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41)
전날 오후부터 차곡차곡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마리엔은 바일레온 앞에서 분하고 서러운 마음을 쏟아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제 4황녀궁 시종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전갈을 갖고 왔거든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여기로 나오래서…… 비어스 경 대신 제가 와봤어요.”
바일레온이 뭐라고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일단 마리엔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한 모양이다.
“근데 카인 블랙우드 그 공작 놈이 나타났어요. 그 망할 흑발 새끼가 전하의 로켓 목걸이를 부수려고 하잖아요. 하지 말라고 했더니, 흐흑…….”
마리엔은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제가 뭐든 할 테니까…… 목걸이만 망가뜨리지 말라고 했는데.”
구름다리 위에서 자신을 하찮은 미물처럼 내려다보던 카인 놈의 눈빛이 떠올랐다.
미친 토끼.
카인은 마리엔을 그렇게 불렀다. 자길 겁내지도 않고 비이성적인 짓만 일삼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미친 토끼가 미친 본성을 꾹꾹 참고 무릎까지 꿇었건만.
나쁜 새끼.
“비어스 경, 저는요……. 놈이 하란 대로 다 했어요. 무릎 꿇으래서 꿇었고, 질문에 대답하래서 대답했고……. 흑, 흐윽, 공작성에서 평생 하녀로 살라고 해서…….”
듣고 있던 바일레온의 눈빛이 변했다.
“일단 목걸이부터 구하자는 생각에 알겠다고 했어요. 딱 하나, 마지막 질문에만 조금 망설였을 뿐인데……. 그렇다고 대답 안 하려는 건 아니었거든요! 진짜 몇 초…… 그걸 못 참고는.”
“연못에 던지던가요?”
마리엔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때만 해도 목걸이를 금방 찾을 줄 알았다. 언제든 박살 낼 수 있는 카인의 손을 떠나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죄송해요……. 자정까지 온 연못을 뒤졌는데 안 나왔어요. 왜지? 왜……. 분명히 왼쪽 연못 중앙에 빠지는 거 봤거든요.”
“잠깐만.”
바일레온이 심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자정까지 물속에 있었다고요? 마리엔, 어제 오후부터 비가 내렸잖아요.”
“네.”
마리엔은 코를 훌쩍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외쳤다.
“혹시 비 때문일까요? 목걸이가 폭우에 자꾸자꾸 옆으로 떠밀려가서…….”
바일레온은 호응해주지 않았다. 그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마리엔 안에서 잠시나마 부풀었던 기대가 푸시시 꺼졌다.
“하긴 그런 건 아니겠죠.”
장대비가 무슨 작살도 아닌데 연못 바닥까지 닿을 리 없다. 마리엔은 다시 침울해졌다.
“혼자 해내고 싶었어요…….”
“마리엔.”
“제가 저번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성공에 도취됐나 봐요. 드디어 비어스 경에게 도움이 된 게 너무 기뻐서, 그래서 이번에도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마리엔은 눈물로 뿌연 시야 너머로 바일레온을 쳐다봤다.
“너무 분해요.”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짜증 나.”
이게 엑스트라의 한계다. 머리도, 힘도, 돈도, 행운도 부족하다.
이 세계는 주인공 오데트를 위해 창조된 세상. 모든 운이 주인공에게 몰려 있으니, 하찮은 엑스트라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기 마련이다.
불만은 없다. 원래 그게 로판의 법칙이니까.
그리고 신성한 로판의 법칙에 따라, 엑스트라 마리엔은 줄곧 실패를 거듭했다.
성공은 저번에 딱 한 번, 오페라 하우스에서다. 우습게도 단 한 번의 성공에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졌다.
이렇게까지 서럽고 분할 일인가?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 좀 우울해하다가도 금세 털어냈던 것 같은데.
“혼자 난리 쳐봤자 변하는 건 없다고. 누가 제 머리 위에서 소리치는 기분이에요…….”
이러다가 시간이 다 지나버리면 어쩌지.
가까이서 본 카인은 생각보다 훨씬 난폭한 놈인데, 오데트가 원작처럼 푹 빠져버리면 어떡하지.
동맹 결혼은 ‘진짜’가 되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진다.
그럼 바일레온은 어떡하지.
사랑하는 그녀를 이대로 보필하기만 해도 좋다고. 어떻게든 견디고 있던 사람을 제가 괜히 들쑤셨다.
자신이 바일레온을 도우려고 했던 일들이 갑자기 죄다 몹쓸 짓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외롭고,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을 들쑤시기만 한 것 같아서.
바일레온은 젖은 눈가를 또다시 세게 문질러 닦으려는 마리엔을 말렸다. 그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자꾸 그러면 눈가가 빨갛게 부을 거예요.”
그는 부드러운 감촉의 손수건을 여린 살갗에 대고 살며시 눌러 눈물이 손수건에 스며들게 했다.
너무나 수고로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눈가가 쓰라리진 않을 터다. 마리엔은 그가 젖은 눈가뿐만 아니라 제 마음도 어루만져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용감하고 씩씩하고 날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마리엔.”
바일레온이 손수건을 반대쪽 눈가에 가만히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전에 말한 적 있던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주는 기분이란 어떤 건지, 늘 궁금했어요.”
그는 쓸쓸히 들릴 수도 있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공작성에서 평생 하녀로 사는 건 안 돼요, 마리엔.”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애정을 퍼부을 수 있는지. 바일레온 비어스란 인간은 대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걸 내 옆에서 겪어봐야죠.”
마리엔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게 제 머릿속에서 꾸며낸 말인지, 아니면 실제로 바일레온이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 갔다.
솔직히 말하면 판단을 미루고 싶었다.
전자라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았다. 하다 하다 바일레온에게 고백받는 망상을 하다니. 이러면 카인 놈이 옳다고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후자까지는 깊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진짜라고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엔의 혼란이 얼굴에 다 드러났을까. 바일레온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좋아하고 있어요.”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마리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당신을 좋아해요, 마리엔 디디.”
이름까지 콕 집어 말하는 고백. 세상에, 세상에. 방금 심장이 펑 터진 것 같아.
“직속 상관이 이렇게 고백하면 당신이 난처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당신은 날 좋아하고 응원하지만, 그게 꼭 나와 사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니까.”
바일레온이 수건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좀 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 했어요.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면 좀 웃긴데 인내심이라면 자신 있었거든요.”
그의 입가에 쓴웃음 비슷한 게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한데 그 인내심, 어젯밤에 다 증발했어요. 마리엔 당신을 찾으려고 수도 길바닥을 누비는 동안 머릿속에선 자꾸 무서운 생각만 떠오르더군요. 하지 못한 말에 대한 후회와 무사히 만나게 되면 해주고 싶은 것들이 뒤섞여서…….”
바일레온이 문득 말을 멈췄다. 그는 동요하는 감정을 제어하려는 듯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잘게 떨리는 그의 입술에 마리엔의 시선이 닿았다.
‘이 사람, 긴장하고 있구나.’
자세히 보니 떨고 있는 건 입술만이 아니었다. 굳게 주먹 쥔 손도 떨고 있었다.
바일레온은 밤새 자신을 찾아 헤맸다고 말했다.
“비어스 경, 설마 한숨도 못 주무신 거예요?”
그는 또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룻밤 정도는 괜찮아요.”
“세상에.”
“마리엔도 밤새 연못을 뒤졌다면서요. 폭우까지 맞으면서요.”
“저는, 전 조금 잤어요. 너무 깜깜하고…… 힘들어서…….”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바일레온이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잤어요?”
“보좌관 숙소에서요. 원래 제 방.”
“하…….”
대답을 듣자마자 바일레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거기 있을 거라곤 짐작조차 못 했어요. 어제 내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긴 했나 봐요.”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성적인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후였다.
“내 고백을 거절해도 돼요. 물론 당신이 받아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정말 거절해도 괜찮아요. 이후 마리엔이 일할 때도 불편하지 않도록 할 거예요.”
“어떻게요?”
“계속 내 보좌관으로 일한다면 고백 전과 다를 바 없이 대할게요. 만일 직무 변경을 원하면 그렇게 하고요. 아예 부서를 옮기고 싶다면 최대한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아, 그런데 정말 거절할 건가요?”
차근차근히 말하던 그가 조금 매달리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나 잘해줄 자신 있는데.”
와, 그 표정은 정말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반칙이었다.
내 고백을 거절한 후에도 당신의 일상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며, 그걸 위해 본인이 어떻게 할 것인지 줄줄이 말하다가 사람 마음을 예고 없이 무너뜨리고 만다.
살짝 내비치는 그 약한 모습에 상대의 숨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저는…….”
마리엔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비어스 경을 기쁘게 해드릴 자신이 없어요.”
무슨 대답이 나올까.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듣고 있던 바일레온의 표정이 자기도 모르게 굳었다.
“어, 이게 거, 거절은 아닌데요!”
마리엔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러니까 전 비어스 경이 좋긴 한데 제가 비어스 경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인지…… 확신이 안 들어서요.”
난 오데트만큼 굉장하지 않다를 제 입으로 말하기란 역시 좀 비참했다. 그래서 마리엔은 에두르는 방식을 썼다.
“이거 어떡하죠. 나 방금 호언장담한 사람치고 표정 관리가 도통 안 되는데.”
바일레온이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일단 거절은 아니다. 그렇죠?”
“네…….”
“마리엔도 내가 좋은 거예요. 맞죠?”
“네.”
“하, 정말 어쩌지.”
바일레온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마리엔을 쳐다봤다.
“그럼 연인이 되는 결말밖에 안 남거든요.”
“네……. 아, 네?”
습관적으로 ‘네네’ 대답하던 마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에 바일레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자신을 귀여워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건 진짜 엄청나게,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대답을 받아내서 사귈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난 이래 봬도 확실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생각할 시간을 줄게요.”
“네에…….”
바일레온이 흐트러진 분홍색 잔머리를 마리엔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당신은 이미 날 기쁘게 만들고 있어요. 덕분에 웃는 날이 늘어난걸요. 그러니 그 점에 있어선 안심해도 좋아요.”
바일레온은 상대를 위로하는 법을 정확하게 안다. 마리엔은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에게만 허락되는 일이 드디어 마리엔에게도 일어났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이다!
몸이 엉뚱한 방향으로 쓰러지지 않고, 바일레온의 품에 스르르 안착한 것까지 완벽했다.
비련 점수 10점 만점에 10점.
타이밍 점수 10점 만점에 1000점.
‘와! 나 태어나서 실신 처음 해봐! 세상에, 너무너무 신기해!’
이제껏 흔한 코피 한번 흘려본 적 없는 마리엔은 정말이지 감격스러웠다.
악역 영애, 흑막 조연이 관심 끌려고 하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기절이었다. 마리엔은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리엔, 내 목소리 들려요? 열이 왜 이렇게…… 너무…….”
반면 바일레온은 심각했다.
“마리엔…… 리…… 엔…….”
제 이름을 부르는 바일레온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그가 초조한 마음에 욕 비슷한 소릴 내뱉은 것 같았는데,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다.
바일레온의 단정한 얼굴로 하는 욕이라니. 정말 희소성 높은 장면일 텐데 놓치고 말았다. 그것만큼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마리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