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56)
참가자 자기소개가 10번대로 넘어갈 때쯤, 마리엔은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까 3번 바렐 에버그린 말인데요.”
하필 이름도 바일레온이랑 비슷한 어감이람.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다.
“신분증 검사는 제대로 한 거죠?”
“물론입니다. 혹시라도 최소인원을 못 채울까 봐 가슴 졸이긴 했어도, 저흰 규정에 따라 진행했답니다.”
“네, 그러시겠죠…….”
“정말 돋보이는 후보지 않습니까? 아무리 수수하게 입어도 매력이 감춰지지 않아요. 이따 빗속을 지나가는 무대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안경 남자는 대회장에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울려 퍼질 거라며 장담했다.
마리엔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북부 놈 성격에 이런 대회에 출전할 리 없지. 어떤 남자가 여자들 앞에서 교태 부리고 싶겠냐고 비웃을 게 분명해.’
마리엔의 시선이 무대 한쪽에 서 있는 3번 참가자에게 닿았다. 단순히 목소리가 좀 비슷한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마지막 참가자인 25번의 소개가 끝날 즈음, 관중석에선 차가운 레모네이드와 아이스티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며 오후의 태양보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다음 무대는 안경 남자가 기획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빗속을 걸어가기’였다.
“예, 여러분. 지금까지 스물다섯 명의 참가자 소개를 보셨습니다. 이제 다음 무대 ‘빗속의 그대’가 이어집니다!”
왼쪽 줄의 미남들과 오른쪽 줄의 미남들이 서로 한 명씩 엇갈리며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천천히 움직일 동안 그늘 하나 없던 무대 위로 간이 지붕이 생겼다.
갑자기 관현악단의 연주가 박진감 넘치는 분위기로 변했다. 무대를 주시하고 있던 누군가가 저것 보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시작이었다.
“꺄악!”
박스 너머로 참가자들이 탈의하는 실루엣이 생생하게 보였다. 곳곳에서 박수와 비명과 흥분으로 가득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리엔은 무대에서 일 초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안경 남자를 다급히 불렀다.
“우리 대회는 모든 연령대 입장 가능 아니었나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마리엔의 눈이 커졌다. 상의만 벗는 줄 알았더니 하의도 저기서 벗어?
“저, 저, 저래도 되나요? 아까 관중석에서 임신부도 본 것 같은데.”
“완벽한 태교로군.”
여자 위원이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마리엔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의견 전달과는 별개로 막간의 무대를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저기 열네 살 소녀도 앉아 있단 말이에요! 공연의 음란성 뭐 그런 거에 걸리지 않나요?”
“안심하십시오, 보좌관님. 실루엣만 저렇게 보일 뿐이지. 다들 옷을 제대로 입고 있습니다. 우려하시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 그런가요.”
마리엔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우려하시는 상황? 내가 우려하는 게 뭐지?
순간 참가자 중 누군가 실수로 무대장치를 건드려서, 얇은 판이 쓰러지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무대장치.
환한 햇빛 아래 드러난 스물다섯 개의 엉덩짝.
“으어어어어어…….”
“안심하세요, 보좌관님. 이제 막간도 끝났습니다. 다들 들어갑니다.”
“으어어…… 아니, 벌써요? 얼마나 했다고.”
빠라빠빠 빰!
마지막 연주음에 맞춰 참가자들은 박스 너머로 옷을 던졌다. 거의 전쟁터에 맞먹는 함성이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벌써 실신한 아가씨가 나왔다는 소식에 의료진이 해당 구역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각성용 소금을 코밑에 들이대기도 전에 아가씨는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실신의 진위를 의심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마리엔은 아가씨가 깨어난 타이밍이 상당히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때마침 연주곡이 바뀌면서 커다란 장막이 무대 절반을 가렸기 때문이다.
드르르륵, 착.
드르르륵, 착.
장막 너머에서 진행요원들은 다음 무대를 준비한다.
하지만 눈 감고 있는 사람 귀엔 무대장치 바꾸는 소리가 참가자들이 다시 나오는 신호로 들릴 수 있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라서 의상 준비가 아주 수월했답니다. 스물다섯 벌 세트를 단 두 시간 만에 확보할 수 있었지요. 물론 참가자들도 금방 갈아입을 수 있고요.”
안경 남자가 동그란 무테안경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황자가 참관 중인 자리. 다양한 연령대의 관중 앞에서 막간 깜짝쇼며 빗속의 행진 같은 무대를 태연하게 진행하는 남자.
마리엔은 이 남자를 위험인물로 취급해야 할지, 흙 속에 묻혀 있던 진주 대우를 해야 할지 몹시 헷갈렸다.
그러다가 문제의 무대가 시작됐다.
간이 지붕과 검은 장막이 동시에 걷히며 흩날리는 빗줄기 사이로 참가번호 25번이 나타났다.
“이번엔 역순으로 가나요.”
“네네.”
본인이 기획한 무대에 도취된 안경 남자 대신 콧수염 남자가 대답했다.
마리엔은 자못 엄격한 표정으로 비에 젖어가는 미남들을 지켜보았다. 미남들은 무대 앞까지 걸어온 후에 포즈를 취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21번처럼 능숙하게 관중 호응을 유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18번처럼 걷는 것부터 뚝딱거리는 이가 있었다.
그래도 18번은 수줍은 미소와 예쁜 엉덩이라는 무기를 앞뒤로 장착한 참가자였다. 고로 관중들 눈에 다소 어색한 워킹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 어…… 아유, 저런.”
“어떡해!”
“아프겠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무대를 활보해도 괜찮을까.
안경 남자는 신발 밑창에 미끄럼 방지약을 칠하면 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결국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포즈 취하는 지점에 이르기 직전, 11번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 거다. 쿵, 넘어지는 소리가 관중석까지 들렸다.
자칭 무릎 꿇기 전문가인 마리엔이 추측건대 시커먼 피멍이 최소 2주는 갈 것이다.
“으허억!”
안경 남자에게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방금까지도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였다. 하지만 2황자 눈앞에서 벌어진 현장 사고에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다음 순간, 비극적인 자세로 무릎 꿇고 있던 11번이 물에 젖은 셔츠를 잡아 벌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얀 단추가 투두둑, 뜯겨나갔다. 큼직한 근육으로 덮인 두꺼운 흉통이 드러났다.
“어머, 어머, 어머.”
“오오오!”
11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기 머금은 셔츠를 벗은 다음, 뒤로 돌아 셔츠를 비틀어 짜는 퍼포먼스를 보인 것이다.
“잘한다! 잘한다!”
“힘내라!”
인상적인 등근육에 관중들이 환호를 보냈다.
마리엔은 참가자 전원이 가지고 있는 근육보다도, 활짝 드러난 11번의 겨드랑이가 깨끗한 점에 주목했다.
11번의 머리카락은 푸르스름한 빛마저 도는 흑발이다. 제모를 안 했다면 근육질 몸매는 뒷전이고 무성한 검은 숲부터 눈에 꽂혔을 텐데.
마리엔은 그의 매끈한 겨드랑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흑발은 취향이 아님에도 당신은 인정합니다.’
매너 점수 추가.
한편 마리엔 옆의 심사위원들도 분주히 의견을 나눴다.
“의도한 바였을까요?”
“무릎 찧는 소리가 컸는데……. 그에 비해 넘어진 최종 자세는 그리 흉하지가 않았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연출인가? 아니면 임기응변인가?”
“저흴 헷갈리게 할 만큼 잘했으니까 이 부분은 추가 점수를 주는 수밖에 없네요.”
위기를 기회로 바꾼 11번. 그는 몸을 비틀어 다시 한번 깨끗한 겨드랑이를 노출한 후에 제자리로 걸어갔다.
마리엔은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대회 시작 당시 잘그락거리던 얼음물은 어느새 평범한 냉수로 바뀌어 있었다.
안경 남자는 차마 2황자의 귀빈석을 쳐다볼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그러나 마리엔은 다르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뭐 어때. 세계관 최강자이자 제일 무서운 사람이 내 고용준데.’
오데트는 여전히 무섭다. 하나 자신은 그런 오데트의 지명을 받았다. 마리엔은 사자의 위세를 빌려 우쭐거리는 여우의 기분을 만끽했다.
‘어느 놈이야?’
마리엔은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귀빈석을 쳐다보자마자 레슬리 아나이스 사제와 눈이 마주쳤다.
레슬리의 입가에 교태로운 미소가 번져갔다.
‘음란한 사이비 종교인.’
마리엔은 레슬리의 미소에 화답하지 않았다.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 무대를 쳐다봤다. 그 때문에 자신이 시선을 거두자마자 2황자도 이쪽을 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녀가 아닌 미남을 뽑자. 그 해결책 내놓은 계집애인가?”
“어엿한 스물두 살 보좌관입니다. 계집애라고 하기엔 다 컸지요. 그리고 네, 전하께 말한 이는 비어스 재상이나 실은 저 귀여운 자매님의 제안이었다는군요.”
레슬리가 소맷단을 매만졌다.
“믿을 만한 정보원이 알려준 것입니다.”
“비어스가 원래 아랫사람을 싸고돌긴 하지.”
“한데 저 자매님을 단순히 아랫사람이라고 하기엔…….”
레슬리는 말끝을 흐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2황자가 냉큼 말뜻을 알아들었다.
“비어스가 여자를 갈아탔군.”
“전하의 누이 되시는 분은 뭐랄까. 성정이 어지간히 서늘하셔야 말이죠. 그런 분을 10여 년이나 흠모했다니 비어스 재상도 보통 인물은 아닙니다.”
“의뭉스러운 계집.”
2황자가 경멸 어린 투로 내뱉었다.
“제깟 게 보석과 공단으로 치장해봤자 더러운 피가 어디 가겠어? 어미가 외국 출신에 몸 파는 여자였잖아. 밀정이란 표현도 과분하지.”
2황자는 오데트의 친모를 신랄하게 깎아내렸다. 순간 레슬리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표정엔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2황자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전하의 누이분이 확실히 속내를 잘 감추시긴 하지요.”
“볼 때마다 영 맥을 못 추는 상탠데 말이야. 희한하게 목숨이 질겨. 솔직히 이렇게까지 오래 살 줄은 몰랐거든.”
“황궁 생활이 체질이신가 봅니다.”
2황자가 기가 막힌 농담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떨며 웃었다.
“아무튼 저 분홍 머리도 주시해야겠군. 아나이스, 자네가 그 좋은 머리 좀 굴려봐. 저걸 이용해서…….”
“디디 보좌관이요.”
“저것 이름이 디디인가? 그래, 하여튼 저 분홍 머리를 어떻게 해야 4황녀 측에 내분이 일어날지 생각해보라고.”
“예, 전하.”
이윽고 2황자는 남자가 득시글대는 무대 대신 관중석을 지그시 구경하기 시작했다.
황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희생양을 고르며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레슬리는 그에게 더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 ◆ ◇
곧 심사위원끼리 의견을 취합할 시간이었다. 마리엔은 자신이 매긴 점수표를 내려다봤다.
‘이만하면 제법 공정하게 매긴 것 같은데.’
옆에서 마리엔의 점수표를 흘깃 본 여자 위원이 물었다.
“보좌관님은 3번 참가자가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네?”
“합계 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