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44)
마리엔은 정신을 차린 다음 날부터 하녀의 도움 없이 걸어다닐 수 있게 됐다.
그토록 원하던 청포도 셔벗도 먹고, 단풍나무 시럽을 잔뜩 끼얹은 팬케이크도 먹었다.
욕조에 들어앉아 거품 목욕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책을 몇 권씩 읽었는데도 바일레온으로부터 출근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상부 사람들은 아마 마리엔이 죽을병에 걸린 줄 알 거다.
“이제 일상생활을 해도 됩니다.”
저택을 방문한 황실 의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완쾌 진단을 내렸다.
거기다 좀이 쑤시니 제발 움직이고 싶다는 마리엔의 간청이 더해지고 나서야 바일레온은 모레부터 출근하라는 답을 주었다.
고대하던 출근 전날, 마리엔은 바일레온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시내로 나갔다.
클로이즈가 외출에 동행했다. 영애는 마리엔이 가려는 장소에 대해 듣더니 거기 말고 본인의 단골 가게로 갈 것을 권했다.
“단골인 곳도 있어요?”
마리엔의 물음에 클로이즈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로맨스와 미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거든요. 호감 가는 이가 생기면요. 원래 이런 걸 안 믿던 사람도 점성술이나 꽃점 결과에 솔깃하게 된단 말이죠.”
꽃점이란 말에 마리엔은 속으로 뜨끔했다.
이미 화병의 꽃으로 몇 번이나 점을 쳤기 때문이다.
꽃잎 하나를 뜯을 때마다 사귄다, 안 사귄다, 사귄다, 안 사귄다를 반복했다.
어디 그뿐인가. 동전을 던져서 어떤 면이 나오는지 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도 확률을 뽑아봤다.
바일레온이 봤으면 진짜 동전 한 닢에 자기 고백의 성패가 결정되는 거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진심이냐고.
‘아니, 진짜 이걸로 정하는 건 아닌데…… 이런 데에라도 매달리고 싶단 말이에요.’
마리엔은 속으로 꿍얼거렸다.
‘게다가 어째선지 할수록 더 안달이 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절대 만족할 수가 없다. 당연하다. 직접적인 행동은 안 하고, 혼자 꽃잎이나 뜯으면서 상상만 했으니까.
상상 속에서는 그 어떤 일도 가능하다. 그래서 상상은 하면 할수록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다.
또 다른 문제는 시시한 점을 치는 내내 바일레온 생각만 하게 된다는 거다.
저 역시 비어스 경이 좋아요. 당신의 연인이 되고 싶어요.
이렇듯 간단한 문장만 내뱉으면 온화한 미소와 두꺼운 가슴이 당장 제 것이 된다.
그 생각만 하면 자꾸 체온이 급상승하는 것 같아서 곤란했다.
사실 자신은 변태였을까?
연인이 되어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음흉한 상상부터 하는 걸까?
오데트는 이런 생각 안 할 텐데. 만일 하더라도 전혀 내비치지 않을 텐데. 내 이런 모습을 바일레온이 알아봐.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게자리가 제일 야한 별자리랬잖아. 혹시 또 모르지. 바일레온의 눈엔 이런 네가 귀여울지도.’
뭐가 어쩌고 저째?
아무리 최애에게 고백받았기로서니 너무 너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거 아냐?
마리엔은 스스로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는 오늘따라 순순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긴 동정이면서 절륜한 게 가능한 세상이라고. 그러니까 북부 놈보다 동정 지킨 기간이 1년 더 긴 비어스 경은 365일만큼이나 더 절륜할 게 당연하다며 혼자 지껄인 건 생각나니, 마리엔 디디?’
마리엔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냥 모든 게 다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하련다.
“단골 가게까지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우습지만요. 사실 저도 미신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안 믿는 건 안 믿는 거고, 결과 듣는 건 너무 재밌단 말이에요!”
클로이즈가 밝게 외쳤다.
“그리고 입담은 또 얼마나 좋게요. 듣고 있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니까요.”
“나도 이렇게 가볍게 생각해야지…….”
“네? 방금 뭐라고 했나요?”
마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우리 빠, 빨리 들어가봐요!”
이십 분 뒤.
마리엔은 아까보다 더 혼란에 휩싸인 채 점성술사의 영업장을 나섰다. 클로이즈는 그런 마리엔의 옆에서 “웬일이니?”를 연발해댔다.
“보좌관님, 바일레온 오빠만 고백을 한 게 아니었나요? 오빠 말고 연인 후보가 더 있는 거예요?”
“아뇨, 그럴 리가…….”
“하지만 보좌관님도 들으셨잖아요. 상서로운 별 세 개가 보좌관님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나는 오빠일 텐데 다른 둘은 누구지.”
클로이즈는 심히 흥분해 있었다. 거기서 또 짝짓기 광인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친혈육을 응원 중인 줄 알았는데, 연적의 등장 소식에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누구지?’
또 어떤 취향 특이한 녀석이 마리엔 디디에게 꽂혔단 말이냐.
◇ ◆ ◇
제가 바일레온을 거절하면 원작 전개에는 아무 영향이 없을 것이다. 원래 마리엔 디디는 서브남 바일레온 비어스와 사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일레온의 고백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원작의 큰 흐름에 방해가 되나?
아니다.
어차피 바일레온은 원작에서 오데트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데트의 황제 등극은 바일레온의 연애 여부와 연관이 없다.
“또 자꾸 나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네…….”
독자 시절,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들 원작 여주를 좋아하던 캐릭터가 마음을 바꿔서 빙의자에게 고백하면 설레기보다 화가 날 거라고 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널 좋아한 이유가 여주를 향한 네 절절한 사랑 때문이었는데!
그때 저도 책상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었다. 오데트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바일레온이 말이 되냐며, 한 치 앞도 모르고 잘도 지껄였다.
“앞으로는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야지.”
여기서 또 새로운 교훈을 얻고 간다.
“휴.”
바일레온과 함께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려 하면, 재수 없는 북부 놈의 비꼼이 귓가를 맴돌았다.
넌 그의 사랑을 응원하는 척하지만 실은 오데트의 자리를 뺏고 싶은 거라고.
“망할 새끼. 어떻게 말을 해도 그딴 식으로.”
분했다.
사실 제 마음은 이미 바일레온에게로 많이 기울었다. 한데 여기서 그걸 인정해버리면, 카인 놈이 그것 보라며 비웃을 것 같았다.
“아악!”
마리엔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고함을 내질렀다. 이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하는 인간의 말에 휘둘리지 않겠다.
‘그놈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내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흘러가게 두진 않아. 놈의 말은 늘 그래왔던 대로 무시하면 그만이야.’
마리엔은 마음을 결정했다.
◇ ◆ ◇
마리엔은 달빛 쏟아지는 후원으로 나갔다.
다른 귀족 저택의 후원이 자로 잰 듯 딱딱 떨어지는 조형미를 자랑한다면, 비어스 백작저의 그것은 우거진 숲에 가까웠다.
바일레온은 그중에서도 흐드러지게 핀 야생장미 덤불 주변에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시킨 일을 하는 중이었다.
일국의 재상이 야밤에 삽질이라니.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어스 백작은 정원 가꾸기만큼은 남의 손에 못 맡기겠다는 주의였고, 그런 백작이 유일하게 인정한 이가 바일레온이었다.
“이따 시간 날 때 나무 옮겨 심을 땅을 좀 파두렴. 난 슬슬 허리가 아파서 말이다.”
백작이 아들에게 정원 일을 부탁하고, 재상인 아들은 아무렇지 않게 부탁받은 일을 하는 것.
이게 비어스 백작가의 방식이었다. 마리엔은 제각기 관심사에 푹 빠져 사는, 이상하고 다정한 이 가족이 참 좋았다.
“마리엔, 아직 안 잤어요?”
바일레온이 흙을 옆으로 던졌다. 삽을 땅에 박아넣고 흙을 퍼 올리는 동작이 물 흐르듯이 매끄러웠다.
백작이 그간 장남을 얼마나 자주 유용하게 써먹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리엔은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 팔근육에서 시선을 떼려고 노력했다.
‘저 팔로 날 들어 안았단 말이지.’
이런 생각은 잠시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비어스 경, 제가 좋은 이유 세 가지만 대보세요.”
마리엔은 대뜸 요구했다. 바일레온이 삽질을 멈췄다. 세 가지만 고르기엔 너무 많다는 항의가 돌아왔다. 어쩐지 빙의 초반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서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게 차이점이지만.
“빨리요.”
“……첫째, 당신과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밝아져서요. 둘째, 그래서 당신을 더 기쁘게 만들고 싶어져요. 당신을 웃게 하면 그것만큼 뿌듯한 일이 없어요. 그 순간만은 내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마저 들죠.”
마리엔은 절대 착각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셋째.”
바일레온이 나직이 말했다.
“마리엔과 함께라면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당신과 재잘재잘 이야기 나누는 정다운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진다면, 내가 너무 앞서가는 것처럼 보일까요?”
그의 미소에서 엷은 수줍음이 묻어났다.
“하지만 사실이에요.”
“제가 그만 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앞으로 매일 새로운 장점을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전 비어스 경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더 자주, 더 많이 웃으셨으면 좋겠고요. 황녀 전하와 이뤄지길 응원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어요.”
마리엔은 여기까지 말한 다음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비어스 경은 저와 함께여야 기쁘겠다고 하시니까…….”
마리엔은 입가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럼 전 기꺼이 비어스 경의 행복이 될게요.”
이 순간.
마리엔은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많은 추억이 빛바래더라도, 이 순간 바일레온의 얼굴에 번져나가는 슬픈 미소만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할 거다.
희한한 일이지.
사람이 너무 기쁘고 벅차면 문득 그 사이로 슬픔이 깃든다는 게.
바일레온이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리엔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 1일!”
기세 좋게 외치고 나니까 뒤늦게 좀 부끄러워졌다. 마리엔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그런데 이제 뭘 해야 되죠? 제가 연애는 처음이라 이다음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바일레온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처음이라서.”
다른 사람들은 고백을 받아들이고 나서 어떻게 할까.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구해다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일레온과 연인이 되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 현실이 된 것치고는 감정의 동요가 적었다.
생애 최초의 연애인데, 그것도 바일레온과의 연애인데 이것보다는 좀 더 벅차고 설레서 두근거려야 하지 않나?
왜 이렇게 계속 그냥 얼떨떨하기만 하지? 뭔가 한마디 하기도 갑자기 조심스럽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가?
마리엔은 숨을 길게 내쉬며 뺨에 손등을 갖다 댔다.
“왜 그래요?”
“어색해서요.”
마리엔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데 어색하고 어색한데 좋아요. 제가 말하면서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래요.”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난 알겠는데.”
바일레온이 마리엔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순간 마리엔의 심장이 폭주하면서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
‘키스하려나 봐!’
사귀기로 한 지 몇 분 됐다고 벌써? 빨라도 너무 빨라. 역시 제일 야한 별자리라는 해석이 사실이었어. 이게 본성이라면 여태 어떻게 참았대?
“나도 그렇거든요.”
응?
눈을 감을까 말까 치열하게 고민하던 마리엔은 바일레온의 속삭임에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나도 너무 좋은 한편으로 어색해요. 꿈꾸는 것 같기도 하고요. 상상 속에선 이보다는 능숙하게 리드했는데.”
“아……. 그런 뜻이었어요?”
“네.”
바일레온이 부드럽게 되물었다.
“어떤 뜻이라고 생각했어요?”
“아, 하하.”
눈 안 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