하긴 넌 상관을 좋아하고, 네 상관은 내 약혼녀를 좋아하지.”
“멋대로 생각해. 넌 귀걸이만 내놓으면 돼.”
“나와 맞서서 쟁취한 공을 오롯이 상관에게 돌리겠다니. 비어스는 네가 이러는 걸 아나?”
이 새끼한테는 틈을 주면 안 된다. 이거 봐라. 자기가 대답할 차례인데도 은근슬쩍 또 질문하고 있다.
“비어스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너 대머리만 돼봐라. 내가 이렇게 너랑 말씨름해주나.”
마리엔은 소리 나게 부채를 접었다.
“귀걸이 내놔.”
“없어.”
“헛소리 말고.”
“수행원을 불러서 몸수색해봤자 못 찾을 거다.”
마리엔은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카인이 다 알고 왔다면 몸수색에도 대비했을 것이다.
“……어디 숨겼지?”
카인이 웃었다.
“지옥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얼굴이군.”
그가 이어서 말했다.
“분홍색 봉투에 귀걸이를 넣어놨어. 한번 찾아봐. 이 건물에서 제일 어둡고 무섭고 지저분한 곳에 두고 왔으니까.”
◇ ◆ ◇
“그래서 말인데요. 이 건물에서 제일 어둡고 무섭고 지저분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마리엔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청소부에게 물었다. 마리엔의 옆에는 클로이즈가 서 있었다.
사실 청소부에게 오기 전 두 사람의 의견은 갈렸다.
클로이즈는 범인의 힌트를 듣더니 대번에 극장주를 찾아가자고 했다. 극장주의 사무실엔 오페라 하우스의 내부 구조도가 있기 마련이다. 또 그에겐 직원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권한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
마리엔은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내부 구조도엔 그곳이 무섭고 지저분한지까지는 안 나와 있다.
그리고 이건 권한 적은 공무원으로 여기저기 치이면서 깨달은 건데, 고용주 앞에서 직원이 편히 얘기하기란 힘들 거다.
제일 어둡고 지저분한 장소를 말하는 순간 왜 그곳을 깨끗이 하지 않았냐는 힐책을 듣기 십상이므로.
결론은?
보다시피 마리엔의 승리였다. 클로이즈는 본인이 아랫사람 입장을 생각 못 했다며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여하튼 청소부는 마리엔의 질문을 듣더니 두 번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제일 어둡고 무섭고 지저분한 곳이라면 역시 지하창고죠.”
와, 어떻게 딱 네 글자만 들었는데도 거기 상태가 눈에 선하지? 마리엔은 한숨을 삼켰다.
증축과 수리를 반복해온 250년 역사의 오페라 하우스. 그 아래 있는 지하창고.
“먼지 구덩이겠네요.”
“오, 아가씨. 먼지가 문제가 아니랍니다. 최근 누군가 거길 들어간 게…… 5년 전이던가?”
나이 지긋한 청소부가 덤덤히 얘기했다.
“그 5년 전에 들어간 놈은 급사였는데 동료들과 내기를 했다 하더라고요. 소위 담력 테스트였지요. 거드름 피우며 들어간 놈이 삼십 분도 안 돼서 횡설수설하며 나왔다네요. 그길로 사제에게 달려가 살려달라고 빌었답니다.”
“살려달라고 했다고요?”
“예, 아가씨. 못 들어보셨나요? 그 지하창고엔 저주가 걸려 있다고들 해요. 들어간 사람마다 본인이 제일 무서워하는 환각을 보고 실성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청소부의 말투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한데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