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36)
“비어스 경, 말씀하신 자료 가져왔습니다.”
남자가 두툼한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바일레온은 서류를 펼쳤다.
그가 가져오게 한 것은 재상부 직원들의 신상명세기록이었다. 바일레온의 기다란 손가락이 제3보좌관의 이름을 느릿하게 쓸었다.
마리엔 디디.
제국력 244년 11월 11일 출생.
‘생일은 아직 멀었군.’
형제자매 없음. 부모 사망으로 12세 때부터 이모 부부가 보호자로 등록. 이모 부부는 수도의 케스타냐 구(區)에서 잡화점 운영.
‘아…….’
바일레온은 한동안 두 번째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리엔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하고 짐작만 했다.
한데 어렸을 적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인 줄은 몰랐다.
‘말은 바로 해야지. 모른 게 아니라 기억해두지 않았던 거야.’
재상부 소속 예정인 자는 반드시 신상기록을 제출하게 되어 있다. 앞으로 그가 맡을 일이 청소 담당일지라도 예외는 없다.
그럼 제출한 기록을 토대로 재상부 내부에서 1차, 바일레온의 조사관들이 2차로 사실을 확인한다.
최종적으로 통과한 내용만이 바일레온의 책상에 올라온다. 그러므로 자신은 마리엔의 가족 관계를 읽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몇 달 전에 말이다.
그리고 바일레온의 기억력은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 몇 달 전은 고사하고 몇 년 전의 일이라도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여기엔 조건이 있다. 자신이 신경 써서 기억해둘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녀야 한다.
바일레온은 이 점에서 자책감을 느꼈다. 당시에는 마리엔에 관한 정보라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은 날이 올 줄 몰랐다.
‘케스타냐 구라면 내가 지나다니던 동선과도 겹치는데.’
그곳은 오밀조밀한 골동품, 인형, 향초, 사탕 가게와 헌책방이 몰려 있는 구시가지의 상점가다.
운이 좋으면 염가에 앤티크 오르골이나 근사한 펜던트를 건질 수 있다.
쇼윈도 너머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꼭 물건을 사지 않아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늘 있는 곳이다.
바일레온의 시선이 다음 줄로 이동했다.
마리엔의 최종 학력은 제국 아카데미 문학부. 백서른여덟 명의 졸업생 중에서 110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얼핏 들으면 재상부에서 보좌직을 맡기엔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국 아카데미는 입학부터가 어려운 곳이다. 귀족 자녀 중에서도 못 들어가는 이가 태반이다. 거기서 낙제 안 하고 제때 졸업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기타 수상 이력이나 근무경력이 없는 마리엔이 재상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제국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는 학벌 덕분일 터다.
바일레온은 아랫줄의 공무원 특채 시험 점수를 살짝 봤다.
100점 만점에 61점.
참고로 60점 이하는 탈락이다. 재상부 직원들의 평균 점수는 90점대 중반이고.
‘역시 학벌이…….’
다 했다.
마리엔을 추천한 필 보좌관도 그녀가 제국 아카데미 출신임을 중점적으로 내세웠다.
“잠깐. 입학 시기를 보면 나와 1년을 같이 다녔어.”
바일레온은 입학식 장면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자신은 아카데미 재학 내내 학년 대표였고, 마지막 학년엔 학생회장이었으니 어린 입학생들 앞에서 환영사를 했을 것이다.
단상 아래 줄 서 있는 입학생 중에 봄꽃 같은 분홍 머리가 있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교내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 법도 한데. 워낙 특이한 머리 색이니, 만약 마주쳤다면 반드시 기억에 남았을 터다.
아니면 동기에게 물어볼까? 발 넓기로 유명한 트렌트라면 분홍 머리 신입생을 기억할지도.
‘안 돼.’
바일레온은 즉시 그 생각을 접었다. 트렌트는 발이 넓기로도 유명했지만 끊이지 않는 연애로도 유명했다.
호감형 외모의 트렌트가 사족을 못 쓰는 타입이 바로 아담하고 발랄한 여학생이었다.
졸업 후 시간이 좀 지나긴 했다. 하지만 사람 취향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하던가.
괜히 트렌트를 찾아갔다가 그가 현재의 마리엔을 포착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절대 안 돼.’
마리엔은 지금도 저렇게 귀여운데, 열네 살 땐 굉장했을 거다.
어쩌면 트렌트가 그때 벌써 눈독을 들였을 수도 있다. 당시엔 마리엔이 어려서 접근을 못 하다가 기회를 놓쳤을 수도 있다.
한데 우연히 찾아온 옛 친구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면?
‘내가 잠깐 미쳤지.’
바일레온은 하늘이 무너져도 트렌트만은 찾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었다.
인연이란 게 참 기묘하다. 8년 전이라면 제가 오데트가 연금된 저택을 드나들던 시기다.
아카데미에서도 비어스 백작저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사는 오데트는 매주 만났건만, 학교를 1년간 같이 다닌 마리엔은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못했다.
‘혹시 디디 보좌관은 그때의 나를…… 기억하려나.’
너무 이기적인 기대를 품은 걸까.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마리엔 입에서 ‘단상 위의 그 선배’ 이야기가 나온다면 제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되리란 것도 안다.
‘언젠가 넌지시 물어봐야지.’
일단 오늘은 아니다.
아까 슬쩍 보니 마리엔은 월요일 오전부터 바빠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상관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바일레온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입을 다물었으니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이렇게 당장 오늘 건네지 못하는 질문만 늘어간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사실 남들과 크게 다르진 않잖아요. 그렇게 특별하진 않은데. 여기 황궁에만도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당신에게도 첫사랑이 있어요? 있다면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어떤 사람이었어요?
마리엔은 학교 다닐 때 고백을 받은 적 있어요? 왠지 많을 것 같아서 답을 듣기도 전에 속이 조금 쓰려요.
“도대체 궁금한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바일레온은 눈가를 문질렀다. 본인 관심사만 나오면 살짝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자신도 비어스 가문 사람이 맞긴 한가 보다.
불현듯 지난 토요일이 떠올랐다. 마리엔은 아나이스 사제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몸매가 드러나는 아나이스의 사제복을 빤히 쳐다봤었다.
엉덩이.
바일레온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봤다.
“내가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길긴 해.”
그러다가 바일레온은 자신이 이번 주 내내 열혈 토끼 같은 보좌관 생각만 했음을 깨달았다.
◇ ◆ ◇
제국의 태양.
존재만으로도 빛 그 자체.
바일레온의 생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마리엔은 내일 있을 깜짝 이벤트의 총책임자다. 생일 케이크의 장식, 문구, 당도, 접시, 재상부 사람들의 동선까지 마리엔이 관여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제1보좌관 필은 본인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며 ‘우리 마리’를 거듭 칭찬했다.
그러나 정작 마리엔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퇴근을 앞둔 현재까지도 해결 못 한 고민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서 뭘 더 도울 수 있지?”
원작대로라면 바일레온은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가장 슬픈 생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재상부 사람들이 준비한 깜짝 파티로 고양되었던 기분은 비 내리는 연못가에 이르러 바닥을 친다.
버려진 오데트의 로켓 목걸이.
그는 진흙 묻은 채 내팽개쳐진 목걸이가 꼭 자신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을 차마 진흙 바닥에 버려둘 수 없어서 고이 챙기지만, 재상부로 돌아가는 바일레온의 귀에 시녀들의 잡담이 들린다.
4황녀 전하와 블랙우드 공작은 정말 사랑에 빠진 모양이라고.
정략인 줄 알았는데 진짜 열애였나 보다고.
키스가 급한 나머지 아무 방에나 들어가신 것 좀 보라고.
오데트는 내일 자정이 될 때까지 바일레온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실은 망할 놈의 카인 때문에 전달을 못 하는 거지만, 바일레온이 이것까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모레부터 오데트는 작은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무려 50캐럿 블루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목걸이를 착용한다.
블랙우드 공작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다.
바일레온은 주군의 흰 목덜미에 남아 있는 키스의 흔적을 애써 못 본 척하며 아름다운 목걸이를 칭찬한다.
기왕 벌어진 일.
그의 상심을 굳이 달래지 않는 길을 택한 오데트.
정복 안주머니 속 로켓 목걸이와 맞닿아 있는 심장이 아려오는 바일레온.
“이렇게까지 전형적일 필요가 있나 싶은 서브남의 슬픈 서사야.”
마리엔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체 어디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냔 말이야.”
늦은 오후부터 내리는 소나기를 막을 수 있나? 불가능하다. 날씨는 하찮은 빙의자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그럼 바일레온이 문제의 연못가로 못 가게 막으면 어떨까?
연못가에 못 가면 버려진 로켓 목걸이를 마주할 일도 없다. 아니면 아예 시녀들의 잡담까지 못 듣도록 재상부에 발을 묶어둘까?
마리엔은 순간 금기와도 같은 악마적인 발상을 떠올렸다.
“비어스 경 몫의 케이크에 설사약을 타면…….”
안 되겠지.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정신 나간 마리엔 디디야. 저번에 레몬차에 감기약 섞는 게 통하니까 이번에도 비슷하게 가자 싶나 본데.
“나 자신의 무능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지 말자.”
게다가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면 더더욱 흉측한 일이었다. 어느 누가 생일날 배탈이 나서 직장 화장실에 갇히고 싶을까.
그건 실연만큼이나 비참한 일 같았다.
마리엔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설사약처럼 극단적인 수단 말고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결국엔 내가 오데트를 대면해서 부탁하는 수밖에 없나? 내일 하루만 로켓 목걸이를 우리 쪽에서 보관하면 되잖아. 비어스 경의 이름을 팔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러나 여기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마리엔은 오데트의 말발을 이길 자신이 없다. 북부 놈이나 사이비 사제한테는 막무가내 전법이 통할지 몰라도 오데트는 아니다.
그분은 무척이나 뒤끝이 길기로 유명하고, 한번 뼈에 새긴 원한은 결단코 잊지 않으며, 은혜는 열 배로 그리고 원한은 백배로 갚는 이 세계관의 최강자셨다.
“내 모가지…….”
마리엔은 50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고사하고 흔한 은 목걸이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제 목을 더듬었다.
보석은 필요 없다. 이 목이 몸뚱이에 제대로 붙어 있기만 한다면.
“이것저것 제했더니 왜 또 결론이 북부 놈과의 일대일 매치로 빠지는 거지.”
놈을 민머리로 만드는 디데이가 아니라면 이제 카인 블랙우드와의 근접전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놈과 엮이면 높은 확률로 몸이 고생하게 된다. 정말이지 넌덜머리 나는 놈이다.
내일 그놈의 앞을 막아서면 또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힐까.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딱 아팠다.
아, 그렇지. 오데트가 어느 선까지 봐줄지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이것도 탈락.
저것도 탈락.
“디디 보좌관, 무슨 생각 해요?”
갑자기 바일레온의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마리엔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앗, 아, 죄송합니다. 비어스 경, 어쩐 일이세요?”
“퇴근해야죠.”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 그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