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48)
마리엔과 연인이 된 지금도, 바일레온은 가끔 오데트 생각을 하지 않을까.
꼭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거다.
마리엔은 이렇게 해도 화를 내지 않네. 오데트는 질색했는데.
마리엔과 지금 거니는 이 거리. 여기 근처에 물감 가게가 있었지. 예전에 종종 들르곤 했어. 오데트에게 그림 그려줄 일이 없으니 요즘은 통 붓을 안 잡게 되는군.
망상이 나뭇가지처럼 쑥쑥 뻗어나갔다.
‘누가 보면 내가 마리엔 디디가 아니라 바일레온 비어스한테 빙의한 줄 알겠어.’
마리엔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일단 바일레온과 오데트 두 사람 사이엔 추억이 많다. 함께해온 세월만 10년이다. 앞으로 같이 이룰 일도 많고.
‘그러니까 전력 질주가 일상이라 장딴지에 알 배긴 마리엔은 되게 심란할 자격이 있다 이거예요.’
유리꽃?
좋겠다.
만성 허약 체질로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가녀린 유리꽃 같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소녀 적부터 품어온 막연한 동경의 이미지랄까.
마리엔은 휴고와 호신술 연습하느라 햇볕에 살짝 그을린 손등을 내려다봤다.
‘참 건강해 보이네…….’
얇은 장갑이라도 끼고 할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스몄다.
다음 순간, 응접실 문이 열렸다.
“4황녀 전하 드십니다.”
시종이 옆으로 물러나자 그 뒤로 오데트가 나타났다. 드디어 세계관 최강자의 등장! 하나 마리엔은 오데트의 얼굴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이, 이게 뭐지?’
마리엔은 절 내리누르는 보이지 않는 힘에 경악했다.
이제껏 남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거나 난데없이 향기가 느껴지는 등의 특수효과가 나타나긴 했다.
그렇지만 제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바위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야. 너무 무거워. 심지어 아파. 잠깐만요, 세계관님! 이렇게 안 하셔도 전 인사 올릴 생각이었는데요.’
불쌍한 마리엔 디디. 짜부라지네. 안 그래도 키 작은데 바닥에 들러붙겠네.
마리엔은 안 넘어지고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무릎을 굽히게 됐다. 놀랍게도 무릎을 굽히고 나자, 바윗덩이는 마리엔의 뒤통수로 이동했다.
‘아, 머리. 머리. 머리!’
턱이 거의 빗장뼈에 닿도록 고개 숙임을 당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눈알뿐이다. 마리엔은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시야 끝에 우아한 은색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네가 ‘그’ 디디 보좌관인가?”
가냘프지만 발음만은 또렷한 목소리가 마리엔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너무 성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 모가지든 무릎이든 둘 중 하나가 꺾이기 전에 먼저 일어나라고 허락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그럴 리 없음을 안다. 마리엔은 이미 로판 다독을 통해 내궁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면전에 대고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모욕 주기, 딴청 피우면서 시간 끌기, 다 너를 아껴서라는 핑계로 기강 잡기.
전부 오데트가 겪은 일이다. 그리고 당했다는 것은 배웠음을 의미한다. 황궁 생활 6년 차인 오데트는 이제 내궁의 기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터다.
마리엔은 혼자 감상에 빠졌던 제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연인의 첫사랑?
웃기시네.
정신 차리렴, 마리엔. 너는 미물이고 상대는 차기 황제란다.
감상에 빠질 여유가 있었으면, 그 시간에 차라리 무릎 받침대라도 구해서 치마 밑에 숨기지 그랬어.
“네, 전하. 재상부 제3보좌관 마리엔 디디입니다.”
“이만큼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오데트가 느릿하게 말했다.
“지난번 오페라 하우스에서 넌 옆 박스석에 앉았지. 그때 내가 한번 고개 돌려 너를 봤는데, 우리 보좌관은 비어스 재상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더구나.”
“송구하옵니다.”
“네 고조부도 안 쓸 말투는 접어두렴.”
“네, 전하.”
허벅지가 안팎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응접실. 완벽하게 통제된 실내 환경. 발을 들인 순간부터 공기 중에서 꽃향기도 풀냄새도 아닌 엷은 향내가 느껴지는 곳.
힘들기로 따지면 비 오는 날 연못을 헤집을 때가 훨씬 우세할 터다.
하나 천천히 사람 숨통을 조이는 긴장감으로 치면 지금 이 순간이 최고였다.
마리엔은 비로소 자신이 정쟁과 암투가 휘몰아치는 로판 속에 들어와 있음을 체감했다.
이게 내궁의 맛이다, 애송아.
부채를 살랑거리면서 사람 신경줄을 끊어놓지.
이 순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자신에게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자세는 견딜 만하고?”
오데트가 차분히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삼 초 뒤에 쓰러질 것 같습니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삼 초가 지났어. 하지만 넌 아직 쓰러지지 않았네.”
오데트가 벨벳 커버를 씌운 의자에 앉았다. 이로써 마리엔은 은색 드레스 끝자락이 아닌 허리 아래 전체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래봤자 여전히 오데트 얼굴은 볼 수 없다.
“흐음.”
방금 오데트 얼굴을 볼 방법이 생각났다. 진짜로 바닥에 뻗어버리는 거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눈만 돌리면 되니까 기가 막힌 묘수다.
‘눈을 마주 보며 일단 잘못했다고 비는 거야.’
그리고 마리엔은 실행 타이밍이 가까웠음을 확신했다. 이 이상 견디는 건 무리다.
“제법 버티는걸.”
“아뇨. 아닙니다. 저는 곧, 지금, 바로.”
“혹시 궁금해할까 싶어서 알려주자면 말이다. 내가 내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 와중에 과거 회상이라니 무자비하기도 하시지.
“2황비가 예절 교육을 엄히 한다는 명목으로 날 정원에 세워두었단다. 네가 지금 취하고 있는 바로 그 자세로, 해가 질 때까지 있으라고 했어.”
마리엔은 나중에 2황비가 복도로 질질 끌려나가는 이유를 방금 온 허벅지로 깨달았다.
“3황비는 그래도 아직 어린애인데 너무한 처사라며 황후에게 가서 산새처럼 재잘거렸대. 황후는 2황비가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냐며 찻잔만 기울였고.”
오데트가 담담한 투로 말을 이었다.
“소식을 들은 황태자가 날 구경하러 왔더구나. 그가 내 얼굴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자 나랑 똑같은 장미색 눈동자가 보였단다. 그때 황태자가 나한테 말했지.”
마리엔은 그놈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고 있었다. 어린 매춘부 냄새가 코를 찌르네.
“어린 매춘부 냄새가 코를 찌르네.”
오데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 몸은 분하게도 해 질 때까지 버티지 못했어. 아마 황태자가 가자마자 쓰러졌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십니다.”
“넌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아.”
마리엔은 즉시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제 다리는 오래전부터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는걸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젊은 나이에 벌써 무릎이 안 좋아서요.”
자존심 따위 뭐가 중요하냐. 우선 위기를 넘기고 봐야지! 마리엔은 오데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딸랑이를 흔들었다.
“나와 같은 스물둘로 알고 있는데.”
“네네, 그렇습니다.”
지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내 나이도 다 알고 있네. 아무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데트인걸. 아마 나조차 모르는 내 머리카락 개수까지 알겠지.
“그나저나 비어스 취향이 언제부터 바뀌었을까?”
오데트가 손을 무심하게 저었다.
“일어나라.”
“하, 살았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놓고 안심하면 또 시키고 싶잖니.”
마리엔은 치마 위로 다리를 주무르다 말고 굳었다.
“농담이야.”
“……제가 최근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오싹했습니다.”
“진짜 시킬까?”
“…….”
“재밌구나, 이거.”
오데트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 마리엔은 드디어 오데트의 존안을 보게 되었다.
달빛으로 짠 베일을 쓴 듯한 은발에 붉은 장밋빛 눈동자. 금방이라도 부서질 유리꽃처럼 보이지만, 두 눈에는 총기가 가득하다고 했다.
마리엔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은 오데트를 말없이 쳐다봤다.
‘아무래도 여기 사람들은 유리꽃이란 단어를 나랑 다른 의미로 쓰나 봐.’
저 머리 뒤에서 비치는 서늘한 후광이 안 보인단 말인가?
유리꽃이라니.
명계에서 칼 갈고 올라온 복수의 화신 자첸데.
그나저나 여기 별칭이 백조의 궁이라고 했지. 그래, 백조들이 살긴 사는데 걔들 먹이가 주인의 정적일 것 같아.
나중에 호수 아래에서 사람 뼈가 수두룩하게 발견될 그런 느낌이야.
마리엔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물안개를 한 겹 두른 듯한 은빛 드레스나 가히 절세미인이라 불려도 모자람 없는 오데트의 미모는 뒤늦게야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압도하는 기백이라니.
미물 보좌관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엮이면 끝장이다.
“암만 봐도 나보다 나은 구석을 못 찾겠는걸.”
한편 마리엔을 찬찬히 뜯어보던 오데트가 서슴없이 평가했다.
“외모가 조금 귀엽긴 하네.”
그러더니 덧붙였다.
“아, 기분 안 나쁘게 비위 맞추는 법을 알고 있더구나. 보통 그러면 수가 빤히 보여서 짜증 나거든.”
“감사합니다.”
“한데 블랙우드 공작에겐 왜 그랬대?”
마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상대를 쥐고 흔드는 황녀의 기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 약혼자 카인 블랙우드 말이야. 이렇게 비위 잘 맞추는 네가 첫 만남부터 그의 심기를 긁어내린 게 이상해서.”
“전 싫어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 싫어하는 편이거든요.”
마리엔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자신은 오데트의 상대가 못 된다. 어설프게 거짓말을 둘러대느니, 일부라도 진실만을 말하는 게 낫다.
“한번 찍은 놈은 웬만하면 끝까지 싫어하는 성격이고요.”
“저런.”
오데트가 짧게 혀를 찼다.
“그건 나와 같다만…… 방법이 영 틀렸어. 네가 내궁에 들어왔으면 첫 주가 지나기 전에 행방불명됐을 거야. 시신이 없으니 장례도 못 치렀겠지.”
“참 섬뜩한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잘하시네요.”
자신이 식은땀 닦을 손수건을 챙겨 왔던가? 없으면 블라우스 소맷단으로라도 이마를 훔쳐야 할 판이다.
“그렇지만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 내궁에서 못 버텼을 거예요. 전하와 같은 강단이 없거든요. 저는 그냥…….”
이 말이 오데트의 귀에 진심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평범하게 출퇴근이나 하며 궁 밖에서 평온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평온하게라.”
오데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걷는 길과는 전혀 다른 삶이다. 애초에 오데트 로즈로 태어난 이상 평온하게 살기란 불가능하겠지만.
“네가 비어스와 함께하기로 했다면 그건 어려울 텐데.”
“네?”
“정말 평온하게 살고 싶었으면 이모네 가게나 물려받았어야지. 매일 아침 유리창을 닦다가 건너편 가게 주인의 아들과 정이 들어야 했어. 한데 넌 재상의 연인이 됐잖니.”
오데트가 다시 마리엔을 응시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고? 네가 원치 않아도 풍랑에 휩쓸리게 돼. 왜냐면 비어스와 난 오래전에 한배를 탄 사이고, 우린 어느 한쪽이 죽지 않는 이상 배에서 내릴 생각이 없거든.”
이보다 강력한 엄포가 어딨을까.
바일레온과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걔가 딴 여자랑 잘되는 꼴도 보기 싫다. 오데트가 이렇게 말했으면 차라리 나았으려나?
“하여튼 이제 돌이키기엔 늦었어. 그러니 앞으로는 듣는 귀를 조심하렴. 달리는 마차 안이라고 방심해선 안 돼. 아니면 목소릴 조금 더 낮추든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자 오데트가 대답했다.
“너희 출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