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66)
바일레온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곧 들을 수 있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네요.”
세상엔 굳이 몰라도 될 것이 분명 있다. 한데 정작 마리엔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긴다고 생각하니까 서운한 감정이 밀려든단다.
마리엔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제가 너무 쉽게 해결하려 했나 봐요. 실은 저도 똑같은 고민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니까. 비어스 경한테 직접 물어보자! 비어스 경의 선택대로 하는 거야! 이런 생각으로 왔거든요.”
“그 말인즉.”
바일레온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게 말해야 할지 숨겨야 할지 헷갈리는 일이 있다는 거군요.”
“네.”
“……4황녀 전하와 연관된 일인가요?”
마리엔은 조용히 눈을 굴렸다.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고 생각 깊은 바일레온.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책에 빙의한 건 나잖아. 근데 왜 나 빼고 다 독심술의 대가인 것 같지?’
비밀리에 잠입시킨 조사관과 소식통 덕분이라면, 외주 인력 하나 없는 마리엔 디디는 어쩌란 말인가.
‘맨날 나만 발로 뛰어.’
마리엔은 연인을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께서 시키신 일을 미물인 제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냐는 의미를 눈빛에 실어 보냈다.
“들을 준비 됐어요. 말해봐요.”
아니, 이렇게 빨리 효과가 나타나면 다른 의미로 곤란한데?
마리엔은 내심 당황했다. 잠깐 기다리란 뜻으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지, 진정하세요.”
“지금 내가 흥분한 것처럼 보여요?”
바일레온이 작게 웃었다.
“아깐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어느 때보다 차분하니까 말해봐요.”
“하지만 비어스 경이 싫어하실 게 분명한걸요. 아니면 혹시…… 대강 어떤 내용인지 이미 알고 계세요?”
“마리엔, 떠보지 말고요. 그럼 대화는 맴돌고 속앓이하는 시간만 길어져요. 응?”
큰 문제다.
바일레온 이 남자가 하는 말은 다 일리 있게 들린다.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이럴 때마다 마리엔은 일정한 돈을 내면 문제의 정답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를 너무 날로 먹는 것 같다면 상세한 정답이 아니라 O, X만이라도 가르쳐달라! 지능캐가 아닌 사람도 좀 배려해달라고!
왜냐면 그게 바로 나니까!
“저도 4황녀 전하처럼 자기 언행에 확신이 있으면 좋겠어요…….”
마리엔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다리던 질문이 아닌데도 바일레온은 이를 흘려듣지 않았다.
“재밌네요. 난 마리엔 하면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네?”
“최근 일을 꼽자면 블랙우드 공작을 민머리로 만들려던 게 있겠네요.”
전혀 예상치 못한 깨달음에 마리엔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바일레온은 자기가 태어나서 들은 말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고 담담히 술회했다.
“심지어 그때 당신은 이유를 알려주지도 않았어요.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그러니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했죠. 한데도 내가 마리엔을 도왔던 건…….”
바일레온이 마리엔의 동그란 뺨을 톡, 건드렸다. 연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모든 걸 압도하는 절박함과 어마어마한 확신 때문이었어요.”
“아.”
“내가 장담하건대 그만한 확신이면 새로운 종교도 만들 수 있을걸요.”
그렇구나. 어엿한 교주가 될 만한 광기였구나.
마리엔은 그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반짝반짝 민머리, 아름답게 비치네. 한동안 돌림노래처럼 제 머릿속을 지배한 멜로디도 잇따라 생각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불편한 진실과 마주치게 됐다.
‘어쩌면 난 바일레온보다 그리도 혐오하는 카인에 가까운 인간이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 입지 않게 배려하고 싶을 땐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반면 저놈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싶은 순간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남 괴롭히는 데 특화됐어.’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빼어난 오데트나 바일레온과 같은 선상에 오를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마리엔 디디는 자신의 수준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저, 저 인성 터진 카인 블랙우드와 같은 부류고 싶진 않다고!
“종교라고 하니까 원래 제가 하려던 말이 다시 떠오르는데요.”
마리엔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심호흡했다.
“전 내일 아나이스 사제가 있는 신전에 가야 해요. 사제에게 질문 몇 개를 하고 오란 명을 받았거든요.”
마리엔은 최대한 간략하게 사실만 전달했다. 원문 그대로 말하면 듣는 쪽의 속만 상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모레 신전에 갈 땐 머리를 한쪽으로 느슨하게 땋아서 가슴 앞으로 늘어뜨리렴. 도수 없는 안경을 빌려줄 테니 그것도 쓰고 가. 옷은…… 알아서 적당히 입고. 지나치게 특정인을 연상시키는 것도 좀 민망하니까.”
어떻게 꾸미고 가라고까지 오데트가 정해줬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바일레온은 축약한 내용만으로도 전후 사정을 파악했다.
“전하께서 마리엔의 쓰임새를 정하신 모양이군요.”
오데트와 바일레온은 뇌를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마리엔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는 두 사람에, 아주 약간의 소외감을 느꼈다.
직접 얘기하지 않아도 척척 통하니 좋겠다.
“쓰임새를 정했다기보다 과연 저를 전령으로 보내는 게 통하는지 보는 거죠. 일종의 시험이랄까요.”
“당신이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바일레온이 문득 쓸쓸한 얼굴을 했다.
“안 통할 리 없잖아요.”
“아하하.”
마리엔은 어색하게 웃는 소리만 냈다.
“후한 평가에 감사드려요. 아무튼 제겐 이게 통해도 문제고, 안 통해도 문제예요. 전하께선 분명 후자를 기대하고 계실 테니까요.”
바일레온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좋은 향내가 났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리엔은 두 팔을 벌려 바일레온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그의 불안이 조금이나마 덜어지지 않을까?
애착의 대상을 강하게 꽉 안아주면, 충족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길 어디서 본 것 같다. 마리엔 자신의 기분이 좋은 건 덤이다.
“비어스 경.”
“듣고 있어요.”
“바일레온.”
“…….”
“화난 건 아니죠? 장난인데…….”
바일레온이 약간 말을 더듬었다.
“아뇨. 화나지 않았어요. 그, 그냥 갑자기…….”
“놀라셨구나.”
“네, 갑자기 마리엔이 부르는 내 이름을 들으니까.”
바일레온의 손이 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깨닫지 못한 새 머리카락에도 감각이 생긴 걸까.
그의 손길에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바일레온의 커다란 손이 분홍빛 머리카락을 사르르 감아 쥘 때마다 발가락까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서.”
바일레온이 점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깨끗한 치약 냄새가 나는 숨결이 마리엔 가까이 다가온다. 목소리도 왠지 아까보다 탁하게 잠긴 것 같고.
“어지러워요.”
“네……. 아, 잠깐. 어, 어지러우세요?”
그래서 이렇게 자기한테 기대는 건가 싶었다.
“어지러우면 의자에 앉으실래요? 아니면 침대에 눕혀드릴까요? 비어스…….”
마리엔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고개를 든 그곳에 바일레온의 열 오른 시선이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일레온은 지금 진짜로 어지러운 게 아니다.
“마리엔, 내가 아까 한 말 기억해요? 키스는 확실히 예고하겠다던 말.”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을까? 이렇게 조금 끄덕여도 바일레온이 알아보려나? 그러나 바일레온은 알아봤다.
“지금…… 해도 돼요?”
바일레온의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마리엔은 그 안에 비친 자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마리엔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살았다는 듯이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매끄럽게 맞닿는 입술.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는 가쁜 호흡.
바일레온의 손이 제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리엔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첫 키스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의 말대로, 지나치게 달콤해서 어지러운 밤이었다.
◇ ◆ ◇
다음 날.
마리엔은 신전으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제 모습을 점검했다.
자신은 오늘 앞부분에 세로로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에 긴 스커트를 입고, 느슨하게 땋은 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렸다.
여기에 오데트가 준 동그란 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맡은 임무를 수행하러 온 황녀의 측근보다 도서관 사서에 가까워 보였다.
그나저나 이 헤어스타일은 선하지만 병약한 어머니 캐릭터가 주로 하는 머리 아닌가?
얼마나 자주 나왔으면 ‘단명 헤어’라는 농담까지 떠돌 정도로 유명한 머리다. 이 머리를 한 여자 캐릭터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다는 것이다.
오데트의 어머니는 병사하지 않았지. 그래도 어쨌든 불행의 징조 같은 머리를 해서, 결과적으로 단명한 걸까?
세이브릴 하룬.
제국의 이웃 나라이자 오랜 적국인 하만 왕국에서 파견한 스파이.
8개 국어에 능통하고, 해독 못 하는 암호가 없으며, 맨손으로도 순식간에 무장군인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알고 있다.
오데트의 뛰어난 머리는 확실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황제가 보낸 놈들에게 모녀가 잡히기 전까지는 세이브릴이 어린 딸을 직접 가르쳤을 터.
‘근데 황태자도 매료시킨 적국의 스파이라고 하면 왠지…… 관능적인 분위기란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가.’
마리엔은 거울 속 자신을 묵묵히 쳐다봤다.
사서, 따분한 모범생, 자원봉사자, 늘 성경 끼고 다니는 교회 언니. 아무리 봐도 이런 이미지밖에 연상되지 않는다.
‘뭐, 되게 안전하게 보이긴 하네.’
당시 황태자였던 오데트의 아버지. 그는 고귀한 지위 때문에 입가에 미인 점을 찍은 관능적인 타입은 일단 주의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교육받았을 거다.
가뜩이나 경계심 많은 남자에게 접근하려면, 이처럼 ‘안전한’ 모습이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이유가 뭐든 간에 마리엔 디디보다 예쁘고 똑똑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니 그만 주절거리고 임무를 완수하러 가자.
마리엔은 기세 좋게 신전으로 발을 들였다. 여기가 음란한 사이비 놈의 소굴이렷다. 그런 색안경을 끼고 보자 눈에 들어오는 모든 요소가 미심쩍었다.
“자매님,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그때 나이 지긋한 여인이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사제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그녀도 레슬리 놈과 같은 사제인 모양이었다. 마리엔은 그녀 덕분에 원래 사제복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경건하고 깨끗해 보이잖아. 움직이기에 불편해 보이지도 않아. 역시 그놈이 문제였어.’
흡사 악당 소굴로 진입한 주인공처럼 눈에 보이는 놈은 다 뚜드려 팰 기세였던 마리엔이다.
하지만 막상 어린아이 손을 잡고 있는 온화한 사제와 마주하자, 방금 지상에 떨어진 토끼 천사처럼 웃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아나이스 사제님을 뵈러 왔는데요.”
“오, 그분은 지금 고해성사실에 계신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니 저기 의자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제가 아이