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53)
바일레온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린 다음 덧붙였다.
“미안해요.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불려가게 해서. 거기다가 우리 관계에 대한 명령을 듣게까지 해서요.”
“뭐, 어차피 헤어질 생각 없었거든요.”
“그래도요.”
바일레온이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그러겠다고 혼자 생각하는 거랑 남이 명령 내리는 건 전혀 다르니까요.”
하, 내 말이 바로 그거예요.
마리엔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연인을 둔 것에 감사했다.
“4황녀궁에서 언젠가는 마리엔을 호출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빨리 데려갈 줄은 몰랐어요.”
바일레온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내가 블랙우드를 흠씬 털긴 했죠. 하나 그것 때문에 당신을 불러들이진 않았을 거예요. 단순히 내 연인이 궁금해서도 아닐 거고요.”
정답.
마리엔은 오데트와의 대면을 떠올렸다.
4황녀궁의 응접실에 있는 동안 오데트의 과거 회상, 의외로 입 무거운 클로이즈 칭찬, 본인과 바일레온은 한배를 탄 몸이라는 문제적 발언, 마리엔 너도 벌써 승선했다는 말을 들었다.
더 있었으면 체스 둘 줄 아느냔 질문까지 들었을 거다.
왜 그걸 모르냐고, 바일레온이 안 가르쳐주더냐며, 바일레온이 얼마나 훌륭한 호적수인지까지 줄줄 들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북부 놈은 어떤가? 오데트와의 대화에서 블랙우드의 ‘블’자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원작대로라면 지금쯤 오데트와 북부 놈은 짙은 키스를 몇 번이나 나눈 사이일 텐데.
심지어 그날 오데트는 약혼자의 머리카락에 대한 마리엔의 광적인 집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리엔과 달리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오데트.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점이 많지만, 그날은 마리엔 포섭하기에만 집중했던 걸까?
‘그렇다기엔 좀 더…… 뭐라고 해야 하지? 좀…… 무관심에 가까운 느낌이었어.’
북부 놈이 결국 오데트의 눈 밖에 났으려나?
귀걸이 도난 사건을 묵인해줬건만 은혜도 모르고 소중한 유품 목걸이까지 연못에 처박았다.
그 일로 가만히 잘 있던 바일레온까지 화나게 했다.
오데트의 성정상 카인 블랙우드가 카인 블랙우드만 아니었으면 벌써 몸을 조각조각 따따따 잘라 백조 먹이로 던져줬을 것이다.
‘몸이 커서 그런가. 애들이 많이 남기네, 하면서 남은 건 돼지 여물통에 부어주고도 남을 인물이라고.’
어쨌든 오데트의 마음이 놈에게서 떴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자신이 바일레온과 맺어진 것과는 별개다. 놈이 남은 평생 오데트 옆에서 대공입네 사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라지만 혹시 모르잖아.
혹시.
“아마 내 언행에 뭔가 빈틈이 있었나 봐요.”
“아…….”
“그러니까 전하께서 당신을 데려갔죠.”
마리엔은 고민했다. 우리 출퇴근길을 담당하는 마부가 오데트의 사람이란 사실을 말할까 말까.
“아예 당신이 말해준 계책을 전하에게 꺼내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이상해요. 당시를 떠올려보면 책잡힐 게 전혀 없었는데.”
여기까지 말한 바일레온이 “앗.” 하고 작게 소리 냈다.
“방금 나 말실수했죠?”
“으응, 네.”
“화 안 났어요?”
“제가요? 전혀요. 그리고 전하께선 벌써 다 알고 계시던걸요. 그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이 저인 거.”
바일레온이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단 거예요. 어디서 정보가 흘러나갔지.”
그는 오데트에게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바일레온은 머리가 좋다. 이대로 두면 마부의 비밀까지 어렵지 않게 알아낼 듯이 보인다. 굳이 마리엔 자신이 발설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더더욱, 마리엔은 마부의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던 마음을 바꿨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로판 커플 법칙 제1조. 상대를 위한답시고 진실을 감춰라.
사소한 것일수록 좋다. 작은 비밀을 감추려고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고, 결국 너희는 오해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
“실은 전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우리 출퇴근을 돕는 마부가 전하의 귀라고요.”
바일레온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그렇죠. 충격적이죠. 제가 요 며칠 마차 안에서는 자꾸 사담만 한 이유기도 해요.”
마리엔은 달리 생각해보면 정말 4황녀 전하다운 행동이 아니냐며 말을 이었다.
“고민하다가 지금에야 말씀드려요. 비어스 경은 제 황당무계한 말도 덮어놓고 믿어주시는데. 전 4황녀궁에서 들은 얘길 다 감췄어요. 죄…….”
“죄송하다고 말하면 키스할 거예요.”
마리엔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남은 빈 컵으로 입을 가렸다.
“농담……이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고 싶으면 죄송하다고 얘기해봐요.”
“그런.”
“지금 하면 내 첫 키스는 무지개 맛이겠네요.”
제 입안에 남아 있는 과일 맛이 갑자기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연히 바일레온의 입술에 눈길이 갔다. 부드러워 보였다.
‘닿으면 더 부드럽겠지.’
빨강, 주황, 노랑의 식용색소가 바일레온의 혀에 옮겨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첫 키스는 무지개 맛.
너무 강력한 대사에 마리엔은 이전에 하려던 말을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진짜, 진짜로 여기서.”
“죄송하다는 말만 안 하면 괜찮아요.”
“아.”
내가 왜 죄송하다고 하려 했더라?
“죄송하다고만 안 하면…….”
바일레온이 몸을 숙였다.
“다음에, 단둘이 있을 때…… 할게요.”
달콤한 저음이 마리엔의 귓가를 간질였다. 마리엔은 고장 난 인형처럼 말없이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바일레온이 엷게 웃으며 멀어졌다.
“내가 예전에 말했죠. 마리엔이 계속 죄송하다고 할 때마다 내가 너무 나쁜 놈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잘못은 제가 했는데 왜 경이.”
“어?”
마리엔은 깜짝 놀라 내렸던 컵을 다시 집어 들었다.
연인이자 상관의 충동적인 애정행각을 저지하라. 저지하라. 저지, 해야 한다. 너라도 정신 차려야만 한다. 꼬옥.
“지금 잘못했다고 한 거예요? 죄송하다는 말과 동급 아닌가.”
“아니에요. 둘은 완전 다르거든요?”
“이번만 봐줄게요.”
바일레온은 마리엔의 컵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놨다.
“내가 어떤 음험한 생각을 하는지 머릿속을 보여줄 수도 없고.”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우리 말을 옮긴 이가 마부란 거죠.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마리엔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왜 며칠간 비밀을 지켰는지 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도 마리엔이 묻기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예요.”
“역시…… 로판 법칙.”
이것 봐라. 연애 초반부터 제1조를 충실하게 따를 뻔했지 않나. 마리엔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앞으로도 웬만하면 그냥 속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바일레온처럼 생각이 깊은 나머지 몇 수 앞서가는 상대에겐 더욱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퍼즐이 다 맞춰졌네요. 전하께선 내 계책을 상당히 좋아하셨어요. 근데 그게 당신 머리에서 나온 거라면 얘긴 끝났죠.”
“저도 경처럼 골수까지 뽑아 먹히게 되나요?”
“네, 아마도.”
그래도 자기 첫사랑인데 내가 너무 악덕 업주처럼 말해버렸나. 그가 불편해할 줄 알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구나.
첫사랑은 첫사랑이고 그녀가 사람을 굴려먹음을 인지하는 건 별개구나.
상황 판단력만은 뚜렷하군요. 예, 다행입니다.
어차피 오데트의 눈에 들어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리엔이 실력 발휘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편이 낫다.
마리엔이 좋은 성과를 보여야 오데트 안에서 그녀의 가치도 올라갈 테니까. 바일레온은 그렇게 판단했던 거다.
“기왕 제 재능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마리엔은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식중독 사건이 좀 의심스러워요. 전 누군가 고의로 일으켰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어스 경 의견은 어떠세요?”
“실은 나도 같은 의혹을 품었어요.”
“통했다.”
마리엔이 생긋 웃었다.
“일이 터진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단 말이죠. 전원이 합숙소 생활을 하면 감염시키기도 쉽잖아요. 꼭 샐러드가 아니라도 가능해요.”
“하지만 우린 정확히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밝혀내지는 않을 거고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또 통했다.”
“이런 식이면 전하께서 마리엔을 영영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으, 그건 오싹한데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곳에 계속 머무르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위험 부담이 큰 화제다.
멀리서 시간을 죽이던 마부가 마차를 끌고 이쪽으로 오려고 했다. 바일레온은 마부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리엔이 속삭였다.
“마차 타시게요?”
“쉿, 나한테 생각이 있어요.”
그들 앞에 멈춘 마부는 별생각 없이 마부석에서 내려오려 했다.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바일레온은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들었다.
“재상부에 가서 일 좀 처리해주게. 디디 보좌관과 난 외근 후 바로 퇴근했다고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백작저까지 모셔드리고 나서 가지요.”
“아니네. 날도 좋으니 좀 걸을까 해.”
마부가 물었다.
“거리가 꽤 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쉬엄쉬엄 걷지.”
“……예, 저는 황궁으로 가보지요.”
마부는 다소 아쉬운 기색으로 자리를 떴다. 마리엔은 마차가 시야에서 멀어지길 기다렸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와, 멋지게 따돌리셨는걸요?”
“내가 저이보다 높은 지위라 그래요. 아무리 마부가 전하의 사람이라고 해도 지금 여기선 내가 주인이죠. 내 지시를 거스를 순 없으니까요.”
“덕분에 편하게 얘기하겠어요.”
그들 앞으로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갔다.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리엔은 자기도 은근슬쩍 바일레온의 팔짱을 끼고 싶어졌다. 보는 눈이 많은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복동생을 엿 먹이고 싶은 황태자의 짓일까요? 아니면 2황자의 자작극? 최종 점검자로 비어스 경을 선택한 게 마음에 걸려요. 평소에 경과 별 교류도 없었으면서.”
“이런 냉정한 평은 좀 그렇지만요.”
바일레온이 운을 뗐다.
“황태자에겐 집단 식중독까지 떠올릴 만한 머리가 없어요. 식중독은 그에게 너무 어려워요. 만일 일을 망치려고 했다면 차라리 합숙소에 불을 질렀을 거예요.”
뭔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차분하게 독설을 뱉는 게 아닌가.
“무식하고 폭력적이라는 거네요.”
“무척이나요.”
“그럼 2황자 자작극으로 무게가 실리는데요.”
은폐하기에도 다시 새로이 준비하기에도 힘든 상황을 만들어놓고, 바일레온에게 최종 점검을 맡겼다.
과연 궁지에 몰린 준비위원회에서 실책을 인정할 용자가 나올 것인가.
나온다고 한들, 축제가 고작 사흘 남은 시점에 뭘 할 수 있겠는가.
“미남 선발대회로 방향을 아예 틀 줄은 짐작도 못 했겠죠…….”
바일레온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정말 마리엔만이 내놓을 수 있는 아이디어였어요. 온갖 교활한 수단을 생각해내는 아나이스 사제조차 생각 못 했을 거예요.”
“그래도 2황자가 형보다 머리를 잘 쓰긴 했어요.”
마리엔이 말했다.
“우리가 수습에 실패하면 경과 준비위원회에 책임을 뒤집어씌울 테죠. 문제를 해결하면 본인이 칭송을 날름 먹을 거고요. 짜증 나.”
그래서 말인데, 하고 바일레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