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32)
“비어스 경.”
“…….”
“비어스 경?”
“……아.”
바일레온은 괜히 헛기침했다.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또 일 생각하시면 안 돼요. 방금 약속하셨어요. 방에 돌아가자마자 주무시기로.”
짐짓 엄한 투로 늘어놓는 말이 듣기가 좋았다. 하녀장도 한 10년 전부터 비슷한 소릴 해왔다. 내용은 똑같은데 어째서 보좌관의 말이 더 부드럽게 귀에 감길까.
“딴생각 말고 아침까지 푹 주무세요. 소중하신 재상님.”
“……디디 보좌관도 잘 자요.”
“네!”
복도로 나온 바일레온은 방문을 닫았다. 소중하신 재상님. 마리엔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정작 당사자는 별 뜻 없이 한 말임을 알고 있다. 문제는 역시 바일레온 자신이다.
“저, 지하에서 이거 찾았어요. 두 시간 넘게 먼지 구덩이에서 굴렀어요. 이번에야말로 비어스 경을 돕고 싶어서.”
울먹이며 절박하게 매달리던 얼굴이 떠올랐다. 다친 쪽은 본인이면서 방금까지도 바일레온의 몸 상태를 걱정하던 마리엔.
‘날 위해 왜 그렇게까지 해요. 내가 뭐라고.’
마리엔은 딴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를 어쩐다.
울렁이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없고, 계속 ‘딴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갔다.
◇ ◆ ◇
이 와중에 바일레온의 주변에서도 작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재상부의 제3보좌관을 찾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그들이 마리엔을 찾는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사람들은 바일레온이 집무실에 없는 이유부터 바일레온이 A안과 B안 중에 무엇을 더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지 등을 마리엔에게 물었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마리엔은 자신의 원래 집무실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비어스 경 일하시는 데에 방해가 되고 있어요.”
“……별로 방해 안 되는데요.”
“계속 사람들이 들락거리는데도요?”
마리엔이 손을 내저었다.
“제가 너무 죄송해요. 게다가 집무실을 같이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절 위협하는 사람 때문이었잖아요. 이제 황녀 전하는 제 목적을 아시고, 블랙우드 공작은…….”
마리엔의 입가가 경련하듯이 떨렸다.
“그자도 제가 자기 머리카락 노리는 걸 알아요. 근데 절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카인 블랙우드 얘기를 할 때면 마리엔은 도통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다.
바일레온은 이 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마리엔은 정확히 어떤 계기로 일면식도 없는 카인을 싫어하게 됐을까. 왜 저렇게 카인 얘기만 나오면 머리보다 감정이 먼저 반응할까.
흔히 아주 싫어하는 감정은 아주 큰 관심과 맞닿아 있다고들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마리엔은 공작을 혐오하는 것만큼이나 그를…….’
바일레온은 대답할 시간을 끌기 위해 찻잔에 손을 뻗었다. 차가 식어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갑자기 주변 공기가 더워진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차를 단 두 모금 만에 비운 그는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보좌관을 보았다.
“그렇게 원래 집무실로 돌아가고 싶어요?”
“흡.”
마리엔이 입가를 틀어막았다. 동그란 눈매가 축 처졌다.
“반칙이에요, 비어스 경. 그런 쓸쓸한 표정이라니……. 제가 꼭 비정한 인간이라도 된 것 같잖아요.”
순간 바일레온의 안에서 작은 희망의 싹이 돋아났다.
“네, 그래도 가야 돼요.”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싹이 말라 죽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래야 절 찾아오는 사람들도 질문하기가 편할 테고요. 전에는 몰랐는데요. 왜 빙의…… 왜 사람들이 일 중독이 되는지 겪어보니까 이해가 좀 가요.”
마리엔이 말했다.
“사람들이 절 필요로 하는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요. 실제로 도움 되니까 보람차기도 하고.”
마리엔이 먼저 공간 분리를 요구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바일레온은 아쉬움을 넘어 서운함까지 느끼는 스스로에게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보좌관의 책상을 옮기라고 지시하죠.”
“감사합니다!”
마리엔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원래대로 돌아가자 바일레온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반면 재상부 사람들은 더 부담 없이 마리엔을 찾게 된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재상 집무실 문을 두드린 뒤,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었다.
“비어스 경, 혹시 디디 보좌관이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재상부에서만이 아니었다. 비어스 백작저로 돌아온 후에도 이런 일은 계속되었다.
“큰오빠, 디디 보좌관님 어디 계신지 알아?”
데이지가 서재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더니 물었다.
“모르는데.”
“세상에, 믿을 수가 없네. 어떻게 한 나라의 재상이 자기 보좌관의 행방조차 몰라.”
데이지는 몹시 귀여운 외모의 소녀다. 아직 사교계 데뷔까지 2, 3년이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그녀의 데뷔를 기대하는 이가 많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 얘기고 혈육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데이지는 코끝의 점까지도 무척 귀여운 소녀지만 아주 날카로운 입담의 소유자기도 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에 푹 빠져 사는 막내는 상대가 친오빠라고 해서 태도를 달리하지 않았다.
참 일관적인 아이랄까.
그런 데이지가 마리엔과 죽이 잘 맞는 게 어찌 생각하면 놀랍지 않았다.
마리엔도 언행을 조금 과감하게 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보좌관은 무슨 연유로?”
“오늘 새로운 보드게임이 나왔거든.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예약 거는 데만도 우리 집 하인 세 명이 번갈아 줄을 서야 했어. 아무튼 그걸 어머니랑 나, 보좌관님이 9시부터 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8시 56분이잖아.”
“게임 하니까 갑자기 떠올랐는데.”
바일레온이 말했다.
“저녁식사 후에 클로이즈가 보좌관에게 눈짓하더구나. 캐릭터 해석…… 배틀? 그런 걸 하자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바일레온은 그것도 막내가 말한 것처럼 게임의 일종인가 하고 생각했다.
데이지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오빠, 일이 많아서 머릿속이 복잡한 건 이해하는데 말이야. 다음부터 그렇게 중요한 정보는 좀 더 빨리 떠올려줬으면 좋겠네.”
그러더니 막내는 작게 중얼거렸다.
“보좌관님도 진짜 약삭빠르다니깐. 추리 게임 전에 머리를 한번 쓰고 오시네. 자칫하다간 보좌관님이 이기겠는걸?”
바일레온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번에 마리엔이 발목을 다쳐 이틀간 병가를 냈을 때가 떠올랐다. 집에 돌아왔더니 집안 꼴이.
‘안 돼. 내가 가렛의 앵무새도 아니고 이런 표현은 좋지 않아.’
바일레온은 잠깐 단어를 골랐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 사전을 뒤져봐도,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는 표현보다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마리엔의 방이 난리였다.
환자를 쉬게 해도 모자랄 판에, 클로이즈가 떠나면 데이지가 들어오고, 데이지가 나가면 백작부인이 찾아오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로마 요법으로 기분전환을 해보자며 비어스 백작이 허브 화분을 안고 들어왔을 때서야 바일레온은 깨달았다.
자신이 무척 사랑하긴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가족들이 마리엔 디디에게 푹 빠졌다.
마리엔이 말 안 해서 그렇지 어쩌면 셋째 가렛도 슬쩍 손님방에 놀러 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참, 큰오빠.”
데이지가 서재를 나가려다 다시 몸을 틀었다.
“디디 보좌관님에게 오빠 행방을 물으면 과장 안 하고 삼 초 만에 답이 나오거든? 직급 낮은 부하라고 소홀히 하지 말고. 큰오빠도 좀, 보좌관님께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네.”
데이지는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더니 서재를 나갔다. 저대로 언니의 방에 있을 놀이 상대를 찾아갈 것이다.
바일레온은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한숨이 나오려 했다.
“너무 관심이 쏠려서 집에서라도 떨어져 있으려 하는데.”
물론 실패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서재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막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마리엔 얘기를 하는 식이다. 상황이 이런데 보좌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 않나.
퇴근 후 일을 하면 마리엔이 걱정을 한다. 가렛의 앵무새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몰라도, 앵무새는 요즘 ‘과로사’라는 말을 익혔다.
그렇게 배워서 뭘 하느냐? 앵무새는 바일레온이 앞을 지나갈라치면 “과로사 조심! 과로사 조심!” 하고 목청껏 외쳤다.
‘그래서 일 대신 책이라도 보려 했던 건데.’
마리엔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지금은 뭘 하는 중인지 모든 게 다 궁금했다.
한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과보호해버리고 마는 성격이 들키면 어쩌나.
비어스 경이 다정한 건 좋은데 그래도 이건 좀 지나치시네요. 전 다 큰 성인이에요. 적당히 하세요. 좀, 질려요.
말간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 생각만 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오빠!”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클로이즈가 서재 문을 벌컥 열었다.
“오빠가 데이지한테 알려줬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 보좌관님을 얼마나 매섭게 끌고 간 줄 알아? 캬악!”
클로이즈가 발을 굴렀다.
“제일…… 제일 흥미로운 지점이었는데 하필 그때!”
바일레온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여동생을 보며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비어스 가 사람들은 뭐 하나에 꽂히면 그에 대한 집착이 꽤 심해진다.
“복수야. 내일 토요일이지? 시내 아이스크림 가게에 보좌관님을 데려갈 거야. 듣자 하니 4황녀 전하 약혼식 때 마주친 프란체티오 영식이 거기 단골이라더라.”
클로이즈는 그때 춤추느라 정신없는 줄만 알았다. 언제 또 마리엔에게 댄스 신청한 영식을 기억해뒀단 말인가. 바일레온은 슬며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또 뭐라더라. 아, 그렇지. 아나이스 사제가 건너편 서점에 종종 들른대. 그래서 토요일마다 서점 매출이 오른다던데.”
“레슬리 아나이스는 위험인물이야.”
저도 모르게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클로이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 그냥 그렇다고.”
“사제의 시야에 마리엔을 노출시키지 마.”
클로이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일레온은 덜컥 불안해졌다. 자신이 아나이스 사제를 위험인물로 지목하는 이유는 클로이즈가 짐작하는 바와 달랐다.
클로이즈는 아마 오빠가 사제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경계하는 거라고 여길 터다. 물론 그것도 문제긴 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치와 여자를 좋아한다는 베일 아래서 사제가 은밀히 처리하는 일들이었다.
그가 주군으로 섬기는 2황자는 일견 유능해 보여도 교활한 천성을 감출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2황자의 사주를 받은 사제가 사람 몇 명을 흔적도 없이 없앴다는 이야기가 이미 몇 년 전에 바일레온 귀에 들어왔다.
마리엔은 아나이스 사제와 벌써 한 번 마주쳤다. 바일레온이 듣기로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내일 오빠도 동행하든가, 뭐.”
클로이즈는 몇 분 전의 막내를 연상시키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자못 분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까 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