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43)
바일레온이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져주는 듯한 웃음에 마리엔은 일순 희망을 품었지만, 돌아온 것은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안 돼요.”
“저 소화기관은 이상 없어요. 돌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돌도 안 되고 셔벗도 안 돼요. 방금 첫 식사를 했다면서요. 셔벗처럼 차가운 건 일러도 모레나…….”
“흑.”
마리엔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내리고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레라니 가혹하기도 하지. 클로이즈는 내일 주겠다고 했는데 오빠가 동생보다 더하다.
비어스 경, 절 좋아한다고 고백하셨잖아요. 여전히 이유는 납득이 안 가지만 그건 제 사정이고요.
절 좋아하신다면 얼음과자 달라고 조르는 제 얼굴에 마음이 흐물흐물 녹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마리엔은 커다란 하늘색 눈을 깜빡였다.
요렇게, 깜빡깜빡, 귀여운데, 깜빡.
“그럼 내일 저녁에요.”
아싸, 통했고.
“아침.”
마리엔은 바로 재협상을 시도했다.
“내일 저녁.”
그러나 바일레온은 확고했다. 눈망울을 조금만 더 촉촉하게 만들어볼까. 마리엔은 바일레온을 간절하게 쳐다봤다.
“비어스 경, 점심 먹은 후에는요……? 먹으라는 약 꼬박꼬박 먹을게요. 빨리 나을게요. 그러니까 청포도 셔벗…….”
“……알았어요.”
바일레온이 엷은 한숨을 쉬었다.
“대신 이거 하나 미리 말해두죠. 황실의가 주고 간 약이 정말 써요. 그래도 남기지 말고 다 먹기예요.”
“으.”
마리엔은 얼굴을 찌푸렸다.
황실의쯤 되면 딸기 맛 감기약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가 돼도 감기에 걸리면 딸기 맛 시럽 대신 고약한 액체를 삼켜야 한다니.
그때 옆에서 클로이즈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참고 먹을 만해요.
오빠는 쓰다고 하고, 동생은 참고 먹을 만하단다. 둘 중 누가 거짓말쟁이인지는 조만간 직접 판단하겠다.
마리엔은 침대로 다가오는 바일레온을 쳐다봤다.
오늘따라 그가 뭔가 좀 달라 보였다. 조끼 아래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어서일까.
그러고 보니 조끼도 검은색이다. 은색 자수 장식이 있긴 하지만, 어두운 계열의 옷이란 점만은 여전했다.
‘이제껏 바일레온이 검은 셔츠를 입은 적이 있던가?’
커다란 유리창으로는 초여름의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데, 바일레온의 주변에만 묘하게 사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리엔은 그가 검은 가죽장갑을 벗는 모습을 주시했다.
‘위험해.’
아무래도 바일레온에게 여태 없던 매력이 생겨난 느낌이었다.
살짝 짓는 한숨은 지나치게 관능적이었다. 촘촘한 갈색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눈가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예민미가 배어났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서브남 흑화……?’
왜 다들 클리셰 뻔하다 뻔하다 하면서 정작 내놓으면 후루룩 짭짭 먹는지 알겠어.
원래 아는 맛이 무섭다는 말이 있잖아.
이제까지 서브남 흑화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온 마리엔은 서둘러 번복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쪽도 좋습니다.
“클로이즈, 잠시만 자리 비켜줄래?”
“오빠가 알아차렸나 모르겠는데 난 이미 문을 닫고 있어.”
정말이었다.
마리엔은 어느샌가 복도에 나가 있는 클로이즈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순간이동이라도 했나. 언제 저기까지 갔지.
“조금은 열어놓으렴.”
바일레온이 예법을 일깨웠다. 클로이즈는 알겠다고 말하고는 새끼손가락도 못 집어넣을 만큼의 틈만 남겨두었다.
“깨어난 걸 두 눈으로 보니까 드디어 마음이 놓이네요. 몸은 좀 어때요?”
바일레온이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물었다.
“배고파요.”
마리엔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청포도 셔벗을 향한 미련이 여전히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바일레온이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비어스 경이 죄송하실 일은 아닌데…….”
“비 맞으며 무리해서 감기에 걸렸는데, 눈뜨자마자 찬 음식을 먹는 게 좋을 리 없죠?”
“네에.”
논리의 공격이군. 마리엔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로써 내일 점심 이전에 셔벗을 한 입이라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당장 몸이 괜찮은 것 같아도 한동안 조심해야 해요, 마리엔.”
이 말을 할 때 바일레온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움찔거렸다.
마음 같아선 마리엔에게 손을 뻗고 싶은데, 이성이 말리는 중인 듯 보였다.
‘너무 자의식 과잉적 해석인가?’
열이 내린 머리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다.
바일레온이 뭐가 아쉬워서 절 좋아하게 된 걸까.
이건 자기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의문이다.
오데트 로즈를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사람이 마리엔 디디를 좋아하게 될 수가 있나?
‘평생 한 사람에게만 목매고 살라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노선 변경이 너무 극단적이잖아!’
마리엔은 바일레온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너무 유혹적으로 생기셔서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턱선은 베일 듯이 날렵하고 얼굴엔 음영이 뚜렷하지? 입술도 유난히 붉은 것 같다.
마리엔은 어떻게 사람의 미모가 며칠 새 이토록 깊어질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이런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가진 돈 한 푼 없어도 얼굴만 팔아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그는 이미 백만장자인 데다 제국의 재상이다.
‘진짜 후회 안 하시겠냐고요.’
사실대로 말하면 마리엔은 그의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누구한테 협박받아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셨어요?
언제부터 오데트에 대한 마음을 접고 얼렁뚱땅 보좌관을 좋아하게 됐는지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요? 유혹적으로 생겼다…….”
바일레온이 말을 곱씹었다.
“그럼 그 유혹이 당신에게 통하는 것 같아요?”
마리엔은 눈을 또르르 굴렸다.
“당신한테 안 통하면 소용이 없는데.”
바일레온은 흑화하지 않았다. 이건 흑화가 아니라 그것과는 결이 다른 모종의 변화였다. 마리엔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저기, 영애에게 들었어요. 블랙우드 공작의 재산을 털…… 흠, 털고 계신다고요.”
턴다는 표현 말고 더 고상하고 적합한 말이 있나? 잘 생각나지 않았다.
“연못 물도 다 빼셨다고.”
“네.”
“대체 4황녀 전하께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제가 여쭤봐도 되나요?”
바일레온은 당연히 된다고 했다.
“마리엔, 연못을 계속 뒤져도 로켓 목걸이가 안 나왔다고 했죠. 그건 공작의 힘 때문에 목걸이가 진흙 바닥에 깊이 박혔기 때문이었어요.”
연못 물을 다 빼내고도 인부가 사람 키 높이만큼의 진흙을 파내야 했단다.
그나마 다행은 목걸이가 박힌 자리가 눈에 띄게 패어 있어서 인부들은 헛수고할 필요 없이 그 자리만 파면 됐다고 했다.
“난 진흙으로 더러워진 목걸이를 들고 4황녀궁으로 갔어요.”
결국은 바일레온이 진흙투성이 목걸이를 줍게 됐구나. 날짜와 방법은 달라졌지만.
이야기 전개가 본디 줄거리와 달라진 듯하면서도 묘하게 일치했다.
“마침 황녀 전하께서도 목걸이를 찾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그 앞에 목걸이를 내놓고, 블랙우드 공작의 짓이라고 했죠.”
증거는 연못 바닥에 깊이 파인 자국이다. 연못 관리인을 비롯한 인부 열 명이 직접 봤다.
“전하께서 묵인했던 귀걸이 도난에 이어 목걸이까지 다 공작의 짓이고, 이건 일종의 내부 분열이며, 공작의 의도가 뭐든 간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바일레온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땐 우리의 적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공작의 이런 행동은 전하의 대업에 방해가 된다고요.”
“되게 논리적이네요…….”
마리엔은 약간 떨떠름한 투로 말했다. 바일레온이 엷게 웃었다.
“아무렴 논리적이어야죠. 전하께서 절 최측근으로 삼은 이유가 그건데요.”
“그렇긴 한데.”
“그럼 마리엔은 내가 어떻게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말을 스스로 입 밖에 내려니까 좀 부끄럽긴 했다. 그래도 마리엔은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쓰러졌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져서…….”
“지금 제 심정으로는 공작의 낯짝을 갈아버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전하께서 필요로 하는 건 블랙우드의 위세지 그 냉혈한의 낯짝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일레온이 담담히 말했다.
“가령 이런 말을 쏟아낸다거나?”
“헉.”
마리엔이 놀라 되물었다.
“설마 진짜 그렇게 말하셨어요?”
“네, 이것보다 격분한 상태로 말했어요.”
바일레온은 공작이 눈앞에 있었으면 정말 한 대 쳤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해서 망가지는 게 자기 손이라도 상관없었단다.
마리엔은 그제야 오데트가 이번 사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유를 깨달았다.
논리도 논리지만 감정의 문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일레온 비어스가 이토록 화가 나선 안 됐다.
군신 관계에 처음으로 금이 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오데트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무릇 주군은 신하들의 마음을 두루 살필 줄 알아야 해요. 특별히 총애하는 자가 있는 건 괜찮아요. 다만 그자의 과실을 덮는 과정에서 다른 신하가 손해를 감당하게 해선 안 됩니다. 그 순간 주군의 신뢰도가 무너지니까요. 조율과 균형. 전 황녀 전하께 이 부분을 짚은 겁니다. 이번 일로 제 마음이 크게 상했으니, 최측근이자 유능한 신하인 절 달래려면 공작이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고요.”
이어진 바일레온의 말은 제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시켜줬다.
마리엔은 문득 궁금해졌다. 오데트까지 설복시키는 바일레온은 연인과의 말다툼에 어떻게 대처할까.
제가 그와 맞붙을 경우 결과는 뻔했다. 진다. 마리엔 디디의 참패다.
이에 대해 말하자 바일레온은 “애초에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라고 했다.
저기요, 재상님?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보통…… 좋아하는 사람이 조르면 마음이 약해지지 않나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비어스 경은 그럼 제가 좋다고 하셨으니까.”
마리엔은 흘깃 바일레온의 눈치를 봤다. 만약 둘이 다투게 될 경우,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자신을 털어버리지 말라고 할 셈이었다.
자신은 오데트가 아니다.
바일레온이 난공불락의 논리로 차근차근 몰아세우면, 마리엔 디디는 차근차근 열이 받아 쓰러지고 말 터다.
“제 부탁도 다 들어주실 건가요?”
“먼저 하나만 물을게요.”
바일레온이 무릎 위로 손깍지를 꼈다.
“혹시 내 고백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어요?”
“어…… 그건 아직 생각을.”
“역시 너무 이르죠? 방금 정신을 차렸기도 하고.”
“네네.”
“그럴 것 같았어요.”
바일레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면 우린 아직 연인 관계가 아닌 거군요. 그렇다면 마리엔의 부탁을 ‘다’ 들어주는 건 곤란해요.”
마리엔은 제가 들은 것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하지만 비어스 경은 절 좋아하시는데.”
“네, 좀 심각하게요.”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심각할 정도로 좋아한다고? 언제 벌써 그 지경이 됐어요.
마리엔은 그간 자신이 놓친 신호가 상당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근데 제 부탁은…….”
“아까도 말했지만 마리엔이 수락하기 전엔 아직 연인 관계가 아니죠. 난 선을 제대로 지킬 거예요.”
“선이라.”
“연인으로서의 바일레온 비어스가 궁금하면 언제든 말해요. 난 어떤 방식으로든 헌신할 준비가 됐으니. 단, 이 모든 것은 고백을 받아들이고 난 후여야겠죠?”
뭐지. 바일레온의 정체는 혹시 여우였나?
마리엔은 꼬리가 달려 있는지 확인해보게 잠깐 엉덩이를 보여달라고 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사람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면서! 도대체 짝사랑은 왜 그리 오래 한 거야.
마리엔을 향해 눈웃음 짓던 바일레온이 말했다. 하마터면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이.
“참, 마리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