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50)
마리엔은 4황녀궁을 터덜터덜 나오면서 맹세했다.
‘앞으로 다시는 빙의자 선배님들을 답답하다고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기껏 귀족 영애나 황녀의 몸에 빙의되면 뭐 하나. 일을 만들어서 하다가 끝내 일 중독이 되어버리는 선배님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재미와는 별개로 그들이 안타까웠다.
회귀자들은 이해가 가. 걔넨 보통 억울한 죽음을 계기로 회귀하지. 자기 뒤통수 친 인간들한테 복수해야 하니까. 긴장의 끈 놓으면 안 되는 거 알겠어.
근데 빙의자는 다르잖아요. 빙의자는 보통 악역 영애나 시한부 황녀, 어쨌든 일 안 해도 안 굶어 죽는 몸을 배정받는다고.
그렇다면 좀 맛있는 거나 먹고 무도회 구경이나 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거기, 사업 시작하지 마세요!
유능하지 말라고!
무사평온한 삶을 사수하라!
멀리서 안타까워할 때는 몰랐다. 그래서 자신은 뭔가 다를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또 마리엔 디디가 틀린 것이다.
지엄하신 로판 세계관님은 놀고먹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신다. 설령 엑스트라 보좌관이라 한들 피해갈 방법이 없다.
‘검은머리파뿌리 작가님도 뼛속까지 쑥과 마늘의 민족이셨던 거야.’
진짜 일 안 하고 편히 살려는 놈이 있으면 원작 여주에게 불려가 일을 받게 되는 그런 세계관이 있다.
망할 인정욕구.
솔직히 말하면 오데트가 자신을 쓸모 있게 봐줬을 때 쪼끔 뿌듯했다.
‘실제로 전 그다지 안 똑똑한 편이지만요. 이 동맹 결혼 전개에 관해서는 마리엔 디디를 따라올 자가 없단 말이죠. 제가, 어? 마음만 먹으면, 어? 바일레온을 제치고 4황녀궁 브레인도 될 수 있다.’
마리엔은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스스로 꿀밤을 쥐어박았다.
‘또 나댄다.’
전개만 알다 뿐이지 정작 작은 변수와 맞닥뜨리면 머리가 새하얗게 비면서 무슨.
‘어떻게 그런 함정을 생각해냈냐고 더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한다. 오데트가 알아내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자신은 지금쯤 내궁 스타일의 고문을 당하고 있었을 거다.
눈에 띄는 상처는 최소화하되 고통은 최대로 가하는 방법이 수십 가지에 달한다고 들었다.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빨리 뛴다. 마리엔은 심호흡을 하기 위해 복도에 멈춰 섰다. 가슴께를 지그시 누른 채 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문득 눈 돌린 곳에 커다란 액자가 보였다. 마리엔은 초상화를 올려다봤다.
그림 속 오데트는 액자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붉은 새틴 어깨띠(sash)에 훈장까지 패용한 차림이었다. 고집스레 다문 입매엔 엷은 웃음기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모델이 웃지 않아도 화가가 기교를 부려 미소 띤 표정을 그릴 법도 하건만 그러지 않았다. 아마 오데트의 뜻이었을 것이다.
“멋있다…….”
그림을 쳐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흡사 쏘아보듯 올곧은 시선에서 기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돼야 여주인공을 하는구나.”
언젠가는 한갓진 이 백조의 궁을 벗어나 황궁 전체를 다스리게 될 오데트.
마리엔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
근본부터 달라서 선뜻 따라 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직접 만나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을 뿐.
“어쩐지 약간 쭈글쭈글해지는 기분이네…….”
너무 빛나는 위인을 만난 직후라서일까. 무의식중에 스스로와 오데트를 비교하게 됐다.
애초에 대결 구도가 성립하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생각이 저절로 그쪽으로 흘러갔다.
결점까지 매력적인 오데트.
내 남자의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라고 포장하기엔 너무 강력한 상대다.
‘아니, 이뤄지지 않아서 더 강력해!’
마리엔은 시무룩해졌다. 자신이 바일레온이라도 오데트를 평생 못 놓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름 매력 터진다, 뭐.”
일단 달리기만은 오데트보다 잘할 수 있다. 그건 확실하다.
주먹 내지르기도 경호원 휴고에게 제대로 배웠다. 그러니까 이제 벌써 두 가지 종목에서 오데트를 앞지르는 것이다.
참, 오데트보다 자주 웃는다. 실없는 소리로 바일레온의 정신을 쏙 빼놓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이 있으면 매사 긴장해야 하는 오데트보다는 훨씬 편하게 느껴지잖아?’
대하기 쉬운 데다 본인을 좋아해주기까지 한다.
‘그러니 이뤄질 가망이 없는 오데트가 아니라 마리엔 디디를 차선책으로 택한…….’
위험! 위험!
마리엔은 나쁜 생각을 떨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차선책이라니 왜 그런 흉한 단어를 떠올렸을까. 바일레온은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연애가 100퍼센트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이전엔 생각지도 않았던 비교를 하게 되네.”
우울한 건 딱 질색인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재상부에나 돌아가자!
마리엔은 초상화에서 눈길을 거두고 씩씩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 ◆ ◇
“계속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못 해서 미안해요.”
바일레온이 속삭이듯 말했다.
“수도 내에선 아무래도 남들 눈을 신경 써야 하죠. 그러다 보니 일 핑계로만 디디 보좌관을 끌어내는 것 같군요.”
“아니에요.”
마리엔은 그를 따라 목소리를 낮췄다.
“저 외근은 오늘이 처음인데 책상 앞에 있는 것보다 훨씬 재밌는걸요. 바람 쐬는 기분도 나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게다가 돌아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사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데이트가 아니면 뭐겠어요.”
“아, 내가 데려가고 싶은 덴 그런 곳이 아니라…….”
바일레온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는 자신들보다 앞서 걷는 중인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지금 바일레온이 다른 사람 눈치를 본 건가?
“아무튼 미안해요.”
“방금 말을 얼버무리신 거예요?”
“아뇨.”
“누가 봐도 말을 하다 말았는데?”
마리엔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아니면 어디로 자신을 데려가고 싶냐고 물었다. 바일레온이 난색을 보이는 게 재밌었다.
“어딘데요? 오늘 끝나고 갈 순 없나요?”
“그렇게 갑자기는 안 돼요.”
“앗, 나쁜 덴가 보다.”
일부러 말 트집을 잡는 마리엔의 눈이 반짝였다. 바일레온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디디 보좌관을 그런 데에 데려갈 리 없잖아요.”
“그런 데라니 어떤 데요?”
“……재상을 수행하는 태도가 너무 짓궂어요.”
마리엔이 작게 웃었다.
“자기가 불리하니까 재상님이래.”
“자기?”
“어머, 여보.”
속닥속닥 장난치는 게 재밌어서 던져본 거였다. 오히려 단둘이 있었으면 시도조차 못 했을 짓이다. 근데 바일레온이 여기에 반응했다.
순식간에 그의 귀가 새빨개지더니 정복 깃 위로 보이는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비어스 경, 열나세요? 얼굴 주변이 붉어지셨어요. 피부가 워낙 하야셔서 눈에 띄어요.”
바일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면만 보고 걸었다. 마리엔은 입가를 가린 채 웃음을 삼켰다.
새콤달콤한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비어스 경, 이쪽입니다.”
앞서 걷던 현장 안내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마리엔과 바일레온, 두 사람은 오늘 축제 준비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나왔다.
재상이 어쩌다가 여름 축제 준비까지 챙기게 됐나. 거기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황후는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이 여긴다.
가문 좋은 정궁의 아들이라는 명분에 어릴 때 다소 두각을 드러낸 점. 그녀의 외아들은 이 두 가지 덕분에 황태자가 됐다.
황후의 기대와 달리 황태자는 커갈수록 차츰 아둔하게 변했다.
모욕당했다고 느낀 즉시 화부터 발칵 내는 습관은 아둔한 데다 성질까지 더럽다는 평판을 안겨주었다.
아들이 여태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하자 황후는 조급해졌다. 그래서 황제가 신경 쓰던 공공도서관 사업 건을 황태자에게 몰아주려 최선을 다했다.
공공도서관 사업 건은 결국 황태자의 손에 떨어졌다. 눈독 들였던 건을 놓친 2황자가 그것 대신 잡은 게 여름 축제 준비였다.
무슨 꿍꿍이속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황자는 최종 점검을 바일레온에게 맡겼다.
보좌관 중에서는 마리엔이 따라나섰다.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바일레온이 물었다. 그러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예, 그럼요. 그럼요.”
“비어스 재상님께서 친히 나와 살펴주시고. 아유,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 이어졌다. 마리엔은 그들의 영혼 없는 웃음에서 익숙한 향기를 느꼈다.
네, 넵, 앗, 넵.
그들처럼 ‘네네 인생’을 사는 마리엔이라 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문제가 있군.’
다행히 바일레온도 그들의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챈 듯했다.
“여러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 나라의 재상입니다. 여러분을 도울 뜻과 권한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죠. 지금이 문제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구석에 있던 한 여자 위원이 입을 열었다.
“실은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다들 움찔 놀라며 그녀를 만류했다. 여자 위원은 언제까지 덮어둘 수 있을 것 같냐며, 기회가 왔을 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바일레온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제국의 꽃 선발대회 참가자 전원이 합숙 중에 단체로…… 식중독에 걸렸습니다.”
“어쩌다가요?”
마리엔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럼 지금 다들 입원한 건가요?”
“증상이 아주 심각한 여덟 명만 입원했고, 나머지는 숙소에서 간호받고 있습니다. 한데 언제 추가로 실려 갈지를 모르는 상황이라.”
여자 의원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의원들의 표정도 그녀와 비슷했다.
당장 사흘 뒤가 축제 시작일이다. 그리고 제국의 꽃 선발대회야말로 여름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축제 자체가 연기되거나 취소되면 됐지, 선발대회만 안 열린 적은 없었다.
어쩌자고 어물쩍 넘기려 했을까?
이 여자 의원이 나서지 않았으면 다들 대회 당일까지 입을 다물려 했으려나?
그때쯤이면 참가자들은 무대에 오르긴커녕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도 없을 텐데.
바일레온도 마리엔과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책임 추궁 대신 환자들의 용태를 물었다.
생명이 위독한 사람은 아직 없는지,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 가족에겐 연락했는지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하여간 일관적인 남자였다.
마리엔을 밀정으로 의심할 때에도 임신 때문에 힘든 상황은 아닌지부터 확실히 하더니.
‘바일레온 비어스, 제국의 진정한 꽃은 당신입니다.’
재상님의 따스한 인정은 만개한 꽃 같아라. 제국의 태양에 이어 꽃 칭호도 귀하가 다 가지시길.
지금부터 마리엔 디디가 그렇게 정했다. 반대하는 놈은 광장에 거꾸로 매달겠다.
“예, 첫 증상자가 어젯밤에 나타난 후로 오늘 이 시간까지 무더기로…….”
이까지 말한 여자 의원이 돌연 몸서리를 쳤다.
“무더기, 아아……. 무더기…….”
아무도 그녀에게 갑자기 왜 그러냐고 캐묻지 않았다. 모두의 안녕을 위해 모른 척해야 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다행히 여자 의원의 회복은 빨랐다.
“그저께 저녁으로 제공된 굴 스튜의 냄새가 약간 이상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원인이었지 않나 싶습니다만.”
메뉴부터 예사롭지 않군. 굴 스튜라. 냄새가 약간 이상한 굴이라. 마리엔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한데 바일레온은 메뉴를 듣고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이 시기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