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3)
“잡화점 주인한테 물었더니 염색약 도포하고 삼십 분이면 충분하대요. 삼십 분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으시죠? 냄새는 별로지만 그건 며칠 지나면 없어진다니까.”
마리엔은 탁상달력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오늘이 4월 1일이잖아요. 블랙우드 공작이 수도로 몰래 들어오기까지 약 2주가 남아 있네요. 그 인간, 사람들 관심 안 끌려고 혼자 오고 있거든요. 잘 닦여 있는 길 놔두고 북부 사람 일부만 알고 있는 지름길을 통해서요. 험한 협곡이랑 곳곳에 늑대가 깔린 숲을 통과해야 되니까 사실 거기가 지름길인 걸 알아도 아무도 안 지나다니지만.”
“카론의 협곡…….”
“네, 바로 거기요. 늑대 젖 먹고 자랐다는 소문이 도는 인간이니까 뭐. 망혼의 숲 통과쯤은 별일도 아니겠죠? 출장길에 겸사겸사 친척집 들르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잠깐.”
“놈은 2주 후에 황녀 전하와 궁 밖에서 먼저 만날 거예요. 전하의 옛 저택은 정기 청소하는 수요일만 빼면 비어 있잖아요. 거기가 둘의 약속장소예요. 아무튼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긴 한데요. 서두른다고 해서 또 나쁠 건 없거든요. 일단 흑발로 염색을 해보고요. 이것도 안 먹힌다 싶으면 재빨리 다음 방법으로…….”
“디디 보좌관.”
“네?”
마리엔은 바일레온과 눈을 마주치고서야 깨달았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자기 혼자 앞서나가는 중이었던 거다.
젊은 재상은 충격에 빠진 듯했다. 이마를 가지런히 덮고 있는 아몬드 색 머리카락 사이로 굳은 미간이 보였다. 마리엔을 향하는 시선에서는 극도의 혼란이 묻어났다. 엷은 분홍빛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늘 차분함을 유지하는 사람에게서 빈틈이 보이는 순간이다. 세상에. 이럴 순 없어. 마리엔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잘생겼어요…….”
“…….”
“정말이지 심장에 해로운 미모예요. 쿵쾅쿵쾅. 들리세요? 쿵쾅쿵쾅.”
마리엔은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채 울상을 지었다.
개인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건 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처럼 냉기 풀풀 날리는 북부 놈이 오데트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게 오데트 잘못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처음부터 흑발 냉미남을 남주인공으로 정한 작가님의 책임이랄까.
‘하지만요, 4황녀 전하. 우리 재상님껜 정말 조금의 기회도 없는 건가요?’
마리엔은 속으로 구슬피 울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데트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려서는 헤어진 옛 애인처럼 읍소하고픈 심정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다시 한 번만 생각해봐달라고.
‘황녀 전하는 로판 여주인공이라서 눈 닿는 곳마다 미남이 즐비한 삶을 살아오셨지요. 그래서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년을 소꿉친구로 가질 수 있었던 거고요. 그런데요. 저희 같은 엑스트라 평민들은요. 어릴 적 이웃집에 누가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나.’
이웃집에 소년이 살았다면 십중팔구 놈은 소꿉친구가 아니라 적이었다. 못생기고, 내 인형 빼앗아서 목 분지르고, 코딱지 판 손가락을 옷에 슥 닦는 그런 놈이었다.
그럴 때 더 분통 터지는 건 어른들의 농담이다.
맨날 그놈이랑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이다 보니 듣는 말인데, 너희 싸우다가 정든다는 농담을 들으면 분한 나머지 울음이 터지는 거다.
‘그래. 백 보 양보해서 어릴 땐 이 남자의 가치를 잘 몰랐다고 쳐.’
마리엔의 시선이 바일레온의 몸을 끈끈하게 핥아 내렸다. 책상에 가려서 안 보이는 부분은 회의시간의 기억으로 대체했다.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느슨히 끄르지 않는 크라바트, 넓고 각진 어깨에서부터 날렵한 허리까지 이어지는 몸선, 마리엔 자신의 손바닥으로는 차마 다 감싸지지 않을 가슴이며, 위로 올라붙은 탄력적인 엉덩이와 허벅지.
‘아, 소중한 매력 포인트를 지나칠 뻔했네.’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손을 쳐다보며 울먹였다. 푸르스름한 힘줄이 도드라지고 마디는 툭툭 불거졌으나 거친 무인의 손과는 다르다.
깨끗이 다듬은 손톱에서 느껴지는 청결함! 한겨울 눈밭에서 구르다가 맞잡아도 따스할 온기! 언제든 그대를 향해 뻗을 준비가 된 어른의 손!
저 손으로 만년필을 쥐고 있을 때 발산되는 매력을, 오데트는 정녕 모르는 걸까?
어릴 땐 큰 감흥이 없었을지 몰라도 현재 오데트는 스물두 살 성인이다. 시력이 멀쩡하다면 바일레온에게 아무 감정도 안 생길 순 없다.
마리엔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조건은 차치하고 겉모습 하나만 놓고 봐도 바일레온 비어스가 남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얼굴은 온화한데 몸은 이렇게나 화가 나 있잖아.
차가운 오데트를 녹인 뜨거운 밤 기술?
흥, 북부 흑발 놈이 해낸 건 우리 비어스 경도 다 할 수 있어. 어차피 북부 놈도 동정이었잖아. 여긴 동정이면서 절륜한 게 가능한 장르야. 그러니까 북부 놈보다 동정 지킨 기간이 1년 더 긴 비어스 경은 365일만큼이나 더 절륜할 게 당연하지!
“염색하셔야 돼요!”
마리엔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4황녀 전하는 흑발을 좋아하시거든요!”
“…….”
“정보의 출처는 묻지 마세요.”
“막 그걸 물으려던 참입니다만.”
“어쨌든 제 말에 따라보시기예요. 아이참. 겨우 염색이잖아요. 팔 한 짝을 자르는 것도 아니고 머리 색을 바꾸는 정도니까.”
“…….”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면, 어……. 원래 염색은 제가 하려고 했는데요. 제가 실수로 비어스 경 머리에 약품을 쏟아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둘러대세요. 부하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는 평소 이미지와 되게 어울리는 핑계잖아요. 그렇죠?”
갑자기 이런 식으로 지체하는 시간마저 아까워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부 놈은 수도를 향해 말을 달리고 있을 터였다. 마리엔은 일단 염색약부터 갖고 오겠다며 몸을 돌렸다. 아예 가방에 넣어서 들고 올걸 후회하면서.
“거기 서요.”
뒤에서 부드러운 저음이 들려왔다.
“디디 보좌관, 다시 자리에 앉아서 내 질문에 대답해요.”
무슨 명령이 이렇게 듣기가 좋담? 마리엔은 얼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신이 적국의 요원이나 포로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랬다면 바일레온이 첫 질문을 하기도 전에 죄다 실토했을 테니까.
이건 단순히 마리엔 디디가 상관에게 푹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일레온의 목소리엔 묘한 힘이 있었다. 언성을 높이지 않고도 상대를 제 말에 따르게끔 만든다.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네요. 다소 민감한 질문부터 할게요.”
바일레온이 마리엔의 배를 잠깐 쳐다본 후에 물었다.
“혹시 아이를 가져서 금전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까?”
“아니요.”
“그럼 왜 의사에게 임신 여부 확인을 받아야 했죠?”
“음, 그건.”
남의 몸에 빙의했는데 그 사람이 여자일 때 알아놔야 할 부분이니까. 집이 없으면 집부터 구했을 거고, 당장 먹을 게 없다면 음식부터 구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렸는데 알몸이었다면 옷부터 찾았을 터다.
한데 마리엔 디디는 의식주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였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그것 하나는 좋았다. 그렇다면 바일레온을 남주인공으로 만드는 여정에 오르기 전, 그다음으로 중요한 걸 확인해둬야 했다.
“전 귀여우니까요.”
마리엔이 힘주어 말했다.
“성인 여성이라면 별문제가 없어도 1년에 한 번은 검진을 받는 게 좋대요. 그래서 의사를 찾아갔는데 마침 진료실에서 제 또래의 임신부가 나오는 거예요. 거기까지 간 이상 저도 확인을 받아야겠다 싶었어요.”
“그게…….”
바일레온은 두 문장의 인과관계를 추측해보려 애썼다. 자기가 놓친 부분이 있는지 되짚는 중인 것 같았다.
“디디 보좌관이 귀여운 것과 상관있나요?”
“혹시 모르니까.”
“디디 보좌관도 알겠지만 임신 여부는 보통…… 피임 안 하고 관계했거나 월경이 이유 없이 밀릴 때 확인하곤 합니다만.”
아주 개인적이고 민감한 사안이다. 그런 만큼 바일레온은 최대한 사무적인 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변에 깔린 걱정 때문에 100퍼센트 사무적인 느낌을 내는 데엔 실패했다.
실은 제가 빙의를 했거든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리엔은 마음속으로 열심히 대답했다. 바일레온이 원하는 ‘진실’에 부합하지만, 이해는 훨씬 더 안 될 이야기.
전 몸 주인에 대해 잘 몰라요! 원작엔 안 나왔지만 마리엔에게 연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아본 거예요. 이 아가씨는 주기가 어떻게 되지? 몸이 안 좋아서 월경이 끊긴 상황인가? 어영부영하다가 배가 불러오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단 말이죠.
“교제하는 상대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어째서…….”
바일레온이 말을 하다 말았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른 다음, 마리엔에게 말했다.
“정리하자면 디디 보좌관은 현재 임신 중이 아니고 그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도 아니군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실례가 많았어요.”
다음 질문을 들은 순간 마리엔은 눈앞의 상대에게 재차 반하고 말았다.
“블랙우드 공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나요?”
“아니요…….”
이다음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블랙우드 공작이 4황녀 전하와 약혼 예정임을 어떻게 알죠? 두 사람은 이렇다 할 교류도 없어요. 작년 무도회에서 몇 분간 대화한 게 전부입니다.”
“전하께선 그때 이미 블랙우드 공작을 약혼 상대로 점찍은 상태셨어요…….”
“4황녀 전하께서 디디 보좌관에게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합니까?”
원작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오데트는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본인의 결혼 상대를 은밀히 물색했다. 오데트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서출 황녀다. 그런 오데트가 제위에 오르려면 강력한 힘을 가진 동시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카인 블랙우드는 1순위 후보였다. 어지간해선 변동되지 않을 후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데트에게 작년의 무도회는 후보 면접까지도 아니고 그냥 상대 실물확인 정도에 불과했다.
이걸 다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