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4)
마리엔은 머리를 굴렸다.
이런 말이 있다. 만월과 태양이 있는 한 제국은 더더욱 번성할 것이라고. 여기서 만월은 북부의 지배자 카인 블랙우드를 가리켰다. 그가 드넓은 북쪽 땅을 지키고 있는 한, 외적은 감히 제국 영토에 침범할 생각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태양 자리는 당연히 명석한 재상 바일레온 비어스의 몫이었다. 카인이 제국의 힘이라면, 바일레온은 제국의 머리였다.
바일레온은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비상하기로 유명했다. 남들은 별 의심 않고 넘어가는 사안도 바일레온의 손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세세하게 파헤쳐졌다. 그런 남자가 잠자코 자기 말에 따라줄 거란 기대는 안 했다.
아무리 이 한 몸 불살라 당신과 오데트를 이어주겠다고 호소한들 말이다. 바일레온은 일단 제3보좌관의 진의를 의심할 터였다.
하긴 누군들 안 그럴까. 재상부에 들어온 지 고작 3개월 차 신입이 갑자기 높은 분들의 예정 동선을 줄줄 읊는다. 게다가 신입 입에서 나오는 정보는 하나같이 마리엔 디디의 위치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수상쩍을 만하다.
‘캐묻는 게 당연하겠지.’
마리엔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빙의 전의 자신은 되게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대인 관계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빈말로라도 사교적이라 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스물둘 한창때의 아가씨건만 소지품도 얼마 없었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로 압축할 수 있는 삶이랄까.
물욕 없고 조용한 한편 회의시간에 꼼꼼히 기록하는 사람.
처음엔 솜사탕 같은 머리카락 때문에 시선을 끌어도, 이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인물.
친구의 이웃집 아저씨의 누이의 남편인 필 보좌관 연줄로 재상부에 들어온 무사안일주의 공무원.
타인의 눈에 마리엔 디디는 이렇게 비쳤을 것이다. 그런데 관점을 바꾸면 얼마든지 달리 보기가 가능했다.
짐이 적다?
‘꼬리가 밟힌 즉시 언제든 튈 수 있는 기동성의 다른 말이지.’
조용하다?
‘입을 다물면 실수할 확률도 적어지니까.’
회의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정보 유출! 정보 유출!’
마리엔이 입을 오래 다물고 있자 바일레온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전하께서 머무시던 저택의 청소 일은 어떻게 알았죠?”
“그거야 수요일마다 사람들이 들어가서 청소를 하니까요. 그냥 보이잖아요.”
“공문서엔 화요일이라고 적혀 있어요.”
“어, 그래요?”
마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내가 뭘 놓쳤지? 아닌데, 분명 수요일이 맞는데. 수요일 빼고 다 가능하다는 문장을 본 기억이 나는데.’
바일레온을 지원할 계획에 몰두한 나머지 잠깐 혼동한 걸까. 하지만 자신은 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발췌독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거기엔 저택 청소일이 수요일이라고 나온다.
바일레온이 미동도 않고 대꾸했다. 마리엔을 향한 시선엔 기묘한 빛이 담겨 있었다.
“원래는 화요일인데 청소 담당자의 사정으로 수요일로 옮기게 됐어요. 여태 혼자 해왔지만 이제부턴 보조 세 명이 함께 하고요.”
그럼 내가 맞혔잖아. 마리엔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상관을 마주 보았다.
“그렇게 하기 시작한 게 바로 어제부터입니다.”
“흠.”
“이건 아직 전하와 나만 아는 사실이에요.”
“흐음.”
“디디 보좌관은 어제 종일 황궁 안에만 있었죠. 마차로 한 시간 거리의 저택에 ‘사람들’이 청소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란 불가능합니다.”
마리엔은 새삼 인간의 기억력이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르고 닳도록 읽은 것 같아도, 그래서 대사와 사건을 줄줄 욀 수 있을 것 같아도 그다음이 문제였던 거다. 사람 머릿속에 들어간 정보는 자체 편집 과정을 거친다.
저택 청소 일이 수요일인 건 외웠다. 하나 언제부터 수요일에 시행했는지는 까먹었다. 본문에 아예 안 나왔었나? 가물가물했다. 어쨌든 하필 그게 어제부터였을 게 뭐람. 운도 나쁘지.
“황궁 밖에 조력자가 있습니까?”
“없어요.”
“황궁 내부에는? 필 보좌관도 연관되어 있나요?”
“필 보좌관님은 결백해요. 비어스 경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인걸요. 흠, 저 질문 하나 할게요. 혹시 지금 절 밀정으로 의심하시는 건가요?”
마리엔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귀여운 척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리 보이게 됐다.
복도 거울을 통해 마주한 자신은 꽤 귀여운 외모였다. 아담한 키에 오뚝한 코, 전체적으로 보들보들하고 순한 인상. 애원하듯이 ‘힝’ 하는 표정을 지으면 귀가 축 처진 롭이어 토끼가 연상되는 것도 같았다.
마리엔 디디. 너의 외모는 꽤 유용하겠어.
아무도 이 말랑한 껍데기 안에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광인이 숨어 있는 줄 모를 것이다.
“그럴 수밖에요. 전하의 친우이자 이 나라의 재상인 나조차 모르는 이야기를 했잖습니까. 하지만 밀정이라기엔 너무 쉽게 털어놓는 것도 같고……. 일단 지켜봐야겠어요.”
“그럼 제가 비어스 경에게 새삼 감동했다는 말을 해도 되나요?”
마리엔은 이번엔 가슴 앞에서 두 손을 맞잡은 자세로 눈을 반짝였다. 바일레온은 제게로 오롯이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눈길을 슬쩍 피했다. 그러다가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마리엔을 쳐다봤다.
“방금 그냥 말을 한 것 같은데요.”
“절 밀정으로 의심하면서도 제 몸 상태부터 물어보셨잖아요. 그게 첫 번째 질문이었다고요.”
“네.”
“경에겐 그게 가장 중요하셨던 거죠?”
“네.”
“따흐흑!”
듣기엔 우스꽝스러운 소리지만 마리엔은 진심이었다.
“이게! 차이점이라고요. 북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잡지 못할 따스한 마음! 북부 놈은 말이죠. 다짜고짜 손목을 낚아채서는 벽에 확 밀친 다음에야 첫 대사를 칠 수 있거든요. 왜 그러냐고요? 제가 어떻게 아나요. 그놈은 태어날 때부터 그 모양이었을걸요.”
마리엔의 입술이 감동으로 샐룩거렸다.
“다정하신 분.”
“가만히 들어보니 블랙우드 공작에게 원한이 깊은 것 같은데.”
바일레온이 말을 이었다.
“디디 보좌관을 사주한 자가 그러던가요? 공작에게 복수할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그 과정에서 나와 4황녀 전하를 징검다리로 이용하라고 하던가요?”
“제 머리카락을 걸고 맹세컨대 전 밀정이 아니에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거죠…….”
바일레온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의 직관은 마리엔의 결백을 가리킬 것이다. 마리엔 디디는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숱한 밀정을 가려내온 정치가로서 성급한 단정은 금물일 터다. 악인만이 밀정 짓을 하는 건 아니니까.
마리엔은 젊은 재상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조차 가슴 미어지도록 잘생겼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이대로 한 시간은 너끈히 기다릴 수 있었다.
해이해진 마리엔의 정신을 다잡아준 건 바일레온이었다. 그가 머뭇거림 끝에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하에 대한 내 마음을 알았습니까?”
마리엔은 순간 눈앞의 남자가 측은해졌다.
언젠가부터 황궁엔 이런 불문율이 생겼다. 9월 넷째 주부터는 대부분의 행사를 볕 잘 드는 황궁 남쪽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계절과 상관없이 보통 서쪽 건물을 이용했었다. 그렇게 해온 지 최소 50년은 됐다.
제국이 돌아가는 원리도 소설 밖 세상과 비슷했다. 처음에 누가 그렇게 하자고 정했는지는 몰라도, 일단 오래 지켜온 규칙은 웬만해선 바꾸지 않았다.
황궁 서쪽 건물이 갑자기 불에 타버리지 않는 한 황실 행사는 거기서 열려야 했다. 이유는 없다. 그냥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으니까. 굳이 이유를 묻는 인간은 이상한 눈길을 받았다.
그러니까 5년 전이다.
바일레온이 유려한 언변으로 새 규칙을 만든 것은.
그가 크고 작은 반발을 딛고 그런 규칙을 만든 이유는 오데트 때문이었다. 오데트가 유독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이다.
오데트는 몸이 약하지만 자존심만은 하늘을 찔렀다. 황녀의 체면상 행사장에서 뜨거운 물주머니를 품고 있을 순 없기에, 그녀는 추위를 내색 않고 버티다가 방에 돌아가고서야 밤새 앓곤 했다.
소꿉친구 시절부터 가장 귀하고 고운 것만 그녀에게 줘온 바일레온이다. 비 내리는 날이면 오데트에게 우산을 기울여서 한쪽 어깨가 흠뻑 젖는 걸 당연시하는 그였다. 그런 바일레온이 오데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방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저…… 바다 건너 아인펠 국(國) 사람들도 비어스 경의 마음을 알걸요.”
마리엔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됐지만 바일레온도 이제 현실을 알아야 한다.
“설마요.”
바일레온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건가요?”
“네, 뭐……. 비슷.”
“철저히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우리 재상님은 숨긴다는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철저히, 까지 가지도 못했네요. 애초에 마음을 숨기는 데서부터 실패하셨다니깐?
‘하아, 이럴 때가 아니지.’
마리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쿵 찧는 소리에 바일레온이 놀랐다.
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마리엔 자신이었다. 힘 조절을 전혀 안 하고 꿇은 탓에 무릎뼈가 얼얼했다. 과장 쪼끔 보태서 뼈에 금이 간 것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물기 그렁그렁한 눈을 연출할 수 있었다. 마리엔은 절박한 얼굴로 호소했다.
“제발 검은색으로 염색……. 네?”
“디디 보좌관, 일단 일어나서 얘기하죠.”
“검은색으로! 염색 좀 부탁드립니다! 흑흑…….”
바일레온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밀정 여부를 떠나서 마리엔이라는 사람 자체가 이해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마리엔은 10년 넘게 한 사람 곁을 지켜온 순정남에게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왜냐면 4황녀 전하의 취향이 흑발이거든요. 이건 제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귀로 들은 건 아니고 눈으로 읽은 거지만, 마리엔은 이거나 그거나 비슷하다고 냉큼 합리화했다. 그러면서 여자들만 있을 때 나온 말이라고 덧붙였다. 약간 수줍은 사담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비어스 경이 전하께 똑같은 질문을 해도 정답을 듣긴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세상에 이 남자가 어떻게 했게?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염색약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