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62)
휴고의 긴 다리와 민첩함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순식간에 문으로 달려간 그는 몸으로 집무실 문을 막았다. 1센티미터 정도 열렸던 문이 쿵, 소리와 함께 닫혔다. 이어서 잠금쇠까지 달칵 누른 그가 입술만 벙긋거렸다.
상자 덮으세요!
마리엔은 얼른 상자 뚜껑을 닫았다. 커다란 천을 위에 덮어 다시 원형 탁자로 위장했다. 휴고가 달려와 한쪽으로 쏠린 천을 최대한 바로잡았다.
“디디 보좌관……?”
바일레온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무슨 일 있어요?”
“어…… 아, 아뇨! 무슨 일은 아니고요.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마리엔이 휴고를 쳐다봤다. 바일레온에게 안 들리게 하느라 목소리를 줄여야 했다.
“근데 우리 문 잠그고 뭐 했다고 하죠?”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휴고가 문 쪽을 곁눈질했다.
“이 상황에서 트집 잡으려는 건 아니지만요. 방금 보좌관님 말씀이 좀 묘하게 들렸습니다. 비어스 경 앞에선 단어 선택에 주의하셔야겠습니다.”
“어떡하지.”
마리엔이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떠오르는 핑계마다 부적절한 것 같았다. 종국엔 ‘휴고 해고’라는 네 글자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생각났어요.”
“뭐죠?”
“깜짝 선물 준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 열게요.”
거기까지만 들은 휴고가 바로 문을 열었다. 마리엔은 책상 옆에 어정쩡하게 선 자세로 바일레온을 맞았다. 이 좁아터진 집무실이 오늘따라 참으로 분주하다.
“비어스 경, 어쩐 일이세요?”
마리엔이 밝게 물었다. 바일레온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지나 휴고에게 옮겨갔다.
‘내 얼굴과 휴고는 그렇다 쳐도 머리는 왜?’
마리엔은 자연스럽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척하며 머리를 더듬어봤다.
산발까지는 아니고 그냥 좀 많이 헝클어진 정도였다.
‘혼자 난리 치다가 이렇게 됐나 봐.’
부디 바일레온이 이상한 의혹을 품고 괴로워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디디 보좌관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자넨 나가보게.”
“알았습니다.”
휴고가 마리엔을 슬쩍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서 마리엔을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 그리고 미처 숨기지 못한 안도가 묻어났다.
‘탈출할 수 있어서 좋겠다.’
마리엔은 아무쪼록 제 몫까지 행복하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하긴 지금 바일레온의 눈앞에 휴고가 없는 편이 나을 거다.
‘그래도 같은 월급쟁이로서의 정이 있는데. 한 번은 돌아봐주지…….’
휴고는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그대로 집무실을 나갔다. 나가면서 친절하게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달칵.
이제 좁은 집무실엔 마리엔과 바일레온 단둘뿐이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요?”
바일레온이 천을 뒤집어씌운 상자에 눈길을 주었다. 상대가 묻기도 전에 지레 찔려서 떠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마리엔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4황녀 전하께서 찾으세요.”
“저를요?”
마리엔의 눈이 커졌다.
“왜요?”
이 말을 할 때 마리엔은 구석의 상자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설마 아닐거야.’
아무리 곳곳에 소식통을 깔아놨다고 해도 그렇지. 황궁이 얼마나 광활한데. 벌써 오데트 귀에 약혼자의 외도 소식이 들어갔단 말인가 싶었다.
‘미쳤어. 외도란다. 나는 결백하거든?’
퉤퉤퉤.
마리엔은 카인의 처소가 있는 쪽으로 침 뱉는 상상을 했다.
그나저나 휴고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다. 단어 선택에 조심하자. 오데트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전령이 거기까지는 얘기 안 해주더군요.”
“한마디라도 미리 언질을 주면 어디 덧나나…….”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번엔 우리 둘을 같이 불렀으니까. 내가 도울게요.”
바일레온이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었다. 연인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리저리 찔리는 구석이 많은 마리엔이었다.
“마리엔.”
“네?”
“머리는 다시 매만지는 게 좋겠어요.”
◇ ◆ ◇
사라지고 싶다.
4황녀궁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마리엔이 한 생각이다.
오데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불과 두어 시간 전, 다른 여자에게 값비싼 선물을 보낸 약혼자 블랙우드 공작이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태연히 찻잔을 기울이는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마리엔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설마 저놈이 제 입으로 불어버린 건 아니겠지?’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계약서 내용대로 해주겠다. 블랙우드의 힘을 보태주겠다. 하지만 시기의 문제일 뿐, 난 기어코 마리엔 디디를 가질 것이다. 이미 보석과 드레스 선물도 보냈다.
‘미친 소리 같지만 놈이라면 가능해!’
카인 놈이 벌써 저질러버렸다 치자. 과연 오데트 눈에 저는 어찌 비치려나. 남자 조력자들 기강을 흩트리고 다니는 골칫덩이로 보이지는 않을까?
마리엔은 오데트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얼음 조각상 같은 황녀의 얼굴에선 어떤 조짐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비어스가 4황녀 전하를 뵙니다.”
옆에서 바일레온이 인사했다. 마리엔은 얼른 따라서 예를 갖췄다.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며 고개만 숙이는 바일레온과 달리 마리엔은 또 무릎을 반으로 접어야 했다.
다행히 오늘은 첫 만남 때처럼 무형의 힘이 어깨를 짓누르지는 않았다.
‘이 짓도 자주 하지는 못하겠어.’
위에서 누르는 힘이 없어도 힘든 건 여전하다. 마리엔은 가여운 제 무릎연골을 떠올리며 슬피 울었다.
‘최대한 알현할 일이 없도록 하든가 해야지. 아니면 나도 작위 받고 신분 상승할래.’
내 무릎. 내 허벅지. 다 끊어지네.
“편히 해도 좋아, 비어스.”
“감사합니다.”
살았다. 마리엔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차분한 지적이 돌아왔다.
“내가 마리엔 디디 보좌관도 일어나라고 했던가?”
마리엔은 즉시 무릎을 다시 굽혔다. 고개를 푹 숙이는 건 덤이다.
“안 하셨습니다.”
“언제 봐도 자세가 괜찮구나. 종종 내궁에 와서 어린 시녀들에게 시범을 보여도 좋겠어.”
“과찬이십니다.”
오데트가 입매를 늘였다.
“한마디도 안 지고 대답하는 건 여전하네. 장난 좀 쳤단다. 너도 일어나렴.”
장난 두 번 치셨다간 제 다리가 부러지겠어요.
마리엔은 그제야 몸을 바로 했다. 방관자인 척, 이 모든 일을 유유히 지켜보고만 있는 카인 놈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 오데트가 말했다.
“비어스, 표정 풀어. 경의 사람에게 장난 좀 쳤기로서니 벌써부터 날 미워하기야?”
마리엔은 반사적으로 바일레온을 쳐다봤다. 자신보다 한 발짝 앞에 서 있는 터라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옆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를 미워하겠습니까.”
“거울 갖다줄까? 지금 경의 표정이 어떤지 한번 보겠어?”
“괜찮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바일레온이 담담한 말투로 잘라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황태자 쪽에서 조만간 소식이 있을 거야.”
오데트의 시선이 마리엔에게 옮겨갔다.
“훌륭한 계책을 낸 사람과 향후의 일을 의논하고 싶어서.”
오데트가 자리를 권했다. 마리엔과 바일레온은 오데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불편한 4자 대면이 있으려나?
시녀가 새로 온 사람들 몫의 차를 내왔다. 마리엔은 서둘러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적어도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말을 안 해도 된다.
그때 마리엔 앞으로 설탕 그릇이 쓱, 디밀어졌다.
세 사람 중에 누가 그런 짓을 할까.
당연히 카인 블랙우드다.
그놈밖에 없다.
차를 마시자마자 설탕 한 스푼을 타고 싶었던 마리엔은 오히려 카인 때문에 설탕 그릇을 못 건드리게 됐다.
“우유는 여기 있습니다, 보좌관.”
놈은 막 나가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 오데트와 바일레온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데 이런 짓을 서슴없이 벌였다.
그 와중에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이라니. 황당해서 진짜.
“공작의 배려에 제가 대신 감사드리죠.”
바일레온이 설탕 그릇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뚜껑을 열고는 앙증맞은 티스푼으로 설탕을 소복하게 떴다.
“마리엔.”
바일레온이 다정히 이름을 불렀다. 마리엔은 영혼이 가출한 표정으로 찻잔을 갖다 댔다. 눈꽃처럼 흰 설탕이 붉은 차 속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녹기는 얼마나 잘 녹는지.
마리엔은 자신도 설탕처럼 투명해져서 도망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바일레온이 물었다. 마리엔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유는요?”
“제가 할게요.”
마리엔이 애매하게 웃으며 우유가 담긴 앙증맞은 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매끈한 도자기 감촉이 느껴져야 하건만, 손끝에 닿은 건 소름 돋게도 카인 놈의 손가락이었다.
마리엔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이에 카인이 짧게 말했다.
“찻잔.”
우유 따라줄 테니까 갖다 대라는 뜻이렷다. 마리엔은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둘러댔다. 당연히 카인은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보좌관, 찻잔?”
셋만 있는 자리면 들고 있는 차를 놈의 머리에 끼얹어주는 건데.
더는 거절로 시간을 끌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엔은 분을 꾹꾹 참으며 찻잔을 카인의 앞에 들이댔다.
“더?”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오데트를 쳐다볼 엄두도 안 난다.
남자들의 미친 신경전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걸 오데트 앞에서 하고 있으니 마리엔 디디의 심장이 실시간으로 졸아붙을 지경이다.
‘다들 나가주세요. 저 혼자 있고 싶어요. 그게 안 되면 저 혼자 나가게라도 해달라고요!’
바싹 마른 입을 축이려고 차를 마시고 있긴 한데, 솔직히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다들 친절하기도 하지.”
셋이서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오데트다.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태자궁과 근본부터가 달라.”
오데트가 마리엔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니?”
“네,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단합력이라 생각합니다.”
마리엔은 아무 말을 주절거렸다.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할 용의가 있었다.
“전하, 그래서 황태자 전하로부터 어떤 소식이 들려올 것 같나요? 공공도서관 사업 건은 이제 완전히 구제 불능 상태에 빠진 거고요?”
“그런 셈이지. 오늘이 지나면 모든 덫이 완성돼.”
애써 화제를 일 얘기로 넘겼건만, 카인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겐 다소 지루한 이야기가 오갈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해진 사항만 이후에 알려주셔도 충분합니다. 새삼 말하지만 블랙우드 공작가는 전하의 계획에서 물주를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빛나는 계책이 아니라, 라고 덧붙일 때 카인의 푸른 눈이 바일레온을 향했다.
카인이 오데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녀를 쳐다보면서 하얀 손등에 키스했다. 여기까지는 약혼녀에게 하는 평범한 작별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안녕히.”
오데트에게서 등을 돌린 카인은 바일레온에게 성의 없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카인은 마리엔에게 말없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지나갔다. 너무나 대담하다 못해 뻔뻔하고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그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