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57)
“아…….”
화려한 표시라니. ‘표시’처럼 보여서 다행이다. 마리엔은 3번 옆에 해놓은 낙서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 종이라도 달라고 해서 거기다 끄적이는 건데.
“전 3번을 1등으로 정했답니다. 보좌관님도 의견을 같이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마리엔은 언뜻 번개처럼 보이는 낙서를 보다가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아, 1등으로 미시게요?”
“그 커다란 손으로 바이올린을 섬세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딱 와닿더군요. 게다가…….”
“마지막에 보여줬던 미소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콧수염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 말을 하시려 했지요?”
“대회 내내 한 번도 안 웃다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다니. 휴, 그런 건 반칙이에요.”
여자 위원은 세상에서 제일 흐뭇한 반칙을 목격한 양 웃었다.
‘네, 저도 그 미소를 보긴 했네요.’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걸리자 3번은 인상이 확 달라졌었다.
‘훨씬 더 자주 웃으면 좋을 텐데.’
마리엔은 다시 번개 모양 낙서로 시선을 떨궜다. 번개처럼 보이지만 실은 흉터를 뜻하는 그림이었다.
마리엔은 빗속의 그대 무대를 떠올렸다.
3번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마리엔 자신이 괜히 긴장됐다. 손가락 사이로 펜을 휙휙 돌리다가 옆자리 위원이 쳐다보기 전에 멈췄다.
결국 3번 차례가 됐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갈색 머리를 쓸어올리며 3번이 등장했다.
왜 악기상이 저렇게까지 몸이 좋아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렐 에버그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했다.
북부 놈과의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는 남자다. 한데 어째서 이토록 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일까. 마리엔은 그의 턱선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응시했다.
카인의 등에 가득하던 상흔.
혹시 3번의 등에도 울퉁불퉁하게 아문 상흔이 가득할까?
마리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때 3번이 뒤를 돌았다.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느리게 푼 그는,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 등을 노출했다.
3번의 등은 깨끗했다.
마리엔은 3번 이름 옆에 그린 무수한 흉터 옆에 가위표를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람.’
3번이 어깨 너머로 심사위원석을 넘겨다 보았다. 스치는 시선 끝에 마리엔이 있었다. 마리엔은 왠지 지기 싫은 기분이 되어 3번을 빤히 응시했다.
“크흠.”
옆에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엔은 현실로 돌아왔다.
콧수염 남자는 3번도 좋지만, 자신의 선택은 11번이라고 거듭 말했다. 11번은 아까 미끄러운 무대에서 넘어졌던 참가자였다.
“등장부터 관중 호응이 좋았던 후보지 않습니까. 장기자랑 땐 무대를 완전히 장악했고요.”
안경 남자가 동료의 말을 받았다.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면 귀부인들이 아주 좋아하실 상이에요.”
백마 탄 왕자님 스타일이 아니라 유독 고기와 흰 빵을 많이 배급받는 하인 느낌이라는 말을 저런 식으로 하다니.
마리엔은 안경 남자의 내공이 심상치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11번으로 마음이 기울긴 하는데요…….”
여자 위원이 펜 끝으로 점수표를 톡톡 두드렸다.
“저도 11번을 높이 평가하긴 했어요.”
“11번을 1위, 3번을 2위로. 이렇게 어떻습니까?”
“그럼 3위는 그 참가자가 되나요? 잠시만요. 이름이 뭐더라…….”
심사위원들이 서로 의견을 나눴다. 마리엔은 숫자로만 말하겠다면서 자신의 점수표를 그들 앞에 밀어놨다.
“의견 정리되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업무 태만이 아니다. 스물다섯 명 중에 누굴 뽑아서 황궁으로 보내든 안 부끄러울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참가자 모두가 뛰어났다.
‘제국의 미래는 밝구나.’
마리엔은 가만히 참가자들의 나이를 떠올렸다.
‘전쟁이 터지지 않도록 하자.’
심사위원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3번과 11번의 순위는 거의 확정인 모양이다.
또 흑발이 1위를 해?
또 갈발이 2위를 한단 말이야?
마리엔은 공식처럼 익숙한 구도가 영 불편해졌다.
하지만 11번의 외모며 재주, 위기 전환능력 어디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11번은 흑발이지만 북부 놈처럼 세상을 내리깔아 보지 않았다.
‘게다가 바렐 에버그린은 왠지 모르게 찜찜해.’
그는 자신이 여태 본 갈발 중에서 제일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럼 이대로 확정입니다?”
콧수염 남자가 마지막으로 의견을 확인했다. 마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2황자 측은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1, 2, 3위로 뽑힌 참가자들은 퍼레이드를 준비하러 갔다. 관중들까지 거의 빠져나간 대회장. 마리엔은 위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특별심사위원으로서의 공식 업무는 여기까지다.
위원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왔다.
“보좌관님 덕분에 오늘 대회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좌관님만 괜찮으시다면 이후에 또 심사위원으로 모셔도 될까요?”
큰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마리엔은 퍽 너그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남 선발대회 때만 불러주세요!”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구경하는 것은 즐겁다. 하지만 제국은 사람들에게 좀 더 자주 미남 관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대회 진행 내내 이 같은 마리엔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여자 위원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대회 반응이 워낙 좋아서요. 안 그래도 저희끼리 선발 대상을 번갈아 가며 열어야 하지 않나,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참입니다.”
마리엔은 흐뭇해하며 다시 한번 인사를 돌렸다.
이제 업무는 끝!
그리운 내 님에게 달려갈 시간이다. 마리엔이 흥얼거리며 소지품을 챙겼다. 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마리엔 디디 심사위원님?”
마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퍼레이드 행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바렐 에버그린이 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엔의 코가 저절로 움직였다.
싸늘한 겨울의 눈밭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음, 무슨 일이죠?”
“점수표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바렐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순위 욕심은 없어 보였는데 이 또한 자신의 착각이었나. 마리엔은 그가 순위 때문에 항의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다.
“보여줄 순 있어요. 그렇지만 나 때문에 당신이 1위를 못 한 건 아니에요. 두 남자분이 11번 참가자를 강력하게 밀었고…….”
바렐이 마리엔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럼 디디 위원님은요?”
의외로 성미가 급하네. 마리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퍼레이드 준비가 늦어지는 데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다.
“아뇨, 바보 같은 행진 따윈 상관없습니다.”
“바보 같다뇨……. 지금 당신이 안 가면 출발 자체를 못 할 텐데.”
“기권했습니다.”
바렐이 알 수 없는 소릴 했다. 마리엔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기권했다고요?”
“예, 그래서 3위가 자동으로 2위가 됐고, 그다음으로 합계 점수가 높았던 참가자가 3위 마차를 탔습니다. 저쪽 현장은 신경 쓰지 마시고.”
바렐이 손을 내밀었다.
“점수표 좀 보겠습니다.”
“남 생각은 좀체 안 하는 이 태도, 상당히 익숙한데…….”
마리엔은 바렐의 아래위를 훑었다.
“근데 점수표는 왜요?”
“당신이 내 점수를 어떻게 매겼는지 궁금해서요.”
“형편없이 매겼다면?”
“그랬다면 내가 2위까지도 못 했겠지.”
마리엔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이것 봐라. 가만 놔두니까 은근슬쩍 말이 짧아진다.
“사실 점수표는 지금 내 손에 없어요. 다른 심사위원들 것까지 수거해 갔거든요. 아마 이번 대회 자료로 보관해둘 테죠.”
정 보고 싶으면 위원회에 정식으로 열람 신청을 하라고 말할 셈이었다.
바렐은 거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른 인간들 점수 같은 건 안 궁금해요. 당신, 마리엔 디디 당신이 나한테 몇 점을 줬는지 그거나 말해.”
“빵점 줬다 왜?”
마리엔이 인상을 북 썼다. 바렐은 웃기지 말란 듯이 거리를 좁혔다. 상황이 자기 마음대로 안 돌아가면 체구로 위협부터 하고 보는 태도. 역시 익숙했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빵점 줬다니깐? 근데 지금 와서 후회되네. 왜 마이너스 점수는 없는 거지?”
“마리엔 디디 심사위원님.”
으르듯한 말투에 마리엔이 눈을 치켜떴다.
“합계 점수 84점! 됐어?”
“……고작?”
바렐이 미간을 찡그렸다. 마치 태어나서 84점 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점수로 쳐주나, 하는 얼굴이다.
마리엔의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고작이라니. 굉장히 후하게 준 거거든? 이 덩치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데 듣기 제법 근사했단 말이지.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는 소리도 안 하고. 그래서 매너랑 재능 점수 잘 줬는데.”
체격 차로 압박하면 어디 깨갱, 할 줄 알고?
마리엔은 어림없다는 양 등을 꼿꼿이 세웠다.
“이제 보니 당신은 입이 화근이었어. 대회 내내 과묵해서 내가 84점이나 줬던 거야.”
“비어스와는 잘만 떠들면서.”
돌연 바렐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내가 바일레온과 잘 떠드는 걸 네가 어떻게 아냐. 그렇게 따져 물을 새도 없었다.
바렐이 귀밑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얼굴 가죽을 뜯어냈다. 즈윽,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마리엔은 눈앞에서 벌어진 도시 괴담 같은 일에 기겁했다.
그러나 더 기겁할 일은 따로 있었다.
벗겨진 얼굴 가죽 아래 상대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갈색 머리, 갈색 눈이지만 그는 카인 블랙우드였다.
“뭐야…….”
마리엔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네가 어떻게, 아니, 네놈이 왜 제국의 꽃 선발대회에……. 바렐 에버그린은 뭐야. 실존인물이긴 해?”
여기까지 주절거린 마리엔이 입가를 틀어막았다.
“죽였구나!”
카인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죽였지? 그러고는 신분증을 빼앗았지?”
“하여튼 넌 망상이 너무 심해.”
카인은 에버그린의 신원을 빌렸을 뿐이라고 했다. 무고한 사람이 안 죽었다니 다행이다. 하나 마리엔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변장을 하면서까지 제국의 꽃이 되고 싶은 건데…….”
혹시 꽁꽁 숨겨왔던 어릴 적 꿈이 제국 최고의 미남 타이틀이었나. 마리엔은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거라면 카인 블랙우드로서도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는 명성이다.
“내가 원래 모습 그대로 참가했다면 넌 내게 몇 점을 줬을까? 대답해봐.”
“몇 점은 무슨. 빵점이라니까, 빵점. 탈락 안 시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한데 오늘 넌 나한테 84점을 줬단 말이지.”
마리엔은 슬슬 짜증이 났다.
“하고 싶은 말의 요지가 뭐야?”
“넌 날 그리 싫어하지 않아. 네가 날을 세우는 건, 북부 출신의 흑발에 대한 네 편견 때문이다.”
“헛소리도 참 정성껏…….”
“괘씸한 마리엔 디디, 난 널 꺾어야겠어.”
갈색 머리에 갈색 눈으로 변장했다고 해서 광기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카인은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이를 갈았다.
“내게 이런 모욕을 준 여자는 네가 처음이니까.”
순간 귀를 의심할 만큼 클리셰적인 대사가 나왔다.
“미친 토끼 네가 분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나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는 모습을 봐야겠어.”
“야.”
“내가 너무 싫지만 날 좋아한다고.”
“저기요, 아저씨.”
“두고 보라고.”
“너…… 있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