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54)
순간 질문 하나가 마리엔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제국의 꽃 선발대회에 수영복 심사가 있던가?’
원래라면 없을 것이다.
아까 회의실에서 이것저것 들은 바에 따르면 제국의 꽃으로 뽑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영예였다.
우선 1, 2, 3위는 화려하게 꾸며진 개방형 마차를 타고 도심을 행진하게 된다.
마차 앞뒤로 관악대와 기예단이 따라가며 이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퍼레이드의 끝에는 황궁에서 나온 시종장과 수도의 시장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의 축하 속에서 세 미인은 상당한 상금을 전달받고, 시종장을 따라 황궁으로 간다.
황제 알현, 귀빈 대접, 이후에 가을쯤 열리는 황궁 무도회에 초대받기까지.
귀족이라 해도 신분이 낮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을, 오로지 제국의 꽃으로 뽑혔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거다.
위와 같은 이유로 평민 아가씨뿐 아니라 귀족 영애들 역시 이 행사에 많이 참가한다고 들었다.
‘애초에 수영복이 없는 세상이야. 그러니 수영복 심사가 가능할 리 없지. 이들에겐 속이 훤히 비치는 잠옷 차림으로 올라가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하지만 이번에는 미녀가 아닌 미남 선발대회다. 무대에 올라가는 이들이 남자라면 좀 더 벗길 수 있지 않을까.
수영복까지는 아니라도 상의 탈의 정도는 고려해봄 직하지 않나.
그것이야말로 세계의 평화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는 길이 아닐까. 특히 여성 동지들의 근심과 피로를 잠시나마 덜 수 있다면.
‘……정신 차리렴, 마리엔 디디.’
마리엔은 바지에 다리를 넣고 꿰맸나 싶을 만큼 타이트한 가죽바지 차림의 바일레온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반대해요?”
바일레온이 물었다.
“제가 심사위원이잖아요. 게다가 전 경과 사귀는 사이고요. 비어스 경이 참가하시면 심사의 공정성이 무너져요.”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에요?”
“일단 이게 대외적인 이유예요.”
마리엔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바일레온은 의외로 너무 이성적인 대답을 들어서 기분이 좀 안 좋아졌나 보다. 미소 걸린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그는 그럼 대외적이지 않은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다.
“물에 젖은 비어스 경의 몸을 남에게 보여줄 수 없어요.”
“어째서요?”
“정말 몰라서 물으세요? 비어스 경의 몸은 뽀송뽀송한 채로 봐도 엄청난데, 거기다 물까지 끼얹으면 큰일 난다고요. 제국 여자들의 희번덕이는 시선이 경의 몸에 달라붙을 걸 생각하면…….”
“화가 나요?”
“당연하죠!”
마리엔이 걷다 말고 발을 쿵 굴렀다.
“다른 미남이 무대에서 옷을 벗건 물구나무를 서건 옷을 벗은 채로 물구나무를 서건 상관없는데요.”
바일레온이 조용히 “그건 좀.” 하고 중얼거렸다.
“비어스 경은 안 돼요. 경은 늘 하던 대로 목 끝까지 단추 채우고 재상부에 곱게 앉아 계세요.”
“생각보다 굉장히 보수적이군요, 마리엔은?”
그렇게 묻는 바일레온은 왠지 기쁜 듯한 표정이었다.
“관중들은 앞으로 나와 엮일 일도 없는, 모르는 사람인데도요?”
“그렇다니까요. 근데 왜 자꾸 물으시는 거예요? 남들 앞에서 벗고 싶으세요?”
바일레온이 웃었다.
“당신이 질투하는 건 처음 봐서요.”
마리엔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질투라니. 그런 오글오글한 표현 대신 독점욕처럼 힘이 빡 들어간 말을 써주면 안 될까.
질투라니. 내가 뭐 위대하신 오데트 전하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질투할 리가.
그리고 그걸 바일레온의 육성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냥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질투하는 거 아닌데요.”
“그래요?”
“네, 전 그저 비어스 경의 등장만으로도 금세 빛을 잃게 될 다른 참가자들이 걱정되기도 하고요. 비어스 경의 단정한 모습이 좋기도 하고요. 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으음, 잘 알았어요.”
바일레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질투할 땐 속이 쓰리기만 했는데, 이게 입장이 바뀌니까 다르군요. 자꾸 웃음이 나오고 당신이 귀여워 죽겠네요.”
“또, 또 질투라고……!”
“미안해요. 취소. 취소.”
바일레온이 양손을 들고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남들 보기엔 별것 아닌 일로 둘만 심각한지 모른다. 어쩌면 심각한 건 마리엔 혼자만일 수도 있다. 바일레온은 확실히 너무 행복해 보이니까.
“한데 마리엔.”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몸이 뽀송뽀송해도 엄청나다는 건 어떻게 알아요?”
“그건 저번에 집무실에서 옷…….”
마리엔은 갑자기 목이 간지러운 척 기침을 해댔다.
절대 파티션 구멍 너머로 몸을 훔쳐봤다고 고백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바일레온은 연인의 등을 다정히 쓸어주며 괜찮냐고 물었다.
“크흠, 큼, 네, 괜찮아요.”
마리엔은 열심히 문장을 만들어냈다.
“집무실이든 저택이든 옷을 입고 있을 때도 경은 몸태가 드러나니까요.”
“내가 옷을 너무 타이트하게 입는 것 같아요?”
“아, 아뇨. 막 일부러 크게 입으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이 딱 좋아요.”
다른 사람이 못 보게 하려다가 마리엔 자신의 안구 복지까지 놓칠 판이다. 마리엔은 얼른 부정했다. 다행히 바일레온은 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비어스 경은 제가 이렇게 독점욕을 드러내는 게 좋으세요?”
“솔직히 말할까요?”
바일레온이 돌연 목소리를 깔았다.
“당신이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우겠다고 해도 기쁠 거예요.”
족쇄라니.
마리엔은 반짝반짝 청량한 여름 나무 같은 연인을 쳐다봤다.
“취향이 엄청 하드하시네…….”
이건 뭐 한 사람에게만 종속되길 기다려온 노예도 아니고. 마리엔은 그저 웃기만 하는 바일레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이런 보물은 치마폭에 꽁꽁 감춰둬야 한다.
나랑 상관없는 미남들 옷이나 벗겨야지.
◇ ◆ ◇
광활한 북부를 다스리는 블랙우드 공작가의 가주.
거기다 신화 속 영웅이 부럽잖은 힘까지 지녔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건 카인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카인 블랙우드는 어려서부터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성미였다.
언젠가부터, 그는 재상부의 분홍 머리 미친 토끼가 갖고 싶었다.
‘처음엔 분명 괘씸함이었어.’
겁을 상실하다 못해 미친 짓을 일삼는 마리엔 디디가 대단히 거슬렸다. 마리엔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유의 인간이었다.
마리엔 이전에도 카인을 열 받게 만들려는 시도는 꾸준히 존재해왔다. 다들 철혈 공작을 두려워하면서도, 결함이라곤 없는 오만한 공작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길 기대했다.
남들이 카인의 추락을 바라는 이유는 제각기 달랐다.
제각기 다르되 죄다 뻔했다.
선대 공작이었던 친부가 ‘앞으로 네가 들을 말’이라며 미리 일러준 것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마리엔 디디, 그 미친 토끼가 기상천외한 이유를 내놓은 것이다.
“네가 재수 없는 흑발이라서.”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디 그뿐인가. 마리엔은 넌덜머리 난다는 투로 내뱉곤 했다.
“북부에서 온 냉혹한 흑발 공작이라니 완전 짜증 나!”
‘고작 그런 이유로 나한테 적의를 품는다고?’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기인 취급하며 편히 넘어갈 순 없었다. 마리엔 디디는 성가신 날파리처럼 끊임없이 제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 순간 카인은 마리엔이 그렇게 행동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해졌다.
마리엔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카인은 곧 이유를 알게 됐다.
바일레온 비어스를 위해서.
정확히 말하면 4황녀를 향한 바일레온의 짝사랑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멍청한 토끼는 4황녀 옆에서 카인 자신을 찍어내기만 하면, 황녀가 바일레온의 손을 잡아줄 거라 믿었나 보다.
근데 희한하게도 그 멍청한 한결같음이 카인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내가 바일레온 비어스보다 뭐가 부족해서?’
왜 마리엔 디디는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하는 바일레온의 짝사랑을 혼자 응원할까?
그런 맹목적인 지지와 애정을 받는 건 어떤 기분이지?
대체 내 머리카락에 관한 비밀은 어떻게 안 거고, 왜 그 정보를 남에게 팔지 않지?
심지어 마리엔은 본인의 우상 바일레온에게도 완전히 털어놓지 않은 듯했다.
‘네가 거슬리고 궁금해.’
그와 동시에 의기양양한 기세를 꺾어주고 싶었다.
시작은 바일레온처럼 쓸데없이 다정한 인간을 좋아했지만, 결국엔 오만하고 냉혹한 북부 공작에게 끌리고 말았다고.
분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고백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절 그토록 혐오하던 마리엔의 입에서 나올 고백. 그걸 듣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할까. 상상만으로도 희열이 밀려왔다.
‘공작성의 하녀로 데려가자. 마리엔 디디가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협박거리를 찾아내면 가능해. 일단 그렇게 공작성으로 데려가서, 내 방식대로 길들이면 돼.’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게 있었다.
오랜 짝사랑에 체념해 있던 바일레온이 마리엔에게서 새로운 빛을 발견한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절대 행동파는 못 된다고 놈을 얕잡아 본 게 실수였다.
마리엔과 바일레온,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바로 자신이 격분해 연못에 처박은 로켓 목걸이가 계기였다.
‘상황이 이따위로 전개될 줄 알았으면 그때 목걸이를 안 던지는 건데.’
카인은 지그시 이를 갈았다. 바람에 날아온 광고지가 검은 구둣발에 차였다. 원래도 안 좋던 카인의 표정이 더 나빠졌다.
‘이젠 하다 하다 싸구려 광고지까지 내 앞길을 가로막나?’
평소라면 발을 대충 털어버리고 지나갔을 것이다.
한데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광고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발치의 종이를 주웠다. 펴 들자마자 인상이 찡그려졌다.
누가 봐도 여자들을 공략할 목적의 광고였다. 화려한 프레임 속에 인쇄된 ‘제국의 꽃 선발대회’ 글귀를 본 카인은 즉시 광고지를 구겨버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광고지 하단에서 아주 익숙한 동시에 절대 흔치 않은 이름을 본 것 같았다.
과연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카인은 특별심사위원 소개에서 마리엔 디디의 이름을 찾아냈다.
“왜 재상 보좌관이 미인대회 심사를 하는 거지?”
카인은 광고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여름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의 꽃 선발대회가 사상 최초로 남자 지원자들을 받는 모양이었다.
당신만을 위한 미청년이라느니,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충격적인 무대 연출이라느니. 광고지 너머의 타깃을 자극할 온갖 문구를 때려박아놨다. 발상부터가 마리엔 그 미친 토끼다웠다.
카인은 한동안 무시무시한 얼굴로 광고지를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걷다가 눈길이 닿은 광장 게시판에는 아까와 사뭇 다른 느낌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사실 카인은 우스꽝스러운 발상이라 생각했다. 어떤 남자가 여자 관중에게 자길 예쁘게 봐달라며 아양 떨고 싶겠나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꽤 많은 젊은이가 게시판 앞을 서성였다. 내가 나가니 네가 나가니 요란하게 떠드는 자도 있었으나, 제법 진지한 얼굴로 참가 자격을 정독하는 청년도 제법 있다.
그런 대회에 관심을 보일 만큼 썩 준수한 외모들이었다.
‘넌 내가 북부 출신에 재수 없는 흑발이어서 싫다고 했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불현듯 카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일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