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31)
바일레온은 앞으로 고꾸라지는 마리엔의 몸을 받쳐 안았다. 마리엔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소스라치듯 놀라며 바일레온에게서 떨어졌다.
“으아, 죄송해요. 어, 어어?”
이번에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려 했다. 바일레온은 마리엔의 등을 감싸듯 안은 후에 물었다.
“아까부터 왼쪽 다리를 절고 있는 거 몰라요?”
“네? 왼쪽 다리를…… 제가요?”
역시 모르고 있었군. 바일레온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까지 내가 데려다줄게요.”
마리엔이 입을 벌렸다. 당연히 괜찮다고 말하려는 거겠지. 그냥 자기가 조심해서 걸으면 된다고. 비어스 경이 도와주실 필요까진 없다고 말하려는 거다.
하지만 안 들어. 이번엔 안 돼.
바일레온은 마리엔의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보좌관을 안아 들었다. 마리엔이 버둥거렸다.
“가만히 있어야 내가 안 힘들어요.”
이 말 한마디에 마리엔이 즉시 얌전해졌다. 바일레온은 다시금 한숨을 삼켰다.
‘자기가 다친 건 인지도 못 했으면서, 나 힘들게 안 하겠다고 지금.’
이 기분은 뭘까. 조금 화가 나는 것 같다. 화가 나면서도 속상하고, 씁쓸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아무튼 조용히 엉망진창이었다.
“비어스 경, 저 이거 빌린 옷이거든요. 옷 주인한테 돈을 물어줘야 할 거예요.”
“클로이즈가 해결하러 갔어요.”
“제가 입고 온 드레스는…….”
“그것도 클로이즈가 수거해서 올 거예요.”
어떻게든 자길 내려놓게 만들려나 본데 어림없다. 바일레온은 긴 다리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지하 2층엔 어떻게 알고 갔어요?”
“…….”
“뭔가를 듣고 내려간 거죠?”
오페라 하우스는 지하 2층, 지상 4층짜리 규모다. 휴게실과 오락실, 회의실, 식당, 바 말고도 다양한 실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작은 귀걸이를 숨길 곳이야 지상에도 충분하다.
한데 마리엔은 움직이기 편한 옷을 빌려 입었다. 그러고는 남들은 생각도 못 한 어두운 지하실로 직진했다. 두 시간 넘도록 거기만 파헤쳤다.
그건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하나는 마리엔 디디가 귀걸이를 숨긴 범인일 경우다. 인적 드문 장소에서 적당히 시간을 죽이다가 ‘내가 찾아냈네’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나머지는 범인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그곳으로 향한 경우다. 그리고 바일레온은 자신의 보좌관이 범인이 아니라는 데에 재상직을 걸 수도 있었다.
“디디 보좌관.”
바일레온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마리엔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밤 황녀 전하의 동선은 단순했습니다. 귀걸이에 발이 달린 게 아닌 이상 그게 지하 2층에서 나오는 건 말이 안 돼요. 누구예요?”
“……누구겠어요?”
마리엔이 조그맣게 되물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귀걸이는 비어스 경이 찾아냈고, 전하께선 일을 키우지 않기로 결정하셨는데.”
귀걸이를 찾음과 동시에 수색은 종료됐다. 수사가 아니라 수색이다. 여전히 오늘 사건은 귀걸이 절도가 아닌 귀걸이 분실로 다뤄지고 있다.
발이 묶였던 손님들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삼삼오오 오페라 하우스를 나가는 중이었다.
바일레온은 품 안의 마리엔을 내려다봤다.
“아까 블랙우드 공작이랑 마주쳤거든요. 제가 자작극이 아니냐고 따져 물으니까 공작이 말했어요. 이 건물에서 가장 어둡고 무섭고 지저분한 곳을 찾아보라며.”
또 카인 블랙우드였다. 그에게서 단서를 얻어낸 마리엔이 얼마나 씩씩하게 지하창고로 내려갔을지 눈에 선했다.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혹시 내가, 못 미더워요?”
마리엔은 뛸 듯이 놀랐다.
“그런 게 아니라요!”
“조심.”
바일레온이 주의를 줬다. 마리엔은 본능적으로 떨어질까 봐 움찔했지만 사실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마리엔이 안긴 채로 난동을 피운다고 해도 바일레온은 그녀를 떨어뜨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비어스 경에게 말씀드리면 수색 중인 사람들도 비어스 경을 따라올 테고 그럼……. 귀걸이를 찾고도 황녀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게 돼요.”
마리엔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저 귀걸이는 애당초 블랙우드 공작과의 약혼 축하선물로 하사받은 것이다.
근데 약혼자인 공작이 귀걸이를 감춰서 오늘 같은 소란을 일으켰다?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리기 그만인 이야기다. 그쯤 되면 공작의 진의는 상관없어진다.
행여 짓궂은 장난으로 시작했어도, 황제의 귀에 들어갈 즈음엔 4황녀 커플의 불화와 불충으로 부풀려져 있을 게 뻔했다.
가뜩이나 오만한 공작을 아니꼬워하는 황태자 측이 이때다 싶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마리엔은 여기까지 내다본 것이다. 그녀가 코를 찡그렸다.
“그냥 저 하나 고생하는 편이 낫죠.”
“결론이 마음에 안 들어요.”
바일레온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클로이즈가 말해줬어요. 방독면까지 쓰고 지하창고에 들어갔다면서요. 무거운 짐에 깔렸다고도 들었어요.”
“헉, 거기까지.”
“마리엔.”
바일레온은 걸음을 멈췄다. 품 안에 달랑 들려 있는 마리엔은 혼날 각오를 한 표정으로 바일레온을 쳐다봤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내가 혼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기가 찼다.
‘내가 당신을 왜 혼내요. 아니, 어떻게 혼내.’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다. 제가 이제까지 마리엔을 호되게 나무란 적이 있던가? 몇 번 엄하게 말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가령 바일레온 자신에게 지나치게 사과한다거나 하는 그런 때에만 단호히 말했는데.
“공을 세우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렇지만 당신이 다치는 건 싫어요.”
“으음.”
마리엔은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귀 끝이 약간 붉어진 듯도 보였다. 그러다가 택한 길은 회피였다.
“뜬금없지만 방독면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비어스 경, 여기 극장주한테 지하 2층에 환기시설 좀 만들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오래된 콜타르 같은 것도 치우고요.”
그러기만 해도 저주 얘긴 쑥 들어갈 거라며 딴청을 피웠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알겠어요.”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오래된 건물인데…….”
“돌아가는 길에 우린 병원에 들를 겁니다. 발목 염좌 말고 이상소견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내가 블랙우드 공작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
“두고 봐요.”
◇ ◆ ◇
바일레온은 복도를 서성이다가 시계를 봤다. 새벽 2시 30분. 부하직원의 방에 찾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뭔가 구실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처치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는 손님방으로 향하는 하녀를 불러세웠다.
“내가 할 테니 내려가 쉬어.”
하녀가 쟁반을 넘겨주었다. 바일레온은 하녀가 계단을 내려가길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마리엔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열고 몸을 절반만 들이밀었다. 당연히 하녀가 올 줄 알았던 마리엔은 통짜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디디 보좌관, 나예요. 들어가도 되겠어요?”
“……비, 비어스 경?”
“움직이지 마요. 발목 조심하고.”
마리엔은 몸을 일으킨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굳어버렸다. 바일레온은 일부러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찜질용 주머니 마개를 열고 뜨거운 물을 붓자 등 뒤에서 마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나야 원래 늦게 자잖아요.”
“……그러시면 안 되는데.”
마리엔이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얇은 담요를 숄 대용으로 두르려는 것이다. 바일레온은 최대한 느리게 움직였다.
원래대로 하녀가 왔으면 마리엔이 번거롭게 몸을 가릴 필요가 없었을 터다.
상관이 들어주는 찜질 시중이라니. 바일레온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신경이 쓰여서 직접 눈으로 확인 안 하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바일레온 일행은 오페라 하우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병원에 들렀다. 그때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바일레온은 막 잠자리에 든 의사를 깨워서 진료를 보게 했다.
의사는 마리엔에게 찰과상에 바를 연고와 진통제 소량을 처방했다. 의사도 환자도 ‘이럴 필요까지 없는데’ 하는 표정이었다.
마차에서 기다리던 클로이즈는 돌아온 오빠 손에 들린 봉투를 보더니 “결국 약을 뜯어냈군.” 하고 중얼거렸다.
오직 바일레온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한 얼굴이었다.
마리엔이 물었다.
“집에 오자마자 감기약은 드셨죠?”
“보좌관의 말대로 먹었어요.”
바일레온은 물주머니의 마개를 꼭 닫았다. 이쯤이면 됐겠지 하고 몸을 돌리자 여전히 잠옷만 입고 있는 마리엔이 눈에 들어왔다.
바일레온은 조금 당황했다. 담요를 걸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인가?
“물주머니 주세요.”
마리엔이 손을 내밀었다. 바일레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주머니를 건넸다. 뜨끈한 물주머니는 마리엔의 허리 아래로 들어갔다.
“하, 살겠다…….”
마리엔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의 처방대로 마리엔은 삐끗한 왼쪽 발목을 쿠션에 올린 채 냉찜질 중이었다.
무거운 짐을 계속 들고 내렸다고 하자, 그럼 허리엔 온찜질을 하라는 처방이 추가됐다.
‘그러고 보니 등에 쿠션을 받쳐놨네.’
아까 마리엔이 사부작거린 이유를 깨달았다. 몸을 가리려는 게 아니라 편하게 등을 받치고 앉으려는 거였다.
“시간이 늦은 건 알지만 걱정이 돼서 왔어요.”
“다정하고 걱정 많으신 우리 비어스 경.”
온찜질에 긴장이 스르륵 풀린 듯한 마리엔이 생글거렸다.
“전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내일이면 아마 뛰어다닐 수도 있을걸요.”
“농담이죠? 사흘은 꼼짝 말고 쉬어요.”
“누가 할 소리.”
마리엔이 볼을 부풀렸다.
“사실 아까 진료받을 사람은 비어스 경이었는데요. 저택에 있는 감기약보다 더 센 약 처방받아서 드셨어야 했는데.”
“난 안 아파요.”
“왜게요?”
질문을 던진 마리엔이 대답까지 했다.
“약을 드셔서예요. 공연 볼 땐 기침도 하셨잖아요. 목도 자꾸 잠기고…….”
“지금 막 생각이 났는데요.”
바일레온이 말했다.
“공연 전에 보좌관이 준 레몬차. 왠지 뒷맛이 씁쓸했었죠. 근데 아까 부엌에 갔더니 하녀장이 똑같은 조합을 내주더군요.”
“앗.”
마리엔이 혀끝을 깨무는 시늉을 했다.
“들켰네.”
“이젠 발뺌하는 척도 안 하기예요?”
“제가 왜요.”
토끼 인형 같은 보좌관이 조금 뻔뻔하게 웃었다.
“그래서 혼내실 거예요?”
사람이 너무 귀여우면 속이 울렁거리기도 하는구나.
바일레온은 이마를 문지르는 척하면서 표정을 감췄다. 입가 근육이 갑자기 통제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열나세요?”
마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 먹었는데도요?”
“아, 아뇨. 열은 안 나요.”
“안 나는 거 확실해요? 저한테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
거짓말을 하고 있긴 한데 좀 다른 방향의 거짓말이랄까.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순간 할 말을 잊었다고 실토할 순 없는 노릇이다.
바일레온은 마리엔과 눈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요. 오늘은 새벽까지 일 안 하고 바로 잘게요. 디디 보좌관이 감기약까지 몰래 먹이면서 챙겨줬는데 앓아누우면 안 되니까.”
“잘 생각하셨어요!”
마리엔이 활짝 웃었다. 그러자 토끼 같은 보좌관의 말간 얼굴 주변으로 꽃망울이 톡톡 터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바일레온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마리엔의 말이 맞나 보다. 자기가 진짜 아픈데, 약 기운으로 버티고 있는가 보다.
환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